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용 칼럼] 75명 중 한 명은 기부자 ‘기부도시 대전’

옛 대전 서구청 건물에 장애인 야간학교가 있다. 제때 교육을 받지 못해 한글조차 배우지 못한 장애인들이 다니는 학교다. 문맹의 ‘비장애인 어른 학생’도 일부 있다. 이들에겐 뒤늦게라도 배울 수 있는 학교가 있어서 다행이다. 다른 데선 배울 수가 없는 공부다.

그러나 이 학교는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건물주인 대전시교육청이 올해 말까지 나가달라고 요구해 놓고 있다. 한글을 몰라 나이 50이 넘도록 까막눈으로 살다가 뒤늦게 ‘광명’을 찾고 있는 늦깎이 학생들 48명은 걱정이 태산이다.

장애인 야학에서 모 그룹 회장에게 보낸 구원 호소 편지

이 학교 오용균 교장은 국내 모 그룹 A회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사정을 이야기하고 5,000만 원 정도 기부해 줄 것을 간곡하게 부탁했다. A회장은 개인 재산 규모가 수 조원이 넘는다. 물론 그가 최고 부자라는 사실만으로 부탁한 건 아니었다.

오 교장은 뇌종양 수술 후유증으로 인한 장애인이지만 군 장교였다. 1970년대 사관생도 음악교관 시절 부인과 함께 A회장 회사 직원들의 음악동아리에서 3년 동안 봉사활동을 했다. 자신은 지휘를 맡고 부인은 반주를 했다. 매주 한 번씩 하는 무료봉사였고 교통비조차 받지 않았다. A회장에게 이런 과거지사까지 알려주면서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A회장 비서실에서 전화가 왔다. “죄송하다. 우리 회사는 학술연구를 하는 사람에게 지원한다”고 했다. 회사 사회공헌팀에 넘겨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검토해보겠다고 했지만 3개월째 연락이 없다. 퇴짜가 분명하다.

A회장이 기부를 안 하는 건 아니다. 북한 돕기에 수억 원씩 내놓고 의학연구비로 10억 원을 내기도 했다. 작은 금액은 아니지만 자기 재산의 50% 이상을 기부하는 미국 부자들과는 비교가 어렵다. A회장의 경우 수백 억 원을 내놓더라도 기부율은 1%가 안 된다.

우리나라 재벌들은 대개 그렇다. 삼성 이건희 회장의 경우도 ‘순수한 개인 기부’는 알려진 바 없다. 얼마 전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제안한 청년희망펀드에 개인 재산 200억 원을 내놨지만 기부라기보다 준조세다. 기업인으로 권력에 협조하는 돈이다. A회장도 희망펀드에는 수십 억을 냈다.

‘지방 소재벌’의 기부도 방식은 같다. 지방신문에는 기업의 회장이 시도지사를 방문하여 수천 만~수억 원의 기탁금을 전달하는 사진이 종종 실린다. ‘지방 준조세 납부 인증 사진’이라 할 수 있다. 그 돈은 회장 돈이 아니라 기업체 돈이다. 우리나라 오너들은 회사 돈을 자기 돈과 동일시하므로 그 돈도 기부라고 여길 것이다.

기부문화 앞서가는 도시 대전

우리나라의 기부문화는 오히려 최고 부자가 아닌 일반 부유층과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번져가고 있다. 자기 수입에서 매달 천원~수만 원을 떼 공동모금회에 내고 있는 보통시민들이 적지 않다. 대전에도 2만 여명이 한해 평균 10만 원 정도를 내고 있다. 대전시민 75명 중 한 명은 기부를 하고 있다. 해마다 10%씩 증가하는 추세다.

더 적극적으로 기부하는 부유층도 있다.  2008년 만들어진 ‘아너 소사이어티 클럽’의 회원들이다. 회사 돈이 아니라 순수한 개인재산으로 1억 이상 기부해야 회원이 된다. 전국적으로 1,000명에 육박한다. 대전에서도 40명의 회원이 있다. 작년엔 17명이나 가입했다. 중소기업 사장이나 의사 등이 많다고 한다. 한화의 김태균 정근우 선수도 회원이다. 그러나 ‘지방 소재벌’ 중엔 아너가 없다.

