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라 소렌토로’와 ‘대전부르스’ 노래비
‘돌아오라 소렌토로’와 ‘대전부르스’ 노래비
  • 권오덕
  • 승인 2016.05.02 17:4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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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덕 문화칼럼] 대전 유일의 노래비, 대전시·철도 당국 협의로 재건립을

소렌토 역 앞에 작사자 쿠르티스 흉상, 80년 만에 건립
대전노래비 작곡 40년 후 건립, 17년 후 민원으로 철거
노숙자쉼터 전락, 균열로 침하현상, 쓰레기범벅 관리부실
대전부르스는 철도와 교통의 요지 대전을 상징하는 노래

세계적인 민요의 고장은 이탈리아의 나폴리다. 지금은 시들해졌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나폴리민요제나 산레모가요제는 세계적인 관심을 끈 축제였다. 오 솔레 미오나 산타루치아, 푸니쿨리 푸니쿨라 등은 대표적인 나폴리민요로 이 축제에서 태어난 곡들이다.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나폴리타나는 누가 뭐래도 ‘돌아오라 소렌토로’일 것이다. 웬만한 테너치고 이 노래를 부르지 않은 가수는 없다.

10년 전 타계한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물론 그와 함께 스리테너로 불리던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를 비롯 왕년의 명 테너 스테파노, 질리, 카루소, 모나코, 코렐리, 탈리아비니 등도 자주 이 노래를 불렀다. 나폴리민요는 나폴리말로 불러야 제 맛이 난다. 소렌토를 나폴리어인 수리엔토라 부르는 건 멋져 보인다. 나폴리민요는 나폴리출신 작곡가가 많고, 덴자, 카푸아, 쿠르티스, 카르딜로가 대표적이다.

‘돌아오라 소렌토로’의 소렌토는 인구 2만의 소도시로 나폴리만, 소렌토반도의 서쪽 끝자락에 있다. 해안을 따라가면 포지타노·아말피 같은 작은 항구도시들이 이어진다. 나폴리에서 베수비오 순환전철을 타고 나폴리만의 해안선을 따라 약 40분 간 달리면 소렌토에 이른다. 종점이 가까워 오면서 가파른 절벽이 바다에 꽂히듯이 절경을 접하는데, 레몬과 오렌지향기가 바람을 타고 나그네의 코를 간질인다.

나는 지난해 9월 그동안 벼르던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관광명소 소렌토와 카프리 섬을 다녀왔다. 나폴리와 폼페이를 거쳐 순환열차로 소렌토에서 내려 점심식사 후 배를 타고 카프리로 갔다. 종착역 소렌토에 내리자 ‘돌아오라 소렌토로’ 노래비가 우리를 반겼다. 소렌토는 지난 89년 이후 꼭 26년 만의 방문이어서 감개가 무량했다. 당시에는 버스로 이동해 가파른 절벽만 감상하고 소렌토노래비는 못 봤다.

“아름다운 저 바다와 그리운 그 빛난 햇빛/내 맘 속에 잠시라도 떠날 때가 없도다/향기로운 꽃 만발한 아름다운 동산에서/내게 준 그 귀한 언약 어이하여 잊을까/멀리 떠나간 벗이여 나는 홀로 사모하여/잊지 못할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노라/돌아오라 이곳을 잊지 말고/돌아오라 소렌토로 돌아오라” 돌아오라 소렌토로의 노래 가사다. 이 노래비 맞은편에는 작사자 잠 바티스타 데 쿠르티스의 흉상이 있다.

쿠르티스의 흉상 아래에는 소렌토시가 1982년 ‘돌아오라 소렌토로’ 발표 80주년을 기념하여 그에게 헌정한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열차에서 내리는 관광객들은 이 노래비를 보려고 몰려든다. 그런데 정작 이 곡의 작사자 잠 바티스타의 동생인 작곡자 에르네스토의 기념비는 없어 궁금증을 자아낸다. 다만 나폴리소재 산타마리아 안테 세쿨라 가의 두 형제 생가에 있는 기념관은 여행객들의 발길을 잡는다.

이 노래에 얽힌 사연은 재미있다. 소렌토인근 해변 고급호텔 트라몬타노에는 19C말 많은 문인들이 묵으며 창작을 불태웠다. 괴테를 비롯 바이런, 셸리, 스콧, 키츠, 롱펠로우, 입센 등이 그들이다. 지난 1902년 여름 이탈리아 총리가 가뭄현장시찰을 위해 이 호텔에 묵는다. 트라몬타노 호텔사장은 지역숙원사업인 우체국설립을 청원하고 약속을 받아낸다. 그리고 이를 잊지 못하도록 노래 만들 생각을 한다.

이 호텔서 일하던 쿠르티스 형제에게 노래를 작사 작곡케 했으니 이 곡이 바로 ‘돌아오라 소렌토로’이다. 소렌토의 아름다움을 찬양한 이 노래는 나폴리민요제인 피에디그로타의 가요제에 출전해 입상하면서 유명해진다. 이런 연유로 작곡된 민요지만 그 후 이 곡은 떠나는 연인에게, 배타고 신대륙으로 이민을 떠나는 친지들에게 ‘잊지 못할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돌아오라’는 의미로 많이 불리어져 왔다.

