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훈의 공감소통] 방송인

심리학에는 ‘조명효과’라는 것이 있다. 자신이 다른 사람의 시선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필요 이상으로 타인을 의식하고 신경 쓰는 현상인데 이를 테면 이런 거다.

매일 화장을 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이 화장 때문에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피부에 생긴 트러블로 인해 당분간 화장을 삼가라는 의사의 말을 듣게 된다. 그녀에게 ‘민낯’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회사에 출근한 그녀는 사람들에게 화장하지 않은 모습을 들킬세라 고개를 숙인 채 일을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사람들은 화장하지 않은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던 거다. 그녀는 깨닫는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나는 남보다 조명효과가 심한 편이다. 은행에서 현금지급기를 사용할 때 뒷사람이 서있으면 마음이 조급해지고, 고속도로 통행료는 미리 준비하고, 야구장 매표소에서는 지갑부터 꺼내 드는 형국이다. 빨리 비켜주기 위해서다. 하지만 남을 의식 할 때 마다 정작 내 삶은 자유롭지 못했다. 현금지급기 사용은 급한 마음 때문에 오류를 범하기 일쑤였고, 달리는 차에서 톨게이트 요금을 준비했으니 안전하지 않았으며, 야구장 매표소에서는 직원에게 궁금한 걸 물어보지 못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새로운 일을 도전하려 할 때 실패하면 부끄럽고 창피하다는 생각에 망설이다 시기를 놓쳐 버렸고 아예 시작도 하지 못하고 포기한 경우도 많았다.

내가 이처럼 남을 의식하는 이유는 손가락질 받지 않기 위함이다. 사람들은 똑 같다. 욕먹고 살지 않으려 노력하고 그 때문에 타인을 의식하는 삶을 산다.

문득 생각나는 여자 후배가 있다. 대전 MBC ‘별이 빛나는 밤에’ 진행자 시절 더블MC로 함께 일했던 그녀는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성격으로 주위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여장부였다. 사교성도 어찌나 좋은지 낯선 사람이라도 금세 친해졌고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어느 날 우리는 충남 공주에 위치 한 대학교로 공개방송을 하러 간다. 학교에 도착한 우리는 본관 3층에 위치한 총장실로 인사를 하러 가는데 사건은 여기서 터졌다. 1층 현관에서 그녀가 발을 헛디디며 중심을 잃고 앞으로 꼬꾸라졌는데, 요상하게 개구리처럼 ‘큰 대’자 형태로 넘어졌다.

“우당탕탕”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잘 차려입은 아가씨가 벌렁 넘어졌으니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한 것은 당연한 일.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킥킥대며 웃었고 그녀는 아픔 때문인지 일어나질 못했다. 눈치 빠른 방송작가가 그녀를 부축하며 일으켜 줬다.
“언니 괜찮아요?”

그런데 일어선 그녀의 몰골이 가관이었다. 협찬 받은 의상은 더러워졌고, 손바닥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울기 시작했다. 작가가 부축해서 그녀를 화장실로 데리고 갔고 대충 씻고 나왔는데도 계속 울었다.

총장님께는 이 상태로 인사를 갈수 없었기에 담당 피디만 3층으로 올라갔고, 우리는 그녀를 부축해 출연자 대기실로 돌아왔다. 항상 밝은 얼굴이던 그녀가 울고 있었으니 내 마음도 불편했다. 웬만하면 울음을 그칠 법도 한데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기에 나도 모르게 잔소리가 나왔다.

“많이 아프냐? 그만 울고 방송 준비해야지.”
“선배님은 제가 아파서 우는 줄 아세요?”
“그럼 왜 우는데?”
그녀는 떨어지는 눈물을 휴지로 닦으며 이렇게 말했다.
“창피해서 우는 거예요. 거기 있던 사람들이 웃었잖아요. 이따 그 사람들도 공개방송에 올 거 아녀요.”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랬구나. 씩씩했던 너는 남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너도 그랬구나. 평소 여장부처럼 당당했던 그녀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던 거다. 그 창피함 때문이었지 그녀는 공개방송 중에 평소에 하지 않던 사소한 실수를 여러 번 저질렀다.

최근에 깨달은 것이 있다. 남을 의식하는 삶을 살수록 정작 내 삶은 소홀해진다는 것을. 그래서 지금 내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미움에 대한 오해’를 없애는 일이란 것도 알았다. 즉 미움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지만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도 없다는 뜻이다. 기부를 많이 하는 착한 연예인 일지라도 안티가 있는 것처럼 누군가는 나를 싫어하고 미워한다. 인정하기 싫지만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남의 장단에 맞춰 살면 정작 내 삶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는 왜 이처럼 타인의 눈치를 보며 쓸데없는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일까. 혹시 그에 대한 해답은 없는 걸까? 자료를 찾아보니 ‘지나친 자의식이 문제가 될 수 있지만 더 큰 문제는 자의식이 아예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남을 의식하는 것은 안 좋지만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 것이 더 큰 문제라는 뜻이다. ‘자존감’은 결국 나를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단 말인가.

지난 학기에 내 수업에 들어오던 여대생이 있었다. 그녀는 독특한 헤어스타일과 피어싱을 했고 튀는 옷차림으로 모두의 시선을 끌었는데 나는 그런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자신의 차림새가 너무 튄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녀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이상해요? 저는 제 모습이 자랑스러운데요?”
둔기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인생의 주도권을 자신에게 두고 사는 사람이었는데 나는 편견이란 색안경을 끼고 그녀를 봤던 거다. 누구도 자신의 기준과 다르다고 해서 상대방을 무시하는 권리 따윈 없는 법이거늘 나는 내 기준으로 상대를 봤던 거다.

나는 그녀를 통해 ‘자존감’을 알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김춘수 님의 《꽃》이라는 시처럼, 내가 있기에 그것이 의미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거다.

성공적인 삶을 산 사람이든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인생이든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아군이 있고 적군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삶이 자유로워진다.

살아있는 것은 좋은 것이며, 삶은 숨 쉬고 있는 동안만의 삶일 뿐이다. 한번 뿐인 내 인생을 좀 더 가치 있게 살고 싶다면 남들이 원하는 인생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면 어떨까. 내가 없는 천국은 의미가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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