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훈의 공감소통] 방송인

일요일 오후, 아파트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있었다. 후진기어를 넣고 주차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쿵 소리와 함께 진동이 느껴졌다. 아차, 싶어 차에서 내려 보니 옆 차 범퍼에 반 뼘 정도 스크래치가 나있었다. 아이고, 나는 매사 이렇게 조심성 없는 게 탈이다. 내 실수였으니 사과하고 책임을 지기 위해 상대편 차량 앞 유리에 적혀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주차를 하며 실수로 당신 차에 흠집을 냈으니 나와 보셨으면 좋겠다고.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40대 남자가 운동복 차림으로 나왔다. 그는 자신의 차량 앞 범퍼를 손으로 문질러 보고 주먹으로 탕탕 두드리면서 유심히 살펴봤다. 내 마음 같아서야 부분 도색을 하면 좋겠지만 차 주인이 생떼를 쓰면 변상해 줘야 할 거다. 30만 원 정도면 되려나? 앉아 있던 남자가 일어섰다.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한데 그의 입에선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 나왔다.

“콤 파운드로 닦아내면 되겠는데요?”
처음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내가 어리둥절해 하고 있자 그가 말을 이었다.
“그냥 가셔도 될 것 같아요. 제가 알아서 해결 할게요.”
그냥 가라니? 명색이 사고인데. 한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 남자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부탁이 있어요. 저도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거든요. 그걸 돌려줄 사람이 필요했어요. 그쪽도 다음에 봐주셔야 해요.”

이렇게 멋진 말까지. 와, 정말 폼 나는 사람이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몸을 돌려 집으로 들어갔고, 나는 그 남자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 봤다.

젊을 때는 몰랐지만 나이가 들수록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 ‘타인으로부터 받은 호의’다. 살다보니 알게 모르게 고마운 순간들이 찾아온다. 통 크게, 멋지게, 쿨 하게 실수를 용서해 주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또 어떤 이에게는 따뜻한 마음을 받기도 한다. 이때 상대가 대가를 바라지 않을수록 더 고맙고 수혜자가 어려운 처지일수록 감사함의 깊이가 남다르다.

4년 전 쯤 일이다. 좋아하던 축구를 하다 다리를 다쳤다. 넘어지는 순간 극심한 통증이 찾아왔고 퉁퉁 부어오른 발목을 부여잡고 병원으로 달려가 보니 복숭아 뼈가 조각나며 그 여파로 인대까지 끊어졌다. 8주 진단이 나왔다. 눈앞이 캄캄했다. 비정규직이었으니 먹고 살 일이 걱정된 것이다.

대부분의 이벤트 행사는 5월과 10월 두 달에 몰려 있는데, 하필 9월 중순에 다리를 다쳤으니 10월에 잡혀 있는 스케줄은 모두 취소해야만 했다. 내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온 아내도 답답했는지 한숨만 내쉬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담당자에게 빨리 연락을 해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수술을 끝내고 스케줄들을 취소하기 시작했다.
“제가 다리를 다쳤는데 당분간 꼼짝 못할 것 같아요. 이번 행사 사회자는 다른 분으로 바꿔주십시오.”

그렇게 모든 스케줄을 정리한 뒤 멍하니 누워 있던 그때, 체육단체 사무처장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그는 나보다 나이가 어렸지만 속이 깊은 사람이었다.
“다리를 다쳤다고 보고 받았어요.”
“죄송합니다. 당분간 병원신세를 져야 할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위로의 전화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언제까지 병원에 있어야 되나요?” “오늘 수술을 했으니까 2주 후에 깁스를 할 예정이고 며칠 경과를 본 후에 퇴원해도 된 답니다.”
“그럼 잘 됐네요. 우리 행사는 한 달 뒤에 있으니까, 선배님이 맡아 주십시오.”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의 속뜻을 헤아리지 못한 내가 물었다.
“한 달 뒤에는 깁스를 한 상태인데 어떻게 MC를 봐달란 말 입니까?”
내 말이 끝나자 그가 말했다.
“서 있기 어려우면 휠체어에 앉아서라도 해주시면 됩니다. 그럼 승낙 한 걸로 알고 전화 끊겠습니다.”

