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진의 행복한 인성이야기] 동화작가 | 대전시낭송인협회회장

집안을 정리하다가 오래 전부터 모아놓은 낡은 글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그 안에 30여 년 전 ‘사랑하는 우리 딸에게’로 시작되는 낯익은 필체가 눈에 띠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에 가기 어렵다고 생각한 나는 아버지께 내 결심이 아닌 ‘결정’을 통보했다.
“아버지, 저 대학교 안가고 학원을 다녀서 자격증 따고 취직 할래요.”

아버지는 그 당시 유망하다는 텔렉스 학원으로 정해 주셨고 나는 서울 이모님 댁으로 이사를 했다.
버스 터미널까지 따라오시던 어머니는 멀리 떠나보내는 딸이 안쓰러워 계속 훌쩍거리셨고, 아버지는 말없이 서울까지 데려다 주셨다.

대망의 꿈을 안고 학원에 간 첫날, 나는 타자를 치는 속도에서부터 기가 죽었다. 같은 날 등록한 또래에 비해 터무니없이 더듬거리고 있었다. 종이에 그려놓고 연습을 해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인문계 공부만 하던 나와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들의 속도와 비교할 수도 없었다. 하늘을 훨훨 나는 새와 아직 둥지 속에서 꿈틀거리는 아기 새는 비교 대상이 되지 않았다. 이론 시험은 한 번에 합격했으나 실기는 자신이 없어서 끝까지 해야 하는 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때쯤 고향 친구들이 대학 원서를 쓰기 시작했고 하나 둘 합격 소식이 전해졌다. 마음이 여러 겹으로 무거웠다. 학원 포기 결정은 대학을 안가고 자격증 취득 후 취직하겠다고 결심했을 때처럼 빨랐다.
“아버지, 아무래도 대학교를 다녀야겠어요.”

대학에 입학하고 이모 댁에서 가까운 곳에 자취방을 구했다. 이모님 댁이 불편하다고 하니  또 바로 방을 구해 주신 것이다. 한두 달 사이에 일어난 일, 딸이 결정한 일에 어머니, 아버지는 아무말씀 없이 온전히 지지해주셨다.

낯선 서울 생활 독립된 공간, 나의 자취방은 작은 아파트 방 한 칸에서 시작되었다. 언제나 묵묵히 내 의견을 다 들어주셨던 아버지, 나를 믿어주셨던 어머니. 생각해보니 부모님께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 번도 막은 일이 없으셨다. 내가 어릴 적부터 의견을 존중해 주셨다. 

대여섯 살 때 나는 큰어머니 큰아버지를 따라 당진 집에서 멀리 떨어진 강화도에 가서 살게 되었다. 그때까지 자식이 없던 두 분께서는 유독 나를 예뻐 하셨고 나도 잘 따르며 엄마, 아빠라고 불렀다. 큰아버지, 큰어머니께서 “종진아, 우리랑 강화도에 가서 살래?”라는 제안을 하셨고, 나는 해맑게 따라가겠다고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한편으로는 자식 없는 큰어머니 큰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셨고 또 그 때부터 아이일지라도 자식의 뜻을 존중해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화도로 떠난 날 밤 아버지의 베개는 목화솜 속까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고 어머니께서 회고하신다. 그 때 20대 후반의 어머니, 아버지는 어린 장녀를 멀리 보내며 마음이 어떠했을지 지천명이 된 지금은 짐작이 된다.

독립생활을 시작했을 무렵 아버지께 편지 한통을 받았다. ‘사랑하는 우리 딸에게’라는 낯익은 글씨체는 딸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옆에서 편지의 내용을 추가하고 계실 어머니의 모습까지 투영되니 내용 전부가 온전히 ‘사랑하는 우리 딸’이었다.