그래도 대전은 기부에서 앞서가는 도시다. 서울 울산처럼 큰 기업이 많은 부자 도시를 제외하면 1인당 기부금이 가장 많은 도시다. 공동모금회의 작년 모금 실적은 대전 90억 원(인구153만), 광주 67억 원(149만), 대구 130억 원(251만), 부산 170억 원(355만)이었다.

대전은 기업체가 내는 기부금보다 개인이 내는 기부금이 더 많은 것도 특징이다. 우리나라 전체로는 기업체 기부금이 훨씬 많지만 대전은 반대다. 개인 기부금 비율은 60%다. 큰 기업이 없는 탓이지만 전체 모금액에서 다른 도시를 앞서고 있으니 대단한 시민들이다. 미국도 개인기부 비율이 높다. 미국은 큰 부자들도 우리와는 달리 순수한 개인 재산으로 기부하기 때문이다.

준조세를 기부로 포장하는 한국 재벌과 소재벌

우리나라에선 개인재산이 아니라 회사 돈으로 내는 각종 ‘준조세’를 기부금으로 포장하는 경우가 많다. 준조세는 정치인에게 건네는 ‘답례’거나 보답을 기대하는 ‘보험’이다. 준조세는 법에 없는 세금이지 기부가 아니다.

중소기업 대표가 수 억 원씩 내놓고, 김밥할머니도 수 천만 원을 내놓는데 최고 부자들의 경우 오히려 기부가 거의 없는 것은 준조세 탓이 크다고 본다. 준조세를 기부금으로 포장해서 공개적으로 주고받는 행사는 없애야 한다. 그래야 우리나라 최고 부자들에게도 진정한 기부의 기회가 온다.

진정한 부자라면 사회적 책임을 고민해야 한다. 우리도 미국처럼 빈부격차가 심하다. 한국의 상위 1%가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6.6%다. OECD 평균 9.7%보다 훨씬 높다. 이게 계속되면 부자들에게도 위험한 사회가 된다. 미국 부자들의 기부에는 그런 걱정도 들어 있다.

이병철 정주영 뛰어넘는 ‘시대의 리더’ 안 나오나

그러나 그런 두려움 때문에 억지로 기부를 하겠는가? 세상이 기억하는 진짜 부자들은 대개 그가 얼마나 모았느냐보다 돈을 어떻게 썼느냐로 평가됐다. 카네기 록펠러 포드가 이름을 남긴 이유가 무엇인가? 기부왕을 다투는 빌 게이츠와 저커버그도 이제는 그저 돈만 많은 사람이 아니다. 세상을 바꾸려는 시대의 리더가 되었다.

우리나라, 우리 지역에선 그런 부자들이 나올 수 없는 것인가? 유일한 박사의 후계자가 나와야 한다. 이병철 정주영 이건희 류(類)의 한계를 뛰어넘어 세상을 바꾸는 진짜 부자들이 나와야 한다. 서울에도 대전에도 위기의 장애인 학교를 구원해줄 부자는 아직 없다. 오 교장은 A회장에게 퇴짜를 맞은 뒤 지역기업 회장에게도 손을 내밀었으나 허사였다.

자기회사 직원들을 도와준 은인에게조차 베풀지 못하는 부자는 수 조원이나 되는 재산을 어디에 쓸 것인가? 기부가 아니라면 결국 절반을 세금으로 떼이더라도 가족에게 남기는 수밖에 없다. 유산으로 물려줄 생각이 아니면 기부의 시기와 방법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부자들 가운데는 ‘나중에’ ‘더 효과적으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경우가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재산의 99%를 기부한 저커버그의 말을 참고하면 어떨까? 그는 “대부분 늙어서야 기부하려고 하는데 반드시 해야 할 일을 굳이 기다릴 필요가 있는가?”라고 했다. 52조 기부는 자기 말의 실천이었다.

남의 재산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건 웃기는 일이다. 더구나 필자는 ‘기부하는 대전시민 2만 명’에도 못 끼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주제넘게 기부 문제를 언급하였다. 큰 부자들의 재산과 기부방식 문제는 개인의 인생관을 넘어선 사회 문제로 볼 수 있다는 점이 변(辨)이라면 변이다. 부자들의 해량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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