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훈의 공감소통] 방송인

발표 수업 때의 일이다. 파워 포인트를 화면에 띄우자 사람들이 실실거리며 웃는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내게 후배가 스크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오타가 있다고 말해준다. 재빨리 확인해 보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지역 축제의 개년.’

‘념’이 ‘년’이 된 것이다. 피곤한 마음에 확인하지 않은 내 실수였다. 한데 놀랍다. 받침 하나로 인해 의미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니.

하긴 철지난 유머에 이런 것도 있다. 아내가 남편에게 “여보, 사랑해”라는 문자를 보내야 하는데, ‘랑’이 ‘망’으로 바뀌며 “여보, 사망해”라고 했단다.
또 있다. 글자 한자 잘못 띄어 쓰면 모든 게 달라진다. ‘서울시 장애인 모임’을 ‘서울시장 애인 모임’으로 쓴 사람도 있고, ‘서울시 체육회’를 ‘서울 시체 육회’로 쓴 사람도 있으며, ‘게임하는데 자꾸만 져요’를 ‘게임하는데 자꾸 만져요’로 써서 모두를 웃게 한 사람도 있단다. 아무튼 거듭 조심해야 하는 게 우리말이란 생각이 든다.

문득 생각나는 일이 있다. 함께 일하던 방송작가의 이야기인데 방송국 창사기념일에 맞춰 ‘라디오 생방송’을 준비하던 중에 일어난 해프닝이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방송원고가 진행자의 손에 넘겨졌는데 원고를 보고 있던 그가 갑자기 큰소리로 웃었다. 사람들은 오늘 원고에 재미있는 유머가 있나 보다, 라고 생각했었단다. 아니었다. 진행자가 그 원고를 들고 작가에게  “이 오프닝 한번 읽어보실래요? 아, 너무 웃긴다.” 라는 말을 했고 원고를 건네받은 작가도 그걸 보더니 박장대소를 하더란다.

알고 보니 오타가 하나 있었는데 작가는 ‘가지 많은 나무는 바람 잘 날 없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자식이 많은 부모는 항상 걱정이 많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중요한 글자에 오타가 나며 모두를 경악시켰단다. ‘가지 많은’에서 ‘가’자가 ‘자’로 바뀌며 ‘가지’가 ‘자지’가 됐단다. 그러니 웃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무튼 이 사건은 두고두고 회자되며 화제를 뿌렸었다.

말도 똑 같다. 한 글자 차이로 인해 누군가는 그걸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내가 그랬다.

라디오 ‘별밤’ 진행자로 일하던 10년 전의 일이다. 대전에 있는 한 대학교에서 ‘별이 빛나는 밤에’ 공개방송을 했는데 유명가수가 온다는 소식에 학교 운동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방송도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간혹 예기치 않은 사고가 발생하는 법인데 하필이면 사람이 많았던 그곳에서 터진다.

공개방송 중간 무렵 쯤 과부하로 인해 전기가 나가버렸다. 정전이 되었으니 모든 시스템이 작동이 되지 않아 사방이 어두웠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엇 때문에 전기가 나갔는지, 언제쯤 복구가 되는지 궁금했지만 누구도 그걸 속 시원히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고 무대 아래에선 푸념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야 방송관계자니까 기다릴 수 있다 해도 저 사람들은 얼마나 궁금해 하겠는가. 순간 나는 무슨 생각에선지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갔고 컴컴한 사방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여러분, 죄송합니다. 기술상의 문제가 발생해서 전기가 나갔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다시 큰 소리로 말했다.
“기술상의 문제가 발생해서 방송이 중단됐습니다. 다시 시작 할 예정이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사실 이 부분에서 나는 조금 우쭐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발적으로 했기 때문이다. 이런 게 임기웅변이란 생각에 어깨에 힘도 들어갔다. 한데 이 일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내가 무대에서 내려오자 기술국장이 대기실로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야, 너 이리 와 봐.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딱 그 격이다. 당황했던 나는 “왜 그러시는데요?”라고 물었고 기술국장은 화가 난 목소리로 말한다.
“무슨 말인 줄 몰라서 묻는 거야? 네가 조금 전에 말실수 했잖아.”
“제가요? 무슨 실수를 했다고 그러세요?”
“네가 기술상의 문제가 발생해서 이렇게 된 거라고 했지?”
“네, 그렇게 말했습니다.”

얼굴까지 빨개진 기술국장은 눈까지 부릅뜨며 말한다.
“이건 ‘기술’ 때문이 아니고 ‘기계’로 인해 생긴 거야. 기술상의 문제라고 하면 우리는 경위서를 써야 된단 말야.”

나는 그제야 기술국장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그건 오로지 단어의 차이였다. 기계(시스템) 때문이라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만, 기술 때문이라면 음향 엔지니어들은 문책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한 글자에 따라 누군가는 징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찌 글자와 단어뿐이랴. 지식도 마찬가지다. 검색만 하면 원하는 것을 얻는 시대이다 보니 인터넷에는 잘못된 정보가 난무한다. 방송도 그랬다. 얼마 전 끝난 야구 국가대항전인 ‘프리미어12’를 중계했던 방송사는 한국 팀 우승 장면에 난데없이 세상에 대한 불평을 담은 노래인 아바의 ‘더 위너 테이크스 잇 올 (The winner takes it all)’을 배경음악으로 내보내며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인간은 모르는 것도 잘 알고 있는 양 떠벌리길 좋아 한다. 하지만 A의 말을 들으면 B가 나쁜 사람이고, B의 말을 들으면 A가 죽일 놈이 되는 것처럼, 어떤 것에 단 하나의 원인만 존재하는 경우는 드물다. 진실이 왜곡 되지 않기 위해서는 심사숙고 하는 마음이 필요하고, 내가 내보낸 말과 글로 인해 누군가 상처 입지 않는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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