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훈의 공감소통] 방송인

인간은 ‘비교’를 통해 자신의 결핍을 확인한다. 그런데 비교할 때는 일정한 패턴이 있는데 한 가지는 좋은 것, 다른 한 가지는 나쁜 것을 선택하고, 두 개를 대비 시킨다. 예를 들면 “네 친구는 공부를 잘하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니?”라는 식이다.

우리 집 아래층에는 딸아이의 친구가 살고 있다. 그녀는 내 딸과 어릴 적부터 고1인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는데 얼굴이 예쁘고 공부도 잘한다. 이 아이 때문에 내 딸과 얼굴 붉히는 일이 생겼다. 아래층 사는 아이가 일요일에도 도서관에 간다는 말을 듣고 늦잠을 자고 있는 딸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아랫집 사는 네 친구는 아침 일찍 공부하러 가던데 너는 어째 그 모양이니. 아이구우, 속 터져.”
 순간 딸아이가 목소리를 높여 대든다.
“왜 비교를 하는 거예요. 저도 잘 하는 게 있는데 그걸 칭찬해주셔야죠. 아빠가 그랬잖아요. 사람들은 저마다 성향이 다르고 그걸 인정해줘야 한다고.”

그 순간 둔기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내가 했던 말 그대로다. 상대를 존중해 줘야 하며, 원하는 것이 있을 때는 정중하게 요청하고, 지위가 높은 사람 앞이라도 주눅 들지 않고 말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한데 정작 나는 그렇게 행동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부끄러웠다. 그런데 이 녀석이 언제 이렇게 컸지?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주눅 들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르치는 이유는 나는‘털어 놓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내 목소리는 의미가 없을 거야, 내가 요청해도 상대는 받아주지 않을 거야, 이런 생각으로 아예 말을 꺼내지 않았고 내 속에 있는 것을 꽁꽁 싸매고 있었다. 그때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상대방은 내 처지를 알아줄 거야’라고 믿었다. 하지만 눈빛만으로 내 사정을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말을 꺼내지 않았기에 누구도 내 속을 알지 못했다.

오래 전에 감정 기복이 무척 심한 사람과 일을 함께 한 적이 있다. 그는 내가 진행하던 프로그램의 담당 피디였는데 성격이 아주 고약했고 일방적인 사람이었다. 미세한 자극에도 짜증을 냈고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주변에 사람이 있건 없건 불같이 화를 냈다.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았다. 그때마다 마음약한 여자후배들은 울었고 누군가가 울어야만 그의 직성이 풀렸다.

그런데 그는 일정한 패턴이 있었는데 두 개의 극단을 왔다 갔다 하는 증상이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기분이 엄청 좋았다가(조증) 언제 그랬냐는 듯 갑자기 가라앉았다(우울증). 마치 두 얼굴을 가진 헐크 같았다. 생각해보라. 조금 전까지 불같이 화를 내던 사람이 갑자기 친절하게 대해주는 상황을. 우린 울 수도 없고, 손뼉을 치지도 못했다. 그런 그가 너무나 못마땅했지만 잘리지 않기 위해서 억지춘향으로 일했다. 대신 이를 악물고 견디며 서로를 다독였다.
“그도 사람인데 우리가 힘들다는 걸 알거야. 좀 더 참아보자.”

하지만 그의 만행은 프로그램이 폐지 될 때까지 계속되었고 그 동안 우린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돌이켜보니 우리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개선을 요구하지 않았던 거다. 차라리 과감하게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스승은 도처에 있다는 말처럼, 최근 나는 내 수업을 들은 학생에게 ‘털어놓는 것’의 소중함을 배웠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성적열람 기간에 한 남학생에게 이메일이 왔다.
“교수님이 주신 성적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다른 과목은 A학점 이상을 받았는데, 3학점짜리인 교수님 과목이 C학점이라서 타격이 큽니다. 제가 성적에 목을 매는 이유는 장학금 때문인데 C학점이 하나라도 있으면 혜택을 받을 수 없습니다. 다시 한 번 검토해 주셨으면 합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학생들을 만나는 것은 언제나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성적 평가만큼은 매번 곤욕을 치른다. 요새는 상대평가라서 A학점, B학점, C학점을 배분해야 하기에 나는 아예 첫 시간부터 학점부여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축구나 야구 경기에서 선발 출전 선수를 선택하는 것은 감독만의 고유권한이듯, 학점을 부여하는 것도 제 권한입니다. 그러니 성적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이 없도록 거듭 확인하겠습니다.”

하지만 이게 말로 한다고 될 일인가. A학점을 받는 학생은 침묵 하지만, C학점을 받은 학생은 목소리를 높인다. 이 학생도 그랬다. 결석이 없었으니 억울할 만도 했다. 그의 답안지를 꺼내 다시 읽어 봤다. 처음 읽을 때와 사뭇 느낌이 달랐다. 다양한 관점을 제시했고 설득력도 있었다. 나는 그의 이의신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성적을 고쳤다는 나쁜 선례를 남기기도 했지만 잘못된 것이라면 수정해 주는 것이 더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B학점으로 수정을 끝내고 그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귀하의 이의신청을 받고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답안지를 다시 검토 해보았습니다. 귀하의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었기에 받아들이기로 결정 했습니다. 세상은 끈질긴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할 말이 있음에도 속을 털어놓지 못하고 끙끙 앓는 것보다,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후 상대의 결정을 기다리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그런 끈기로 세상을 헤쳐 나가길 바랍니다. 귀하의 앞날에 건투를 빕니다.”

다음날 그 학생에게 답장이 왔다.
“제 이의 신청을 받아들여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원래 이런 이메일을 보내는 것 자체가 실례라고 생각했기에 지난 학기에는 이의 제기 없이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다른 과목 교수님이 제 PPT 과제를 못 보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때는 이미 성적 정정기간이 끝난 상태라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때처럼 또 아쉬운 마음을 남기지 않으려 이의를 제기한 겁니다. 제 의견을 존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누구든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지 않으면 모른다. 일단 말을 한 후 상대의 결정을 기다리는 것이 훨씬 현명한 일이다. 다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말을 할 때 즉흥적이거나 억지스런 주장이 아니어야 하고, 진정성과 예의 바른 자세로 요청해야 한다. 그래야 상대도 받아들인다. 

나도 ‘털어놓는 것’의 위력을 실감한 적이 있다. 관공서에서 주최하는 이벤트 행사를 따냈는데 후불 방식이었다. 행사에 들어가는 비용을 내 돈으로 충당한 후 그 금액을 나중에 청구하는 형식이었는데 목돈이 필요 했기에 고민을 했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까. 큰형에게 말해볼까. ‘얘기나 꺼내 보자’라는 심정으로 친한 선배를 찾아가 내 사정을 말했다. 세상에. 빌려주겠단다. 이자나 담보도 없이. 그때 또 한 번 깨달았다. 툭 까놓고 말을 하면 되는구나.

어찌 돈 뿐이겠는가. 직장생활도 비슷하다. 군말 없이 열심히 일하면 윗분들이 다 알아서 해줄 것 같지만 그건 나만의 착각이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남들도 다 하고 있고, 누군가는 나보다 더 잘할지도 모른다. 원하는 것을 얘기하지 못하면 시간이 지난 뒤 후회가 고드름처럼 맺힐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주장한다.

“최선을 다했다는 말에는 원하는 것을 제대로 요청했느냐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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