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훈의 공감소통]

아이고, 아까운 내 돈. 오랫동안 사용했던 전기밥솥이 말썽을 부리기에 새것을 구입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날 저녁 TV 홈쇼핑에 전기밥솥이 나오기에 유심히 들여다  보고 있는데 쇼 호스트가 말했다.
“지금이 최저가 마지막 찬스입니다. 서두르십시오.”

최저가라고? 놓치면 손해라는 생각에 잽싸게 전화를 걸어 밥솥을 주문했고 며칠 뒤 우리 집으로 제품이 도착했다. 한데 인터넷 쇼핑에 그 전기밥솥이 보여 클릭해봤다. 이럴 수가. TV 홈쇼핑보다 4만원이나 싸다. 그럼 최저가가 아니었단 말인가? 아이고, 억울해라. 방송도 그랬다. 잘 할 거라 믿었던 후배가 모두를 실망 시켰다. 

‘옥희’는 예의 바른 후배였다. 그녀와 나는 대전MBC 라디오 ‘생방송 라디오 쇼’에서 2년 동안 더블 MC로 호흡을 맞추었는데 옥희는 예전의 후배들과 달랐다. 상냥했고 친절했으며 의리도 있었다. 밥을 먹을 때는 좋은 자리에 피디와 나를 먼저 앉혔고, 게스트가 먹을 것을 사오면 윗사람부터 챙겼다. 이러니 어찌 예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부 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걸 어찌 아부라 할 수 있겠는가. 그녀의 행동으로 피해를 입는 사람도 없었고, 능수능란한 그녀의 ‘아첨’이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결코 불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내가 알고 있는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어느 날 그녀가 말했다.  “라디오 명절 특집을 위해 대전 역에 시민인터뷰를 하러갔다가 30명 모두 거절당하고 왔어요.”

나도 초보 시절에는 그랬다. 방송이라는 말을 하면 폭탄 피하듯 모두들 내뺐다.
“대전 역 광장에서 인터뷰 했지?”
“선배님이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그러니까 안 되지. 내가 방법을 알려줄까?”
눈을 동그랗게 뜨는 그녀에게 내 노하우를 알려줬다.
“기차를 타야 가는 사람에게 부탁하면 해주겠냐? 그럴 때는 나오는 곳에서 기다렸다가 기차에서 사람들에게 부탁하면 돼.”

‘가르침’은 주는 사람보다 배우려는 사람의 의지가 더 중요하다 했던가. 그녀는 아주 똑똑했다. 스펀지가 물을 흡수 하듯 하나를 가르쳐 주면 두 개를 배웠다. 게다가 옥희는 말을 아주 잘했다. 어떤 상황이라도 귀에 쏙 쏙 들어올 정도로 조리 있게 설명했다. 윗사람들도 그녀의 이런 점을 인정해서 MC로 발탁한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평소에 그렇게 말을 잘하던 그녀는 ‘큐(온에어)’만 들어오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시나리오에 있는 준비된 말만 하려는 것 같았다. 더블 MC는 서로의 호흡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한사람이 말을 하기 시작하면 상대는 잠시 빠져 있다가 말이 끝나면 들어와야 한다. 그래야 부딪치지 않는다. 한데 그녀가 말을 하지 않으니 매번 나 혼자 말을 독점하는 상황이 연출 되었다. 모든 것을 만족시키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이렇게 불만족 시키기도 어려워 보였다. 그때마다 그녀를 어르고 달랬다.
“옥희야, 네가 말을 안 하니까 내가 힘들어지잖아. 아무 말이라도 좋으니까. ‘큐’가 들어오면 무조건 입을 열어. 알았지?”