‘돌아오라 소렌토로’ 노래비를 보면서 필자는 대전역광장의 북편에 세워진 ‘대전부르스’노래비를 생각한다. 일명 ‘대전 발 영 시 오십 분’이라는 바로 그 노래비다. 1959년 최치수 작사, 김부해 작곡으로 안정애가 불러 크게 히트했다. 이 노래비는 1999년 9월18일 철도창설 100주년과 작곡 40년을 맞아 우송대 협찬으로 건립됐다. 대전 부르스 가사와 ‘대전사랑 추억의 노래비’ 비문이 앞뒤로 새겨 있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떠나가는 새벽열차 대전 발 영 시 오십분/세상은 잠이 들어 고요한 이 밤/나만이 소리치며 울 줄이야/아 붙잡아도 뿌리치는 목포행 완행열차//기적소리 슬피 우는 눈물의 플레트홈/무정하게 떠나가는 대전 발 영 시 오십 분/영원히 변치 말자 맹세했건만/눈물로 헤어지는 쓰라린 심정/아 보슬비에 젖어가는 목포행 완행열차” 헤어지고 떠나야했던 애절함이 배인 가사다.

대전역을 배경으로 이별의 아픔을 그린 끈적끈적한 블루스 리듬과 애절한 가락은 헤어지는 사람들의 비통한 심정을 꾸밈없이 담아냈다. 오후 8시45분 서울역을 출발해 0시 40분에 대전에 도착 후 10분 쉰 다음 새벽 6시 종착역인 목포에 도착하는 완행열차는 7-80대의 아련한 추억을 자극한다. 알려진 대로 대전은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됐고, 1912년 호남선이 개통돼 도시가 급속도로 발전한 교통의 요지다.

대전에 10분 간 정차할 때 서서 먹는 우동은 대전역의 별미였다. 이 곡의 작사자 최치수는 레코드사직원으로 어느 날 목포로 출장 가는 중 한 젊은 연인의 이별장면을 목격하고 대전역에서 내려 인근 여관에 투숙해 가사를 써내려 간다. 이튿날 서울로 올라와 작곡가 김부해에게 이 곡을 맡겨 3시간 만에 탄생된 곡이 대전부르스다. 당시 이 노래는 전국적으로 엄청나게 팔려 레코드를 계속 찍어내야 했다.

17년 간 대전역을 통해 외지로 오가던 여객들에 아련한 추억을 안겨줬던 이 노래비가 소리 소문 없이 지난 4월 어느 날 철거됐다. 건립주체인 우송대학 측이 치운 것으로 보인다. 왜 그랬을까? 각종 민원 때문이란다. 그 이유를 들어보면 어이가 없다. 철거이유는 크게 나누어 세 가지다.

첫째는 관리부실. 건립한지 20년 가까이 되면서 균열과 침하현상으로 기울어지는 등 자칫 사고위험까지 처해 있었다. 

둘째는 이곳이 노숙자의 쉼터(?)가 되어 쓰레기가 넘쳐나고 대낮부터 주객들의 싸움터가 되는 등 애물단지화해 제 구실이 어렵게 됐다는 점이다. 자칫 깨끗한 대전 이미지를 훼손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가수이름을 놓고 10여 년 째 가수 안정애와 추진위원회 측이 대립해 왔다. 처음 건립할 때 추진위측은 당연히 작사자, 작곡가 다음에 노래를 부른 안정애 씨를 써 넣으려했으나 반대에 부딪쳤다.

다른 사람 아닌 안 씨가 반대했다. 발표 20여년 뒤에 부른 후배 조용필 이름을 넣어 달라고 했다. 추진위측이 거절하자 안 씨는 “그렇다면 내 이름을 빼 달라”고 해 미완성 노래비가 돼 버렸다. 안 씨는 “대전부르스가 이렇게 유명해진 것은 조용필이 다시 불러 크게 히트한 공이 크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추진위 측은 그렇다면 최근 리바이벌해 히트시킨 장사익도 포함시켜야 할 것이라며 일축했다.

대전부르스는 비록 가수 이름이 빠진 미완성 노래비이지만 엄청난 크기(20평방M)의 검은 돌에 크게 새겨진 비문은 그동안 대전역을 오가는 외지인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었다. 이런 노래비가 사라져 버려 안타깝기 그지없다. 건립기증자인 우송대와 철도당국, 대전시는 지혜를 짜내 건립 장소를 다시 물색해 건립해야 한다. 또 최초가수 안정애 씨를 설득, 나중에 부른 가수는 넣지 않도록 하는 게 옳다.

한때 전국은 노래비건립이 유행처럼 번져 도시, 시골 할 것 없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전국에서 노래비가 가장 많은 곳은 역시 서울과 부산이다. 부산만 해도 현인노래비, 동백아가씨, 돌아와요 부산항에, 부산갈매기 등등 상당히 많다. 가수 개인으로는 배호 노래비가 무려 5개로 가장 많다, 돌아가는 삼각지, 두메산골, 마지막 잎새, 비 내리는 명동거리, 파도 등 서울과 전국 곳곳에 세워져 전국구이다. 

그런데 처음 부른 노래를 후에 다른 가수가 다시 불러 히트했다 해서 두·세 명의 가수 명을 노래비에 새긴 곳은 전국 어디에도 없다. 대전부르스는 대전 유일의 노래비다. 대전을 상징하는 노래로 이보다 더 뛰어난 노래가 있을까? 하나밖에 없는 노래비를 관리 못한 시 당국과 철도청은 책임이 크다. 관계 당국은 안 씨를 설득하여 가수이름을 넣고 적절한 장소를 선정해 노래비를 다시 세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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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다 2020-05-21 17:47:29
가수이름은 안정애씨를 넣고 노래비 내용속에 안정애씨 의견을 담아 "20년후 국민가수 조용필이 불러 크게 히트했다" 라고 넣으면 되겠네요..그당시 추진위측도 유연하지 못했네요..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사실과 사연을 기반으로 한건데..ㅉ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