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의 눈] 미리 준비한 대답이라니 더 두렵다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기자회견 대본이 ‘올해도’ 유출됐다. 2014년 <뉴스타파>가 사전질문지를 입수해 보도했고, 지난해에도 비슷한 유출논란이 불거졌다. 올해는 대통령 기자회견이 끝나기에 앞서 <미디어오늘>이 기자회견 대본을 사전 보도했다. 질문자의 순서, 질문 내용까지 거의 일치했다. 기자들은 짜인 각본대로 질문하고, 대통령은 미리 준비한 답안을 읽어 내려간 셈이다.

국민들은 이 같은 내용이 다소 충격적일지 모르겠지만, 언론인들은 다 알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대통령의 생중계 기자회견은 사전각본에 따라 진행된다. 대통령을 앞에 세워두고 기자들이 서로 질문하겠다고 아우성치는 모습, 동일한 질문을 반복해서 던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나.

질문자를 사전에 정하고, 질문의 대략적 내용을 공유하기위한 ‘사전조율’은 늘 존재했다. 필자가 청와대를 출입했던 노무현 대통령 집권기에도 비슷한 ‘사전조율’이 있었다. 지금처럼 완벽한 각본은 아니었지만.

필자는 대통령의 생중계 기자회견에 앞서 어느 정도의 사전조율은 필요하다고 본다. 대통령이 참모진보다 더 탁월한 메시지 전달능력을 가지고 있거나 임기응변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못해 국민들에게 실망감만 안겨줄 바에는 사전 문제유출 정도는 눈 감아 줄 용의가 있다.

사전조율을 ‘대국민 사기극’이라는 말로 폄훼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생각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국민 앞에 즉흥적으로 설명하는 게 더 위험하다고 바라본다. 참모들과 숙의할 시간이 필요하고, 정제된 언어로 국민 앞에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편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훨씬 유익하다고 판단한다.

사실, 대통령 기자회견에서 불거진 ‘사전각본 논란’은 그리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다. 대통령이 국민 앞에 어떤 메시지를 던졌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 그것은 대통령이 미리 준비한 대답이고, 참모들과 숙의한 내용이며, 대한민국 정부가 나아갈 방향이기 때문이다. 사전각본의 존재여부를 놓고 대통령과 들러리 언론을 조롱하는 것보다, 대통령이 국민에게 던진 메시지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파고드는 편이 옳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번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이 던진 메시지 중 ‘한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확고부동한(?) 의지’가 가장 큰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정연국 청와대 대변인이 다음 질문자에게 마이크를 넘기려 하자 대통령이 이를 제지하고 이야기를 꺼낼 만큼 각별한 관심을 드러낸 대목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배워야 하는데 (현 교과서가) 아이들에게 부끄러운 역사로 가르친다”고 말했다.

이미 근거가 없는 것으로 결론 난 친북교과서 논란에 다시 불을 붙이기도 했다. 대통령은 “(현 교과서가) 대한민국 정체성과 정통성을 폄하하고 북한정권을 은연중에 찬양하는 왜곡된 가치관을 심어준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국정화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게 대통령의 인식이다. 그것이 “이 정부의 사명”이라고도 했다.

대통령이 이렇듯 ‘강력한 어조’로 이야기하는데, 그 누가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까. 한국사 국정화 작업이 비밀리에, 그것도 매우 신속하게 진행되고 있는 이유를 드디어 직감하게 된다.

박근혜 대통령은 역사교과서 문제에 대해 발언하면서 “부끄러운 역사”란 말을 네 번 반복했다. ‘자랑스러운 역사’를 왜 ‘부끄러운 역사’로 기록하느냐는 항변이었다. 우리는 ‘이 항변’의 중심에 누가 존재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더 섬뜩하다.

대통령은 질문이 나올 것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 강력한 대국민 메시지를 준비했을 것이다. 그런데 눈치 없는 청와대 대변인이 어물쩍 넘어가려 했다. 그래서 대변인의 진행을 막고 작심한 발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역사에 대한 ‘항변’이었다. 왜 ‘그’를 부끄러운 사람으로 기억하느냐고. 이것이 이번 생중계 기자회견에서 필자가 발견한 대통령의 가장 강력한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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