[이길구박사의 계룡산이야기] <17> 동학사 초혼각지

우리에게 너무 잘 알려진 동학사(東鶴寺). 그곳에는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다. 바로 유교사당 ‘초혼각지(招魂閣址)’다. 불교사찰에 왜 유교사당이 있는 걸까? 이해하기 힘든 현실이지만 동학사와 초혼각지는 오랜 세월동안 함께 해왔다.

지난 23일 동학사 숙모전에서 ‘2016 병신년(丙申年) 숙모전(肅慕殿) 동향대제(冬享大祭)’가 열렸다. 겨울을 앞둔 제법 쌀쌀한 날씨였다. 홍살문을 지나 숙모전 입구에 이날 행사에 대한 안내 현수막이 보였다. 숙모전 입구는 전국에서 온 많은 인파로 붐볐다.

길재·정몽주·이색 제사 모시는 삼은각

제향일정은 축원제, 초혼례, 숙모전대제, 삼은각·동계사 동시봉행 순이다. 축원제는 동학사 대웅전에서 있었다. 돌아가신 충혼의백(忠魂義魄)에 대한 기원제다. 초혼례는 숙모전의 인재문 앞에서 엄숙하게 진행됐다.

이어 가장 큰 행사인 숙모전대제가 있었는데 초헌관은 정의화 전 국회의장이, 아헌관은 오시덕 공주시장이, 종헌관은 유신섭 숭모회이사가 맡았다. 숙모회 이사장은 정문화 님인데 아마 포은 정몽주의 후손이 아닌가 한다. 날씨가 쌀쌀함에도 이날 전국에서 참여한 인원이 500여 명이 넘은 것으로 볼 때 포은의 후손을 비롯한 목은, 야은의 후손들인 듯하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이 행사를 관여해온 한 유사(有司)로부터 숙모전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인터뷰 형식으로 꾸며봤다.

초혼각지라 함은 제가 알기로는 ‘동계사(東鷄祠)’, ‘삼은각(三隱閣)’, ‘숙모전(肅慕殿)’을 말하는 것 아닌지요?

“예,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동학사라 하면 불교만을 신봉(信奉)하는 절로만 생각합니다. 사실 절은 보잘 것 없었는데 도참풍수설(圖讖風水說)의 대가였던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 신라 말 승려)가 여기에 내려오고 이어 고려 태조 19년(935) 이곳에 신라 말 충신 박제상(朴堤上)을 제사지내기 위한 동계사를 건립했습니다. 이후 역대 왕조에서 충의절신(忠義節臣)한 충신을 수호하는 전당으로 이어졌지요.”

동계사는 신라 19대 눌지왕(訥祗王) 때 일본에 인질로 잡혀간 왕의 동생 미사흔(未斯欣)을 구출하고 일본에서 순절한 박제상을 말하는지요. 항일(抗日) 충혼의 대표적인 분이시죠. 그럼 삼은각(三隱閣)은 누구를 모신건가요?

“삼은각(三隱閣)은 조선 초기에 부속암자였던 현 사찰 옆에 고려시대의 문신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선생이 월영(月影)·운선(雲禪) 스님과 함께 태조 3년(1394)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를 위해 제단을 설치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그 후 정조원년 유방택(柳芳澤, 1320년~1402년, 고려 말 조선 초의 천문학자)이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제를 지냈고 이후 야은 길재까지 모셔 지금의 ‘삼은각’이 되었답니다.”

초혼각(招魂閣)은 조선 세조(世祖)에 의해 원통하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端宗)과 정순왕후(定順王后)를 모신 정전(正殿)이 아닌가요?

“단종(1441~1457)은 물론 계유정란(癸酉靖亂) 때 원통하게 죽어간 충신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입니다. 이곳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충절과 애통함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1455년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김시습은 머리를 깎고 동학사로 내려와 통곡(痛哭)을 했지요. 다음 해 사육신이 참수(斬首)를 당한 뒤에는 시신을 거두어 노량진 언덕에 매장하고 동학사로 다시 돌아와 단(壇)을 만들어 제사를 지냈습니다. 2년 뒤 세조가 동학사에 들렀다가 이 내력(來歷)을 듣고 자신으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280명을 위해 초혼각을 짓고 초혼제를 지냈습니다.”
  *계유정란(癸酉靖亂) : 1453년 수양대군이 단종의 보좌 세력이자 원로대신인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사건