하지만 매번 똑같았다. 이해가 안 갔다. 열심히 말을 해도 될까 말까 인데 이게 뭐란 말인가. ‘얘는 순전히 운이 좋아서 MC를 맡은 거구나.’ 그녀의 행동이 못마땅했던 나는 “쟤는 평소에는 말을 잘하는데 빨간불(큐)만 켜지면 입을 다문다.”고 사람들 앞에서 흉을 보고 다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녀가 달라진다. 특유의 발랄함이 방송으로 나타났던 거다. 그녀는 그동안 ‘생방송’이라는 부담감으로 잔뜩 주눅이 들어 있던 상태였는데, 나는 진득하게 기다려 주지 못하고 그녀를 욕 했던 거다.

나의 비난으로 인해 그녀가 받았을 상처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개나 고양이도 이쪽에서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 노골적으로 으르렁 대거나 도망쳐 버리는 법인데, 하물며 사람은 말해 뭣하겠는가. 미안한 마음에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봤다. 그동안 내가 미웠을 텐데 왜 항변하지 않았냐고. 옥희가 쑥스러운 듯 말했다.
“그럼, 서로 불편해지잖아요.”
순간 나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아, 스승은 도처에 있다더니 나보다 14살이나 어린 후배에게 내가 한수 배웠구나.

이를 계기로 나는 그녀를 더욱 예뻐했다. 옥희는 방송을 아주 잘했다. 누구나 하는 생각, 식상한 얘기, 상투적인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가령 ‘계절의 여왕 5월 입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입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키십시오.’ 등과 같은 말이다. 대신 기발하고 예리한 말로 사람들을 감탄 시켰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그녀의 한마디. 신청곡 코너에 전화 연결 된 택시기사가 이렇게 말했다.
“요새는 난폭운전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우리들은 ‘양보운전’이라는 스티커를 붙이고 다닙니다.”
이 말을 듣고 옥희가 되물었다.
“뒷 유리창에 붙이셨죠?”
“네. 맞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말이 걸작이다.
“그걸 앞 유리에다 붙이셔야 되는 거 아닌가요?”

내가 아는 대부분의 선배들은 말했다. 더블 MC는 기차 레일과 같아야 한다고. 이 말의 의미는 영원한 평행선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같은 방향으로 가야 된다는 뜻일 게다. 옥희는 이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작은 다툼이라도 생기면 먼저 사과했고 항상 나를 배려하려 노력했다. 내가 방송에서 간혹 썰렁한 농담을 해도 진정으로 웃어주고 격려해줬다.

사람들은 “노래 나갈 때 MC들은 뭘 하고 있냐?”고 묻는다. 우린 이렇게 말한다. “다음 순서를 준비한다.”고. 정말 그럴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옥희와 나는 주로 신변잡기에 대한 얘기를 했다. 어제 본 영화부터 시작해, 슬픔에 빠진 친구를 위로해 준 얘기, 현재의 고민, 자신의 철학, 좋아하는 이상형까지 털어 놓았다. 나는 그때마다 그녀의 솔직함에, 포용력에, 참을성에 감탄했다.
 옥희와 일하는 2년 동안 나는 그녀에게 많은 걸 배웠다. 내 기준으로 상대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 조급함은 편협한 생각을 만든다는 것, 부족한 점이 있어도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줘야 된다는 것, 옆 사람을 띄워줘야 나도 덩달아 뜰 수 있다는 것.

“요즘에는 집에서 저보고 시집가라고 난리예요. 하지만 마음에 드는 남자가 없는데 어쩌죠?”
“남자는 자기 말에 웃어주는 여자를 좋아하거든. 그러니까 좋은 남자가 나타나면 무조건 웃어.”
6~7년 전 이런 얘기를 해줬는데, 얼마 전 청주방송(CJB)에서 활동하는 옥희에게 전화가 왔다. 그녀는 올해 36살이다.
“선배님, 저 9월에 결혼 날짜 잡았어요.”
“축하한다. 어떤 사람이냐?”
“남자예요.”
이 무슨 썰렁한 농담이란 말인가.
“너, 여전하구나. 그럼 여자하고 결혼 하냐?”
“선배님은 여자랑 하셨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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