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훈의 공감소통] 방송인

“안녕하세요.”
시청에 근무하는 공무원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평소 친분이 있는 사람이다.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시죠?”
한데 그의 다음 말이 나를 당황스럽게 한다.
“오늘 기사 내주신 것 잘 읽었습니다. 고마워서 전화 드렸습니다.”
내가 아니다. 기자에게 해야 할 전화를 나에게 한 것 같았다. 이름이 같아서 착각한 것이겠지. 내가 정중하게 말했다.
“죄송한데요. 전화가 잘못 걸렸습니다. 저는 이름만 같은 다른 사람입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마도 저장되어 있는 이름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겠지. 이윽고 그가 너스레를 떤다.
“아이쿠, 죄송합니다. 잘 지내시죠? 조만간 한번 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더니 마치 무언가 들킨 것처럼 후다닥 전화를 끊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닌데 뭐. 그러니 새삼 별스러운 일도 아니다.

이런 일이 생기는 건 순전히 같은 이름 때문이다. 재미있는 사실을 말해 줄까. 내 주위 사람들의 휴대전화에는 ‘김경훈’을 검색하면 똑 같은 이름이 3명이 뜬다. 나(방송인), 기자, 시의원이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이 세 명 외에도 이름이 같은 사람이 피부과 의사와 치과 의사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쯤이면 ‘동명이인’이 아니라 ‘동명오인’이라고 해야 될 것 같다.

이로 인해 웃지 못 할 일도 생기는데 엉뚱한 사람에게 전화하는 것은 흔한 일이고, 선물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기도 하는가 하면, 피부과 의사에게 가야 할 출연료가 내 통장에 잘못 입금된 경우도 있었으며(대전MBC), 대학총동문회에서는 ‘시의원 당선’ 축하 전화를 나에게 해프닝으로 끝난 적도 있었다. 문득 궁금해진다. 이런 일들이 나에게만 일어난 일이었을까? 비슷한 일들이 ‘동명오인’에게는 없었을까?

어쨌거나 우리(김경훈)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참 힘들겠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 거듭 확인해야 하니까 말이다.

잘못이나 실수는 안하는 게 좋지만 사람은 누구나 크든 작든 실수를 하며 살아간다. 인간이기 때문에 실수를 하고 또 보통의 실수는 애교로 봐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실수를 했을 때는 다음 상황이 중요하다. 변명이나 핑계를 대지 않고 즉각적인 사과가 나와야 한다. 잘못했다는데, 반성한다는데 어쩌겠는가. 내가 이런 얘길 꺼낸 이유는 나와 관련된 남세스러운 일화가 있기 때문이다.

오래 전 충남에 있는 어느 마을의 '면민 노래자랑' 행사 MC로 갔을 때의 일이다. 시골행사는 생각지 않은 해프닝들이 종종 발생하는데 그 날 역시 그랬다. 만취한 어르신이 노래를 부르던 초대가수의 마이크를 빼앗는 사태가 발생했고 이에 당황한 가수는 마이크를 돌려받기 위해 애원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우습던지.

준비된 경품도 도시와는 사뭇 다르다. 자전거, 세탁기, 청소기, TV 같은 것이 도시에 준비된 경품이라면, 시골행사에선 TV, 세탁기, 뿐만 아니라 과수원 사다리, 비료, 외발 리어카, 갈고리, 삽처럼 농사에 꼭 필요한 선물들도 마련되어 있다. 그로인해 사회자의 이런 멘트도 등장한다.
“앞에 앉아 있는 어르신이 박수를 열심히 쳐주셨으니까, 과수원 사다리하고 비료 한 포대를 드리겠습니다.”

어떤가. 사실감이 있지 않은가. 한데 나는 이날 그곳에서 모두를 경악시키는 대형 사고를 터뜨린다. 행사가 중반을 넘어서며 초대가수의 노래가 끝날 즈음이었다. 면사무소 직원이 나에게 급히 달려오더니 메모지를 건네줬다.
“쪽지에 적힌 이분이 오늘 참석한 내빈 중 한 분인데요. 일이 있어서 먼저 가셔야 한답니다. 이번순서에 노래를 시켜주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메모지를 들여다보니 거기에는 ‘장애자노인복지회장님’이라고 적혀 있었다. 무식한 사람이다. 공무원이 장애자는 잘못된 표현이란 걸 모른단 말인가? 알다시피 2000년 이후부터는 ‘장애자’를 ‘장애인’으로 고쳐 부르고 있는데, 만약 방송에서 ‘장애자’라는 단어가 나가면 진행자가 무식하다는 항의전화와 함께 인터넷 게시판이 단박에 뜨거워진다. 그러니 장애자라고 어찌 부를 수 있겠는가. 적절한 언어사용은 방송인의 당연한 사명이다.