그렇게 전화는 끊어졌지만 나는 안다. 그가 일부러 나를 챙겨주려는 의도라는 걸. 사실 이번 행사는 MC만 계약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대와 음향까지 계약을 한 상태였기에 행사가 취소된다면 ‘계약해지’로 인한 타격이 올 것이 뻔했다. 그의 배려가 고맙긴 했지만 한편으론 걱정도 되었다. 나 때문에 그가 불이익을 받으면 안 될 텐데…….

한 달 후, 행사 날이 되었다. 목발을 짚은 나는 무대 위로 올랐고 주최 측은 나를 배려해 탁자까지 놔주었다. 그런데 이때 민망한 모습이 연출된다. 개회 선언을 한 후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할 차례였다. 나는 가슴에 손을 올리는 동작을 하기 위해 오른 손에 쥐고 있던 마이크를 왼손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지고 말았다. 왼손에 잡고 있던 목발을 놓은 것이 화근이었다.
“우당탕탕”

나는 무대 바닥에 나뒹굴었고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경건해야 할 순간에 이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키득키득 웃는 사람도 있었다. 너무나 창피해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넘어질 때의 충격으로 일어날 수가 없었다. 허리가 아팠고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허우적대며 일어나 목발을 짚었다. 그때였다.

“짝짝짝”
일어선 내 모습을 보고 박수를 쳐준 것이다. 나는 모른다. 그 박수가 힘을 내라는 박수였는지, 안쓰러움의 박수였는지. 하지만 그 박수로 인해 용기를 얻었고 나머지 순서까지 잘 마무리 할 수 있었다.

행사가 끝난 후 본부석에 있는 사무처장을 만났다. 내가 말했다.
“처장님 덕분에 큰 힘을 얻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다리를 다쳐서 다른 행사를 모두 취소 하셨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아팠어요. 그래서 우리 행사는 일부러 부탁을 드린 겁니다.”

내 예상이 맞았구나. 그런데 이어지는 그의 한마디가 나를 또 뭉클하게 한다.
“선배님이 그동안 우리 일을 잘 해주셨잖아요.”
그의 속뜻은 이런 것 같았다. 여러 번의 행사를 통해 나를 평가 했고 내가 어려울 때 도움을 주고 싶었다고. 누군가 그랬다. 앞모습은 의도적으로 만들고 꾸며진 경우가 많지만, 뒷모습은 무방비로 노출되는 것이기에 언제나 솔직하다고. 그의 말을 계기로 내 뒷모습을 돌아봤다.

사실 난 사업가적인 기질이 없다. 주판알을 튕길 정도의 잔머리도 부족하고, 금액을 세게 배팅 할 정도의 배짱도 없다. 견적서를 쓸 때는 겁이 나서 가격을 높이질 못했고, 행사 담당자가 부탁하면 돈을 받지 않고 해주는 일도 있었다. 그때마다 주위에서는 “너는 새 가슴이다.” “실속이 없다.” “그래 가지고 언제 돈 벌래.”라는 말을 했고, 그 소릴 들을 때마다 독해지려 마음먹었지만 그때뿐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 행동 덕에 내가 이런 기회를 얻은 것 같아 위안이 된다.

돌이켜보면 ‘나’ 라는 존재는 많은 사람들의 보살핌으로 여기까지 왔다. 돈이 필요하다 했을 때 이유를 묻지 않고 선뜻 빌려준 선배 P 형님, 목돈이 들어가는 허리디스크 치료를 무료로 해준 한의원 Y원장님, 내 자존심 다치지 않게 슬며시 도와주신 모임의 K회장님, 내가 어려웠을 때 내 아들의 수업료를 대신 내주겠다며 나를 울린 내 친구 T, 항상 마음을 터놓는 고등학교 동창 6명의 친구들, 언제나 든든한 7명의 대학 동기들, 변함없이 서로를 챙겨주는 10명의 양띠 모임 친구들.

이런 사람들이 곁에 있기에 나는 행복하다. 이외에도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사람들의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는 나. 나를 아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깨달을 때 우린 눈물 나게 고맙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것이 언젠가는 갚아야 하는 ‘고마움의 빚’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받은 만큼의 고마움을 다시 이분들께 되돌려 주는 것이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지만 그럴 확률은 높지 않을 거다.
 대신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이 내가 받은 고마움에 대한 예의이고, 인간관계의 선순환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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