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일이니?” 고등학생인 딸아이가 일찍 집에 왔다. 아이가 말했다. 담임선생님께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야간 자율학습을 빼먹고 왔다고. 탄식이 터져 나왔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어쩌려고 그러니? 딸아이는 야자를 하기 않기 위해 가족모임이라고 둘러댔고, 집안 행사가 있다며 집에 왔다. 안 그랬던 아이였는데 왜 이럴까?


 내 딸은 축복 속에서 태어났다. 사형제인 집안의 셋째로 자란 나는 남자들의 건조함을 몸으로 느끼며 성장했다. 이를 익히 알고 있는 둘째 형은 딸을 키우려는 욕심에 아이를 낳다 아들만 넷을 두었다. 딸이 태어났을 때 나는 흥분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산부인과 분만실 앞에서 소리를 질렀다. 만세. 나도 이젠 딸을 키우는 사람이다.


 키우는 기쁨은 더 컸다. 처음 뒤집기를 했을 때, 일어나 걸었을 때, 아빠라고 불러줬을 때, 그때마다 내 입에선 감탄사가 흘러 나왔다. 아, 인간은 참으로 아름다운 존재구나. 그래서 모든 아이들은 사랑 받아야 마땅하구나. 하지만 사춘기를 거쳐 고등학생이 된 지금, 이젠 더 이상 아빠의 뺨에 입을 맞추며 “사랑해요”라는 말을 하지 않을 것 같다. 지금의 딸아이는 한껏 부풀어 오른 풍선 같다. 살짝만 건드려도 펑, 소리를 내며 터져 버릴 것 같은 팽창된 풍선.


 “앞으로는 야간 자율학습 안 할 거예요.”  저녁을 먹던 딸내미가 우리 부부에게 말했다. 이게 무슨 뜻일까? 야간자율학습을 안하겠다니? 학생의 의무를 안 하겠다는 뜻일까? 어디선가 날아온 돌멩이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아이에게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너는 학생이기 때문에 공부를 해야 하고, 시집가기 전까지는 엄마 아빠의 말을 들어야 된다고.

내가 물었다. 왜 야자를 안 하려는지. 아이가 말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제가 원하는 일을 하고 싶어요.” 아이의 말인즉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하느니 차라리 그 시간에 자신의 꿈을 위해 노력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2년 전이었다. 아이의 꿈이 ‘댄스가수’라고 했을 때 우리 부부는 누구나 청소년 시기에 한번쯤 가져보는 꿈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우리 집 아이도 현실로 돌아와 남들처럼 ‘선생님’같은 평범한 꿈으로 바뀔 것이라고 믿었다.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도 내 딸은 달라지지 않았다. 

 “학교에서 상담선생님과 얘길 했는데 저는 지금 스트레스가 심한 상태래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부모님께 빨리 알려야 한데요.”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아이가 말하는 무슨 일이란 도대체 뭘까? 궁금증은 금방 풀렸다. 17살짜리의 입에선 상상하지 못했던 얘기들이 술술 쏟아져 나왔다. 가출, 자퇴, 자살……. 순간 내 머릿속은 아수라장이 돼버렸다. 자살이라니? 뉴스에 등장하는 자살은 나와는 상관없는 먼 곳의 일이었는데, 이젠 내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되어버렸구나.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서운함. 실망, 분노, 두려움……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가수는 대학에 가서 생각해도 늦지 않잖아. 지금은 공부만 하고……”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이가 젓가락을 식탁 위에 올려놓더니 방문을 쾅, 소리 나게 닫고 들어갔다. 아빠와는 더 이상 얘기하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백만 년이 지나도 자신의 뜻을 절대로 굽히지 않겠다는 의미 같았다. 그날 이후 아이는 모두가 잠든 밤에만 방에서 나왔다.

불편한 날들을 보내며 나에게 물어보았다. 무엇이 내 딸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매스미디어의 영향은 아닐까. TV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며 가수의 꿈을 키운 것은 아닐까. 자신도 노력하면 저들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가슴속에서 몇 마디 말로는 형용될 수 없는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다. 아이가 저 정도가 될 때까지 나는 무얼 했단 말인가? 남들 앞에선 아이의 친한 친구 이름까지도 안다고 자부했지만 내가 더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세상의 모든 부모가 그렇듯 나도 할 얘기가 있었다. 너의 꿈을 응원해 주는 것이 당연하지만 가수가 되는 것은 평범한 부모 아래에선 불가능하며, 노력해도 안 되는 일들이 있다고. 설령 가수의 꿈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대중은 새로운 자극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인기가 떨어졌을 땐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아빠가 생각하는 ‘행복한 삶’은 인기를 쫓는 외적 조건이 아니라, 자신의 환경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설득하고 싶었다.

고민 끝에 아내와 나는 이렇게 결정했다. 우리가 딸아이에게 무엇을 해야 한다고 강요하지 말고 한사람의 인격체로 의견을 존중해 주며, ‘재능이 있을까?’ 라는 의문도 품지 않기로 했다. 그건 시간이 해결 해줄 테니까. 현재 상황에선 자신의 인생을 아이에게 맡겨두는 것이 최선이고 그것이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라고 믿었다. 담임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그동안의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다. 우리를 이해 해주는 그가 얼마나 고맙던지. 선생님과의 통화를 끝낸 뒤 아이에게 말했다. 

“너는 우리가족에게 아주 소중한 사람이야. 그러니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단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가치를 낮추지 않는 마음이 있을 때 네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어. 하지만 노력을 기울여도 진전이 없을 때, 여기가 끝이라는 생각이 들 때, 그걸 과감히 접을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해. 그건 네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해. 아무튼 아빠와 엄마는 언제나 네 뒤에서 응원할게.”

아이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자신을 이해해줘서 고맙다고, 어떤 어려움이라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웃음이었다. 나는 안다. 이것이 시작이라는 것을. 앞으로 얼마나 힘든 일들이 일어날지, 그때마다 우리부부의 속이 얼마나 타들어 갈지 알 순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우리는 내 딸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줄 거고 끝까지 믿어 줄 거다. 그게 부모의 역할이니까. 그것이 부모의 책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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