한 장의 편지에는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항상 조심해라, 너를 믿는다, 사랑한다.’ 라는 내용으로 꽉 차 있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감동으로 마음을 적신 첫 편지와 다르게 그 다음 편지부터 철없던 딸은 우체국의 소액환부터 챙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부모님께 보내는 편지는 자주 썼다. 전화도 없던 시절, 부모님과의 유일한 소통과 공감은 편지였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번 씩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근로 장학금을 받으며 칠판을 닦고 교실을 청소하며 옷 한두 벌로 빨아 입으며 견뎠다. 라면 한 봉지도 아까워 집에서 가져온 쌀로만 밥을 해 먹으며, MT도 졸업여행도 한 번 가지 않았다. 충청도 억양의 나는 서울 아이들의 언어와 생활 모습과는 너무나 달라 촌스러웠다. 슈퍼마켓 빵도 못 사먹는 나에게 제과점 빵은 낯설었고, 브랜드 가방이며 옷들은 내가 사 입는 시장의 옷들과는 몇 십 배 비싼 것으로 나와는 먼 세상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환경의 비교로 내 자존감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아버지께서 쓰시고, 어머니께서 거들어 보내주신 사랑의 마음이 충분히 전해진 덕분이다. 

지금도 전화를 하면 다정한 목소리로 “우리 딸, 오랜만이네,” “우리 딸, 목소리 잊어버리겠다.” “우리 딸, 바쁜데 전화 안 해도 괜찮아.”

반가움과 서운함, 염려로 시작되지만 모든 호칭은 ‘우리 딸’이다. 그 우리 딸 이라는 말 안에는 사랑과 믿음이 꽉 차 있는 것을 알기에 마음 든든하다.

내 카카오톡의 대문 글은 ‘부모님께 매일 전화하기’이다. 두 분께서도 알고 계신다. 죄송하게도 전화를 못하는 날이 많다. 전화를 못하는 날은 ‘누가 걸면 어떠냐, 목소리 들으면 되지.’하며 먼저 전화를 걸어오신다. 가끔은 일흔 여섯인 두 분께서 카톡을 보내오신다. 고향집 주변의 사진도 함께 담아서 딸의 ‘부모님께 매일 전화하기’ 결심이 빗나가지 않도록 도와주신다. 쉰이 넘은 딸에게 ‘우리 딸, 잘 있었어?’ 로 시작되는 전화와 카톡 편지는 대학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연세와는 관계없이 스마트폰을 잘하시는 아버지, 자식들을 카카오스토리 관심 친구로 맺어 놓고 일상을 살피신다. sns글을 읽고 전화하셔서 응원도 잊지 않으신다.

편지쓰기를 좋아하게 된 것은 그때부터이다. 교수님께 쓴 편지는 취직으로 연결되었고, 연애편지는 결혼으로 직결되었고 결혼 후에는 시를 쓰고 동화를 쓰고 시낭송을 할 수 있는 문화적 터전이 되었다. 부모님의 좋은 영향력으로 동화작가로 등단을 했고 공저로 ‘당신의 지문’ 책 한권을 썼으며 연작으로 ‘당신의 손결’ ‘당신의 뜻결’도 쓸 것이다. 지금은 인공지능 시대에 꼭 필요한 부모님의 역할인 ‘행복한 어른으로 키우고 싶은 부모를 위한 가이드’라는 내용으로 인성에 관한 책을 준비하고 있다.

나의 부모님께 배운 것을 토대로 젊은 부모들에게 본이 되는 글로 접근하고 있다. 가슴 뛰는 것은 이 책의 부제가 ‘부모님께 바치는 책’이라는 것이다. 책을 받고 기뻐하실 부모님을 생각하면 책이 잘 써진다. 그리고 지금까지 모아진 작품으로 동화집 한권과 시집 한 권도 출간할 계획이다.

요즘은 손 편지를 쓰는 경우는 흔치 않다. E-메일, 문자, 메신저, 카카오톡 등으로 안부를 묻는 편한 세상이다. 끊임없는 사랑의 언어로 버팀목이 되어주시는 부모님께 감사한다. 어떤 방법으로든 쉬지 않고 부모님께 해야 할 말이 있다. ‘아버지, 어머니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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