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저리게 느꼈다. 검증되지 않은 사람과는 함께 일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나는 2년 전에 어느 단체의 회장에 당선 되었다. 회장에겐 사무국장을 지명하는 권한이 있었는데, 며칠을 고민하다 나와 경쟁했던 상대편 후보에게 그 일을 맡겼다. 그 소식을 듣고 사람들은 ‘승자의 포용력’이란 말을 했지만 내가 그를 지목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는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갖고 있었다.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드는 재주는 물론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금세 친해지는 막강한 무기가 있었다. 그래서 선거기간 내내 나는 그가 부러웠다.


그렇다면 실제로도 그랬을까. 아니었다. 달콤한 것에는 모두 독이 있듯 그는 앞모습과 뒷모습이 다른 두 얼굴의 사나이였다. 포장지와 내용물이 전혀 달랐다고나 할까. 똑똑하고 싹싹하고 고분고분 할 것이란 내 예상과 달리 먼저 흥분하고 신경질을 부렸다. 게다가 한번 꼬투리를 잡았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싸움꾼이었다. 정말이지 신비로운 재주였다.

심각한 문제는 또 있었다. ‘소통의 부재’였다. 회장과 사무국장은 자주 만나 상의해야 하는데 이러한 과정이 없었던 거다. 눈과 귀가 닫힌 회장은 그때부터 회장이 아닌 것처럼 나는 허수아비 바지사장에 불과했다. 두 얼굴의 사나이 때문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그제야 내 발등을 내가 찍었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나는 중대한 실수를 범했다. 기본적인 것. 이를테면 주변 사람들에게 두 얼굴의 사나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 봤어야 했는데 그 과정을 빼먹은 것이다. 슬펐다. 그가 못돼서 슬픈 것이 아니라 바보 같은 내가 슬펐다. 그렇다고 함부로 그를 자르기도 어려웠다. 터져 나오는 허망감에 벽에 머리를 찧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신은 때맞춰 구세주를 보내주신다. 대학 총동문회에 참석한 은사님께 지금까지의 과정을 소상히 말했다. 이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교수님이 말했다. “믿을 수 없는 사람에겐 일을 맡기지 않아야 되지만, 일을 맡겼다면 끝까지 믿어주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당연하고도 옳은 말이었다. 핵심을 얘기한 것 같았다. 무지함 때문에 내 얼굴이 달아올랐다. 내가 부족했던 것은 그에 대한 믿음이 아니었을까. 다음날부터 실행에 옮겼다. 싫더라도 그를 자주 만나는 방법을 택했다. 그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고개를 끄덕이고, 질문을 던지며 상의했다. 머리를 맞대니 비로소 뭔가 돼간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도 경계심이 풀렸는지 생전 상의를 않던 “뒤풀이 장소는 어디가 좋겠냐?”고 물어봤다. 우스웠다. 여때껏 지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했으면서 왜 물어볼까.

어느 덧 시간이 흘러 2년의 임기를 끝낸 지금 두 얼굴의 사나이와 썩 좋은 사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얼굴을 붉히는 사이도 아니다. 그와 일을 하며 배운 것이 바로 믿음이다. 내가 너를 믿고 있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심어 주는 것. 그래야만 함께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믿음’의 반대는 ‘불신’이 아니라 ‘의심’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의심이 시작되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상대에 대한 실망으로 이어진다. 이런 예는 어떨까. 아는 사람에게 결혼청첩장을 받았다. 마침 그날 사정이 생겨 참석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한다. 양해를 구하고 직접 그에게 보내주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전달을 부탁을 하든지. 이때 내 돈이 잘 전달되었는지 의심한다면 어떤 현상이 생길까? 이미 내 손을 떠난 돈은 내 돈이 아닌 것. 

문득 14살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중학생 때 2년 동안 신문배달을 한 적이 있다. 신문을 보던 독자 중에 별것 아닌 일로 생트집을 잡는 사람이 있었다. 인수인계를 해주던 사람은 그를 ‘진독’이라고 불렀다. 진상독자. 진독은 개가 신문을 물어뜯으면 너희들이 잘못해서 그렇다며 배달하는 사람의 실수로 돌렸고, 눈이 내려 늦은 날은 게으르다고 화를 냈다. 그 모든 것이 구독료를 내지 않으려는 꼼수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만 배달하는 사람의 입장에선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노력 할 수밖에 없었다. 잘못 보여 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 개가 물어뜯지 않는 곳에 신문을 놓았고, 비 오는 날은 젖지 않도록 비닐포장을 해줬다.

반응이 6개월 후에 나타났다. 보급소장이 나에게 말했다. “그 사람이 네 칭찬을 하더라. 하루도 빠진 날이 없고 네가 아주 성실하고 꼼꼼하다고.” 나는 그 말에 우쭐했다. 왜냐하면 까다로운 그가 인정해줬으니까. 그 후로 나는 변했다. 그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나 할까. 그에게 공손해졌고 친절했으며 예의를 갖췄다. 그 집에 신문을 넣을 때마다 이렇게 생각했다. ‘이분은 나를 인정해준 사람이다. 실망시키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상대를 인정해 줄 때 생기는 힘이 아닐까. 살다보면 나라는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으며 혼자 외톨이가 된 느낌. 그럴 때 누군가 나를 인정해준다면 얼마나 기쁘겠는가. 아마도 나를 인정해 주는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지 않을까.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윗사람이 부하를 잘 선택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옳은 주인을 섬기는 일이다. 즉 똑똑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나지 못하면 빛을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역사 속에는 아둔한 군주를 섬겼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사람이 많다. 《초한지》의 유방의 신하였던 대장군 한신이 그랬고, 항우의 모사였으며 중국의 3대 책략가로 꼽히는 범증이 그랬으며, 《삼국지》에선 원수의 일급 참모였던 저수와 전풍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군주가 훌륭한 신하를 얻게 되면 패왕의 위업을 달성 할 수 있지만 어두운 군주를 섬긴 신하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한다고. 

《삼국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적벽대전의 주인공이었던 주유가 노숙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때 이렇게 말했다. “난세에는 군주만이 신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신하 역시 군주를 선택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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