“이번에는 장애인 노인복지회장님을 모셔서 노래한곡 청해 듣겠습니다.”
 한데 이상했다. 무대 아래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이 아닌가. 혹시 못 들었나 싶어 조금 더 큰소리로 말했다.
“장애인 노인복지회장님 무대 위로 올라와 주세요.”
그때였다.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벌떡 일어나 무대 앞까지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러더니 삿대질을 하며 다짜고짜 따지는 것이었다.

“이봐요. 도대체 뭔 행사를 이 따위로 하는 거예요?”
나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뜬금없이 화를 내는 그녀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왜 그러시는 거죠? 저는 사모님이 화내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정말 이유를 몰라요? 나 원 참, 미치겠네. 이봐요. 내 이름은 ‘장애자’인데 왜 ‘장애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다. 그녀는 이름이 장애자였다. 그것도 모르고 내가 자꾸 장애인 나오시라고 했으니 얼마나 화가 났겠는가. 내빈이었던 그녀가 언성을 높이자 현장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해졌다. 큰일 났구나.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하지? 방법은 하나뿐이다. 솔직하게 얘기하자. 일단 그녀에게 머리 숙였다.

“제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이름이 장애자일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사실 장애자는 틀린 표현이고 장애인이 맞는 말이라서 그렇게 부른 겁니다. 제 실수니까 노여움을 푸십시오.”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사람들이 깔깔깔 웃었다. 웃을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있었던 거다. 솔직한 사과 때문이었을까. 장애자 회장님도 밝아졌다. 그리곤 다시 축제분위기가 되었고 노래자랑이 이어졌다. 이때 내가 깨달은 사실이 있다. 실수를 했을 때 사과하는 방법이다. 상대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하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상대의 마음이 풀어진다.

하지만 다른 경우도 있다. 내 잘못으로 인해 생긴 실수라면 그 책임을 온당히 내가 짊어져야 하겠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인해 그 비난의 화살이 모두 나에게 돌아온다면 어떨까?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천만의 말씀. 말이 된다. 이런 경우는 사랑했던 여자가 엄마가 옛날에 낳은 딸이라는 막장 드라마 보다 더 현실적이다. 만약 이런 경우가 왔을 때 그 비난을 내가 받느냐, 아니면 나 때문이 아니라는 해명을 하며 빠져나가느냐는 스스로에게 달려있다. 이 경우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나쁘다고 말할 수도 없다. 내가 그랬다.

몇 년 전 체육가맹단체의 ‘연합 체육대회’ 이벤트행사를 우리 기획사가 맡았다. 행사 전 담당자를 만나 계약서를 쓰는데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이건 김 대표님도 알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조심스레 말을 꺼냅니다. 이 연합체육대회는 저희에게 아주 큰 행사입니다. 그런데 불미스럽게도 작년에는 전기 때문에 망신을 당했어요. 개회식을 하던 도중에 전기가 나갔고 그로인해 행사가 중단되며 20분 동안 아무것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올해는 다른 업체로 바꾼 겁니다. 이번에는 그런 일이 없도록 특별히 신경 써 주시기 바랍니다.”

아, 그랬었구나. 혀를 내두를 일이다. 전기용량이 초과되며 블랙아웃이 되었을 때 음향 엔지니어는 20분 동안 뭘 한 거지. 아마추어 같으니라고. 걱정 마세요. 우리는 프로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오버하면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차분한 목소리로 담당자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십시오. 저희는 그런 일이 없도록 철저히 준비 하겠습니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담당자가 두 번 세 번 당부를 한다.
‘어허, 걱정은 붙들어 매시라니까요.’

드디어 행사 날 아침. 담당자의 말 때문이었을까? 마음이 께름칙했던 나는 새벽 댓바람부터 나와서 전기 용량이 괜찮은지 음향 테스트를 했다. 우리가 사용할 전기는 행사장인 충남대학교 대운동장에 있는 ‘체력 단련실’에서 끌어 왔는데 출력을 최대로 높여도 특별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은 나는 음향을 담당하는 후배들에게 담당자의 말을 전하며 당부를 잊지 않았다. 그랬더니 이 친구들도 큰 소리를 친다.

