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훈의 소통공감] 방송인

“제 꿈은 가수예요.”
요새 아이들의 장래 희망이 ‘연예인’ 아니면 ‘공무원’이라더니, 고등학교 1학년인 내 딸의 꿈도 ‘가수’다. 연예인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청소년 시기에 누구나 가져 볼 수 있는 꿈이기에 처음에는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냥 바라 볼 수 없는 현상들이 차츰 생기기 시작했다.

부모로써 아이의 꿈을 응원해주어야 하는 것은 마땅하지만 내 경험상 이 땅에서 가수나 연예인이 되기 위해서는 평범한 부모 아래에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과 가수가 되기 위해선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하는데 내 딸에겐 그 소질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볼까. 아내나 나나 노래 부르기에 관한한 소질이 없다. 잘 부르지도 못할 뿐 아니라 노래 부르기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회식 때 노래방을 가는 것이 고역이다. 노래방 기계에 1시간을 의미하는 숫자인 ‘60’이 찍히는 순간 ‘앞으로 1시간 동안은 여기서 꼼짝을 못하겠구나.’라고 생각할 정도다. 내가 더 힘 빠지는 일은 그렇게 60분 동안 참았는데 노래방 주인이 서비스로 20분을 더 넣어주는 순간이다. 그럴 때면 어찌나 화가 나는지.

노래 부르기를 싫어하는 건 아내도 마찬가지다. 오죽하면 나와 20년 동안 살면서 노래방 한번 안 갔을까. 내가 아내의 노래를 들은 것도 결혼식 피로연 때 한번 들은 것이 전부다.

우리 집 DNA가 이런데도 내 딸은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학교축제 장기자랑에도 참가했고, 대전광역시 생활체육회 주최 청소년 댄스경연대회에 나가 금상도 받았다. 거기에서 자신감을 얻었는지 최근에는 대형기획사 오디션을 보러 서울까지 다녀왔다. 뿐만 아니라 “기회가 되면 TV오디션 프로그램에도 참가 하겠다”는 폭탄선언도 해놓았다. 그런 딸아이를 보니 나의 고민은 더 깊어진다. 산통 깨지는 말처럼 들리겠지만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것은 있다. 내가 겪은 일로 본다면 그 말이 맞다.

나는 고3 겨울방학부터 롤러스케이트장 DJ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졸업을 하지 않았으니 사회인이 아니었지만 빨리 돈을 벌고 싶었다. 그곳에서 1년쯤 일을 했을 때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말쑥한 양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롤러스케이트장으로 나를 보러 왔고 그가 건네준 명함에는 ‘극장식 스탠드바 연예인 실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목소리가 좋다는 소문 듣고 왔어요. 우리 업소에서 대대적으로 쇼를 할 예정인데 진행자를 찾고 있어요. 혹시 밤무대 MC를 해볼 의향 없으신가요?”
그의 말은 이랬다. 자신들의 업소가 재 오픈을 할 예정인데, 기존의 MC가 아닌 새로운 MC를 찾고 있다고. 그러던 중 내 소문을 듣고 찾아 왔다고. 그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은 좋았다. 나를 인정한다는 말이었으니까. 그런데 그가 제시한 조건은 더 좋았다. 한 달에 200만원을 주겠단다. 당시 롤러스케이트장 월급이 60만원이었으니 3개월 치가 넘었다. 그 때문에 내 마음이 요동쳤다. 하지만 새로운 환경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선뜻 내키지 않았다.

“제가 밤무대 경험이 없는데 괜찮을까요?”
그는 눈치가 아주 빠른 사람이었다. 내가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는데도 이미 승낙한 것이라 생각한 것 같았다.
“에이,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배우면 되는 거죠. 능력이 될 것 같으니까 제가 찾아왔잖아요. 걱정 하지 마시고 일단 와 보시죠.”
좋다. 까짓 거 한번 해보는 거다. 나는 노력파이기 때문에 자신 있다.

일주일 후, 롤러스케이트장 DJ를 그만두고 그가 일하는 스탠드 바로 출근했다. 그런데 마음과는 달리 현실의 벽은 높았다. 일을 하고 싶어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던 거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밤무대 MC가 되기 위해서는 이른바 ‘보조’ 생활을 하며 ‘사수’에게 배워야 했는데, 나는 그런 과정이 없었으니 챙겨주는 사람이 없었던 거다. 허나 그까짓 걸로 포기할 내가 아니었다. 그 정도로 단념 할 거였으면 애당초 시작 하지도 않았다. “따라하며 배운다.”는 말처럼 소형 녹음기를 들고 다니며 MC들의 멘트를 녹음했고 그걸 종이에 써서 달달 외웠다. 업소 사장은 노력하는 나를 예쁘게 봤고 그의 권유로 예상보다 일찍 데뷔한다.

이제 내 앞에는 환한 미래만 있을 거라 생각했다. 돈도 많이 벌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당시 밤무대 MC들에겐 10분가량의 자신만의 원맨쇼 무대가 있었는데 우리들 세계에서는 이를 ‘작품’이라고 불렀다.