가해자 세조, 단조 비롯한 280 사절제위 원통함 풀어주려 초혼각 건립

좀 이상합니다. 가해자인 세조(世祖)에 의해 초혼각이 세워지고 그가 초혼제를 지냈다는 것이.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세조는 1458년에 속리산(俗離山)에 갔다가 동학사에서 김시습의 이야기를 듣고 단종(端宗)·안평(安平)·금성대군(錦城大君) 등 종실(宗室)과 황보인(黃甫仁)·김종서(金宗瑞) 등 당시 죽음을 당한 280여 사절제위(死節諸位)의 병자원적(丙子原籍)과 추가원적(追加原籍)을 작성해 친히 이곳에서 초혼제를 올리기 위해 초혼각(招魂閣)을 건립했습니다. 그리고 돌아갈 때 후회와 슬픔을 이기지 못해 너르고 평평한 바위 위에서 뒤돌아보고 울고, 재차 그 아래쪽 바위에서 또 돌아보며 걸음을 자작거렸지요. 그리하여 동학사 입구에는 세조가 울었다는 ‘울바위’와 자작거렸다는 ‘자작바위’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답니다.”

그 후 어떻게 되었나요.

“이후 조선왕조 내내 선비들은 이곳을 충성지로 여겨 순례(巡禮)하는 습속(習俗)이 있었어요. 그리고 돌아갈 때는 반드시 울바위·자작바위에서 세조처럼 울고 자작거리는 행동을 관례화했지요. 제사는 단종 승하일 음력 10월24일에 매년 치제(致祭)를 거행했습니다. 그 후 세조 13년부터는 음력 3월15일에도 실시하여 연 2회 치제를 거행하는데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답니다.”

"피 흐르는 봄 골짝에 꽃 붉게 떨어지네"

행사를 마치고 필자는 삼은각을 비롯한 초혼각지 일대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충혼의 영령 위패(신위)를 보니 당장이라도 그분들이 뛰어나올 것만 같았다. 현세를 사는 우리는 너무도 많은 것을 잘못하면서 살고 있는 것을 고백한다. 마음이 아파왔다.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단종 임금께서 영월(寧越)에 계실 적에 지은 <자규루(子規樓)>란 시가 생각나서 마음속으로 읊었다.

울음소리 끊긴 새벽 산에 그믐달이 비추고(聲斷曉岑殘月白),
피 흐르는 봄 골짝에 꽃 붉게 떨어지네(血流春谷落花紅).

이날 참석자들은 집안의 후손도 있었지만 상당수는 유학자로서 공맹(孔孟)의 도(道)를 공부하는 분들이다. 필자 역시 공자의 말씀인 논어를 공부하고 후학을 가르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군자가 배불리 먹기를 바라지 아니하고, 거처에 편안하기를 바라지 아니하며, 일에는 민첩하고, 말을 앞세우지 아니하며, 덕행이 높은 이에게 나아가 스스로를 바로 잡는다면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子曰 君子食無求飽 居無求安 敏於事而愼於言 就有道而正焉 可謂好學也已.【論語 學而14章】)

과연 나는 공자의 말씀처럼 행했는가? 반성이 솟구쳤다. 참으로 초혼각 앞에 서기가 부끄러웠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공자님의 말씀을 되새겼다. 

‘군자가 무게가 없으면 위엄이 없으니 배워도 견실하지 못하다. 충성과 신의를 으뜸 삼으며 자기보다 못함 사람을 벗 삼지 말고 잘못된 점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 지 말아야한다.’
(君子不重則不威 學則不固. 主忠信 無友不如其者 過則勿憚改.【論語 學而8章】)

필자 이길구 박사는 계룡산 자락에서 태어나 현재도 그곳에서 살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계룡산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 산의 인문학적 가치와 산악문화 연구에 몰두하여 ▲계룡산 - 신도안, 돌로써 金井을 덮었는데(1996년)  ▲계룡산맥은 있다 - 계룡산과 그 언저리의 봉(2001년)  ▲계룡비기(2009년) ▲계룡의 전설과 인물(2010년) 등 저서를 남겼다.
 
‘계룡산 아카이브 설립 및 운영방안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기록관리학 석사(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를, 계룡산에 관한 유기(遊記)를 연구 분석한 ‘18세기 계룡산 유기 연구’,  ‘계룡산 유기의 연구’ 등의 논문을 발표하여 한문학 박사(충남대학교 한문학과)를 수여받았다. 계룡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지금도 계룡산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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