“형, 오늘 따라 웬 잔소리예요. 우리 실력 알잖아요?”
그래, 너희들만 믿는다. 그동안 우리가 이런 행사를 한두 번 해봤니. 우리는 프로잖아. 그렇게 모든 준비는 완벽했다. 충남대학교 대운동장에는 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고, 9시30분부터 시작 될 개회식을 위해 선수들을 운동장 중앙에 불러 모았다. 이윽고 식전공연으로 댄스 팀이 무대에 오르자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한데, 불길한 예감은 빚나가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사고가 터진다. 댄스 팀의 공연이 거의 끝날 무렵에 시끄럽게 귀청을 때리던 음악이 일순간 뚝 끊겨 버렸다. 전기가 나간 것이다.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춤을 추던 댄스 팀은 음악이 꺼지자 마무리도 하지 못한 채 급히 무대를 내려갔고 음향을 담당하는 후배들은 정전된 원인을 찾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때 시각이 9시28분. 개회식이 2분밖에 남지 않았는데 설상가상으로 내빈들이 내빈석으로 들어오며 차례로 앉았다.

아, 큰일 났구나. 운동장에는 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서 있고, 내빈석에는 시장님을 비롯한 30여명의 내빈들이 앉아 있는데 행사는 시작할 수 없는 상황이다. 등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니나 다를까. 행사 담당자가 사색이 된 얼굴로 뛰어 왔다. 그는 잔뜩 흥분해 있었다.
“김 대표님,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죄송합니다. 지금 음향 팀이 조치를 취하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 정말 미치겠다.”
그럴 만도 하지.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큰소리 떵떵 쳤는데 이런 사고를 쳤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음향 엔지니어들에게 물어 볼 수도 없었다. 다그치면 뭐하겠는가. 그들은 더 속이 탈 텐데. 이럴 땐 지들이 알아서 해결하도록 나는 빠져 있는 게 좋을 거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빈들에게만은 지금 상황을 이해시켜 주면 좋을 것 같다고. 위기상황에서 모르는 것보다 알고 있는 것이 좋다고 하지 않은가. 생각을 정리한 나는 내빈석을 향해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큰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전기가 나가서 시스템이 멈췄습니다. 원인을 찾고 있는 중이니 불편하시더라도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한데 내빈석에 있던 시의원 한명이 조롱 섞인 말투로 비아냥거린다.
“전기가 나갔어? 아이고 이거 대형사고구만.”
누군가의 불행한 사태에 대해 함부로 지껄이다니 도무지 인품이 뭔지 모르는 인간이다. 말 한마디로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이 사람의 심리인데 아니나 다를까 우려했던 일이 생긴다. “바쁘다”며 내빈석 여기저기에서 불만이 튀어 나온 것이다. 시계를 보니 9시33분. 개회식 예정시간보다 이미 3분이 지나 있었다. 내 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외줄을 타는 심정이 이럴까?

그때였다. 음향을 담당하는 후배가 뛰어오며 소리쳤다.
“선배님, 전기 들어왔어요. 이제 시작하셔도 됩니다.”
그 소리가 어찌나 반갑던지.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후배 녀석을 꼭 끌어 안아주고 싶었다. 아, 드디어, 마침내 전기가 들어왔고 이후 개회식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모든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정전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알아보니 체력 단련실에 있던 ‘제빙기’ 때문이었다. 제빙기는 전력 소모가 많아 시작 전에 음향 팀이 전원 코드를 빼놓았는데, 얼음이 필요한 누군가가 그걸 모르고 다시 꽂았던 거다.

행사가 끝난 후 이건 우리 탓이 아니며, 나도 할 말은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굳이 변명하지 않았다. 그러면 뭐하겠는가. 이미 지난 일인 걸. 다만 담당자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 그에게는 솔직하게 말해줬다. 내 속사정을 이해해주는 그가 어찌나 고맙던지.

나 때문도 아닌데 엉뚱하게 내가 피해를 입는 일. 실제 상황에서 이런 일들은 무수히 많다. 예를 들어볼까. TV에 이런 화면이 나온다. 프랑스 도로 사이클 경기에 참가한 수백 명의 선수들이 자전거에 탄 채 출발선에 대기하고 있었다. 이윽고 출발 신호가 울리며 선수들이 힘차게 출발 페달을 밟는데, 앞에 있는 선수가 무언가에 걸려 넘어졌고 뒤 따라 오던 선수들도 도미노처럼 그 위로 넘어진다. 그들 중에는 벌떡 일어나 다시 출발하는 선수도 있지만 경기를 포기하는 선수도 많다.

이런 경우, 넘어진 선수들을 위해 다시 출발해야 할까? 대답은 ‘노우’다. 결코 그런 경우는 없다. 앞 사람으로 인해 피해를 입더라도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또한 경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군대도 마찬가지다. 고문관 한명 때문에 전체가 얼차려를 받는다고 가정하자. 부당하다고 항변 할 수 있을까. 절대 그럴 수 없다. 군은 철저히 공동체 조직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를 무시한다면 그의 변명은 한 몸이 되어 분투했던 동료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한다.

실수, 나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것은 오로지 본인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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