각설이, 엿장수, 차력 쇼, 마술 쇼, 불 쇼, 아크로바틱 등. 업소에서는 그 ‘작품’의 수준으로 MC를 평가하고 보수를 결정했다. 나도 작품이 필요했다. 그때 내가 만든 작품이 ‘명동 부르스’다. 요지는 이렇다. 눈 내리는 겨울밤에 중년 남자가 타다 남은 연탄재에 언 몸을 녹이며 독백을 하는데, 방탕했던 과거를 반성하며 어머니를 목 놓아 부르는 감성을 자극하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의 키포인트는 마지막의 ‘명동 부르스’란 노래였다.

궂은 비 오는 명동의 거리/가로등 불빛 따라/쓸쓸히 걷는 심정/내 꿈은 사라지고/언제 까지나/언제 까지나/이 밤이 다 새도록/울면서 불러보는 명동의 브루스여.

업소 직원들을 모아놓고 ‘리허설’을 끝내자 악단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기는 괜찮았는데, 노래에서 감정이 살질 않네?”
그러자 옆에 있던 사장이 말을 받았다. 
“그럼 노래만 다시 불러봐라.”
노래를 다시 불렀다. 하지만 이번에도 악단장의 표정이 시큰둥했다. 그때 알았다. 나는 노래에 소질이 없다는 걸. 성인가요는 ‘꺾기’나 ‘바이브레이션’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나는 그게 없었던 거다. 게다가 이 기술들은 타고 나야 된다는 것을 이때 알았다.

이때부터 나는 부모님을 원망했다. 어찌 노래 뿐 이겠는가. 내가 갖지 못한 DNA는 많았다. 외모, 운동 신경, 공부 잘하는 머리 등. 온통 불만투성이였다. 남들이 갖고 있는 재능이 나는 왜 없는 걸까. 이런 열등감은 심각한 두려움으로 찾아 왔다. ‘아, 나는 평생을 남들의 그늘에서 들러리로 살아야하는 팔자인가 보구나.’

하지만 시간이 흐른 후 생각이 달라진다. 내가 느끼는 두려움은 무척 과장되었고, 나는 거기에 매몰 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거다. 생각이 바뀐 건 군 시절부터였다. 훈련소 입소 첫 날, 형편없는 배식이 나왔다. 퉁퉁 불어터진 어묵, 바짝 마른 김치, 멀건 된장국, 보리쌀이 잔뜩 들어간 짬밥까지. 동기들은 밥을 먹지 못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보다 더 한 것도 얼마든지 먹을 자신이 있었다. 내 모습을 본 동기들이 말했다.
“이게 입으로 들어 가냐. 너 참 대단하다.”

맞다. 나는 뭐든 잘 먹는다. 혹시 이것이 남들이 가지지 못한 나만의 좋은 유전자가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너는 뭐든 잘 먹는다”는 말은 그 후로도 자주 듣는다. 군복무를 마친 나는 낮에는 공장에 다니며 저녁에 야간대학에 다녔다. 당시 공장 구내식당에 근무하던 아주머니들은 밤 10시까지 공부하며 끼니를 굶는 내가 안쓰러웠던지 퇴근 전에 항상 저녁밥을 챙겨주셨다. 그 시간은 배식시간이 아니었기에 일종의 ‘도둑 밥’이었다. 사실 밥이라고 해봐야 점심 때 먹다 남은 찬밥과 반찬이 전부였지만 나는 무엇을 주든 가리지 않고 잘 먹었다. 내 모습을 지켜보던 아주머니들은 늘 이런 말을 했다.
“김 군은 뭘 줘도 맛있게 먹어. 그래서 주는 사람도 기분이 좋아. 아마 먹는 복 때문이라도 잘 살 거야.”

그 먹는 복 덕분이었을까. 나는 맛 집을 소개하는 TV 프로그램인 ‘해피 쿡 맛있는 대화’를 6년 동안 진행했다. 누군가는 맛있는 표정을 위해 연기까지 했다던데 나는 애쓸 필요가 없었다. 뭐든 맛있었으니까.

이게 시작이었다. 하나를 발견하니 다른 것도 보였다. 나는 잠을 잘 잔다. 그것도 어디서나, 마음만 먹으면 즉시 잔다. 게다가 한번 잠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을 잔다. 아는 사람에게 이런 얘길 했더니 엄청 부러워했다. 자신은 잠들기도 어렵지만 새벽에 한번 깨면 잠이 오지 않는다나. 그러니 잠을 잘 자는 것도 복이 아닐까.

또 목소리가 좋다는 말도 많이 들었고, 사지가 멀쩡하게 태어났으며,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이다. 이런 생각을 통해 깨달았다. 가지지 못한 DNA에 대한 불만이 진정한 내 자아를 만드는데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타고 나지 못한 유전자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자학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이젠 알았으니 이 두려움이 더 이상 나를 무너뜨리진 못할 거다.

나는 타고난 DNA를 떠올릴 때 눈에 보이는 것만 생각했고, 재능을 판단할 때 돈이 될 수 있는 것만 찾았으며, 소질을 탐색할 때 커다란 것만 떠올렸다. 사람이 천차만별이듯 타고 날수 있는 복도 여러 가지다. 요컨대 타고 난 것과 타고 나지 않은 것. 그 중에 어떤 것이 좋다, 나쁘다 할 순 없지만 있는 것에 행복해 할 것인지, 아니면 없는 것을 개발할지는 스스로의 몫이다. 마크 트웨인의 말을 인용해 볼까.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는 항상 자신이 가진 열다섯 가지 재능에 감지덕지하기보다, 자신이 갖지 않은 한 가지 재능에 뛰어나려고 노심초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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