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훈의 공감소통] 방송인

김경훈 | 방송인
최근 우리사회에서 ‘정직’ ‘신뢰’ ‘믿음’이란 낱말이 왠지 사치스러운 어휘로 멀어져 가는 느낌이다. 대전시의회 의원들의 후반기 원 구성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다. 나 같은 백면서생이 뭘 알겠느냐 만은 시민의 대표라는 그분들을 보며 ‘의리’와 ‘약속’을 떠올린 것은 나뿐일까?

우린 유치원 때부터 이렇게 배웠다. 약속은 지켜져야 하고, 배신하면 안 되며, 타인에게 상처 주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욕망에 따라 낯을 바꾼다. 애당초 약속 따윈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맞은 적이 있다. 단골로 드나들던 카센터가 있었는데, 그 집의 사장은 믿음직스러웠고 기술도 좋았다. 한데 그가 ‘카센터 연합회’ 회장이 되며 가게를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하는 상황이 된다. 문제는 여기서 생긴다. 사장을 대신해 온 종업원은 친절하지 않았고 차를 고치는 능력도 부족했다. 게다가 나태함이란.

내 돈 주며 차를 수리하는데 기분까지 나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다른 곳으로 바꾸기로 마음먹고 선배가 소개해준 카센터를 찾았다. 사장은 상냥했다. 질문을 하면 귀찮아하지 않고 뭐든 자세히 설명해줬다. 마침 타이어를 교체 할 시기가 된 것 같아 그에게 맡겼다. 4개에 68만원. 그가 말했다.

“휠 얼라이먼트는 공짜로 해드리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친절을 받으니 기분이 좋았다. 내가 알기에 ‘휠 얼라이먼트(타이어의 편마모를 방지하기 위한 바퀴정렬)’는 8만원이나 하는데 그걸 무료로 해주겠다니 누군들 싫어하겠는가. 한데 문제가 있었다. 리프트에 이미 다른 차가 있었던 거다. 빼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오늘은 타이어 교체만 하고 다른 날 오시면 그때 해드릴게요.”

사정이 그러면 할 수 없지. 결국 그날은 그냥 돌아왔고 며칠 후 다시 그곳을 찾았다. 한데 사장이 턱을 치켜 올리며 엉뚱한 말을 한다.

“그걸 왜 하시려고요?” 

이게 무슨 말이지? 지난번에 자신의 입으로 해 주겠다고 말했지 않은가. 덧붙여 그가 말한다.

“휠 얼라이먼트는 자주 할 필요 없어요. 편 마모가 발생하면 그때 조정하면 돼요.”

순간 망치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편 마모가 생긴 후면 이미 늦은 일이 아니던가. 편 마모가 생기는지 안 생기는지 어떻게 매일 타이어를 들여다본단 말인가. 해주기 싫으면 싫다고 할 것이지. 그는 필요에 따라 이쪽저쪽 얼굴을 바꾸는 인간 같았다.

원하는 것이 있을 땐 살살거리다가 목적을 달성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달라지는 파렴치한 사람 말이다. 목구멍으로 험한 말이 올라왔지만 나도 똑같은 사람이 될 것 같아 참으며 그냥 돌아 왔다. 다시는 너희 집에 안 갈 거란 다짐을 하면서.

현실을 말해볼까. 모든 인간에게는 양면성이 존재한다. 이를 ‘여측이심(如厠二心)’이라고 하는데, 뒷간에 갈 적 마음이 다르고 올적 마음이 다르다는 뜻이다. 자기에게 긴할 때는 다급하게 굴다가 그 일이 끝나면 마음이 변함을 비유해 쓰기도 한다.

배고플 땐 느끼한 게 끌리다가도, 먹고 나면 그 냄새가 역겨울 정도로 싫어지는 경험, 선거 때면 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올리던 정치인이 당선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거드름을 피우는 것도 인간의 두 얼굴이다.

하지만 믿음과 신뢰가 빛바래져 가고 있는 시대에도 낡은 화두가 있고, 그 와중에도 위세를 떨치고 있는 하나의 단어가 있다면, 그건 바로 ‘의리’다. 우리가 잔혹한 폭력영화라고 손가락질 하면서도 누아르 영화를 보는 이유는 그 속에 의리가 있기 때문이지 않은가.

한때 박지성 선수가 활약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팀에는 라이언 긱스가 있다. 그는 ‘살아있는 전설’로 통하지만 ‘비운의 스타’라는 꼬리표도 따라 다닌다. 그의 국적은 유럽축구에서 전형적인 약체로 꼽히는 웨일스이고 대표 팀 멤버로 오랫동안 활약했지만 동료들이 받쳐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혼자 힘으로 팀을 끌어올리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긱스는 마음만 먹으면 잉글랜드 국적도 가능했지만 숱한 제의를 뿌리치고 웨일스에서 뛰었다. 지금도 축구 전문가 들은 말한다. “그가 잉글랜드에서 뛰었다면 잉글랜드 축구는 세계 최강이 되었을 것”이라고. 이게 ‘의리’다. 자신의 영광보다 조국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끝까지 지키려는 자세가 의리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도 ‘절영지회(絶纓之會)’라는 의리가 나온다. 초(楚)나라 장왕(莊王)이 신하들을 불러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 자리에는 장왕의 애첩 허희(許姬)도 참석했다. 술이 한참 올랐을 때 갑자기 광풍이 불어 촛불이 모두 꺼지고 말았다.

그때 어둠속에서 한 여인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허희의 비명이었다. 한 장수가 불이 꺼진 틈을 이용하여 그녀를 껴안았던 것이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도 그 사람의 갓끈을 잡아 뜯었다. 그리고는 고함을 질었다.

“저를 희롱한 사람의 갓끈을 끊었으니 불을 켜고 그 자를 찾아내도록 하소서.”

그러나 장왕은 연회에 참석한 모든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했다.

“오늘 이렇게 즐거운 연회에서 과인과 술을 마시는데, 갓끈이 끊어지지 않은 자는 제대로 즐기지 않은 것으로 알겠소.”

명에 따라 신하들은 모두 자신의 갓끈을 끊어버렸고 이후 연회장에 불이 켜졌지만 신하들은 갓끈이 모두 잘린 상태였기에 누가 범인인지 찾아낼 수 없었다.

그 후 3년이 지났다. 초나라는 진(秦)나라와 전쟁이 벌어졌는데 열세를 면치 못하며 장왕은 여러 차례 위험한 상황을 맞는다. 그때마다 한 장수가 목숨을 내던지며 장왕을 구했다. 장웅(蔣雄)이란 장수였다. 궁금한 장왕이 그를 불러 목숨을 걸고 자기를 구한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장웅이 엎드려 말했다.

“저는 마땅히 죽을 목숨이었습니다. 연회가 있던 날 밤 술에 취해 무례를 저지른 사람이 바로 저였는데 왕께서 감추시고 덮어주시어 벌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바로 갓끈이 끊어졌던 바로 그 놈입니다. 폐하의 온정으로 살았으니 목숨을 바쳐 은혜에 보답하려 했을 뿐입니다.”

대단한 의리다. 고마움을 표시하고, 그걸 되돌려 주려는 마음. 그게 진정한 의리다. 거짓과 위선이 난무하는 시대에 가장 빛나는 단어가 있다면 그건 바로 ‘의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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