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은의 힐링에세이] 가득이심리상담센터 대표

엄마가 청각을 잃기 전까지 그녀는 엄마에 대해 특별히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녀의 엄마는 뇌종양이 있어 뇌수술을 여러 차례 받았다. 후유증으로 청각을 잃었다. 청각을 잃는다는 것은 가족을 모두 가슴 아프게 하는 일이다. 밝고 명랑하던 가족의 분위기는 지하세계 같은 암울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가족들의 말수는 줄어들었고, 웃음소리도 잦아들었다. 그녀의 엄마는 이유 없이 짜증을 심하게 내기도 했다. 일거수일투족이 불평불만이었다. 그러는 중에도 그녀에게 변화가 있었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하던 그녀는 결혼을 하여 대전으로 오게 되었다. 그녀의 가족들은 어머니께서 청각을 잃었을 당시와는 다르게 평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단 한 사람, 그녀 엄마의 심리 변화는 누구도 어찌하질 못하고 있었다. 아빠만이 유일한 친구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막내야. 어머니께서 수면제를 많이 잡수셨어. 위급해. 얼른 병원으로 와라.”
“엄마가? 얼마나 위급한데?”
그녀는 오빠의 다급한 전화 한통을 받고 다리가 후들거리고 마음이 떨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떤 정신으로 병원까지 왔는지 가물가물하다. 병원에 도착한 그녀는 막상 엄마를 본 순간, 너무 낯설었다. 그녀를 뺀 가족들은 엄마와 눈도 마주치고, 손도 만져주고 말도 걸고 있는데, 그녀는 가까이도 가 볼 수 없었고, 손조차도 잡을 수 없었다. 혼자만 동떨어진 세계에 있는 것처럼 멍하게 서 있었다. 남편조차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이 왜 그랬는지 몰랐다.

그녀는 숨겨놓았던 엄마에 대한 분노가 터져 나왔다. 용돈이 필요하다고 하시면 오십 만원, 백만 원, 삼백만 원 등 이유도 묻지 않고 챙겨드렸다. 반찬 안 사먹으며 아이들 옷도 안 사 입히며 친정아버지 모르게 남편 모르게 여러 번 드린 그 많은 용돈으로 노름을 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려서까지 노름을 하여 빚을 지게 되었다. 빚이 많아진 어머니는 죽어야겠다고 했고 결국 일을 낸 것이다. ‘동네의 10원짜리 화투놀이’가 어리숙해 보였던 엄마에겐 그들의 밥이었던 것이었다.

청각을 잃은 뒤로 나름대로의 좌절감을 노름으로 풀어갔다는 생각에 측은함이 있었다. 그렇지만 철없이 일을 저지른 엄마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화가 치밀어 엄마 가까이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고생하시는 친정 아빠를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인 모습에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그녀 엄마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런데, 그녀는 엄마를 이해하는 게 아직도 준비가 덜 되어 있나보다, 라고 생각하면 자신에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가 고등학교 때부터 뇌종양 수술이며, 큰 수술만 해도 세 차례를 했었고, 잔병치레로 병원을 내 집 드나들 듯이 수차례 입 퇴원을 반복하였다. 가장 가슴에 남는 것은 소풍 갈 때 흔한 김밥도 못 가져가 친구의 밥을 얻어먹을 때는 ‘엄마의 부재’가 참 슬펐다. 하굣길에 투정하는 엄마의 손을 잡고 걸음마를 해 주고 있던 아빠의 모습을 보며 고마움보다 현실에 불만 불평하는 엄마가 한없이 미웠다.

어린이집을 하며 평가인증 준비로 몇 달 밤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어느 날, 갑자기 앞이 흐리고 눈앞이 보이지가 않았다. 눈을 비비고 세수를 해봐도 맑아지지가 않았다. 두려웠다. 남편이 힘이 되어 서울로 병원을 다녀왔는데, 실명할 수도 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흔한 질병이 아니라서 원인을 찾을 수가 없으며 눈에 새로 온 혈관이 자라나서 당장 치료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치료법은 눈에 주사를 매달 맞는 것 외에는 없었다. 그 주사는 보험이 되지 않아 한 번 맞을 때 120만원이었다. 또한 원인을 알 수 없으니, 주사 외엔 치료가 없었다. 진단을 받고 난 후 남편과 며칠을 울었다. 아이들이 2살, 3살이었다. 왼쪽 눈까지 전이가 되면 바로 실명할 것이라고 한다.

그녀가 가장 걱정된 것은 아직 어린 아이들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아이들, 그 어린 것들을 볼 수 없다니 앞이 막막하기만 했었다. 그러나 그 어린 것들을 놔두고 나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 후 병원을 다니면서 한 달에 한 번씩 검진을 받았다. 지금은 넉 달에 한 번씩 병원을 찾아가고 있다. 일중독처럼 일을 했고, 원장으로서 막중한 책임과 스트레스로 그녀는 심장질환을 함께 지니고 있다. 그 때 그녀는 엄마가 떠올랐다. 아버지께 짜증부리고 노름을 하고 자살을 시도하고…. 이런 나도 있는데….

그녀는 엄마를 생각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녀는 엄마께 전화를 걸었다.
그녀와 친정엄마의 전화 통화는 남다르다.
“막내야. 밥 먹었니? 잘 지내고?”
“안서방도 잘 있고? 애들도 아픈데 없니?”
“상담실엔 손님 많고? 하는 일 잘 되고? 운전 조심해서 다녀라.”
“그래. 잘 지내고, 오기 전에 전화하면 좋아하는 찰밥 해 놓을게. 아참, 눈은 괜찮아?”
“잠깐 기다려. 아빠 바꿔줄게”

장애 중에 듣지 못하는 장애가 가장 힘들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녀는 엄마의 모습을 대하고는 몸짓, 손짓, 표정 등 비언어적인 것으로 소통을 할 수 있지만 전화를 받을 때는 아무 말도 못하고 듣고만 있어야 한다.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지 못하여 항상 마음이 아프다. 시력이 불안정한 이후로는 더욱 가슴이 아프다.

그녀는 혼자서 광주에 있는 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갈 때마다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 집에 가서 엄마를 보면 굳게 흐르는 침묵, 그날은 이유 없이 걸음이 가벼웠다.

친정에 도착한 그녀는 말없이 엄마 손을 잡았다. 실명할 수 있는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엄마의 손도 그녀를 꼭 잡는다. 엄마가 울먹이며
‘고맙다, 막내야. 고맙다, 막내야.’를 반복하신다. 그녀는 목이 메어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미웠던 엄마는 이젠 그 곳에 없다. 그녀는 안쓰럽게 엄마만 바라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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