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훈의 공감소통]

어릴 적 한동네에서 자란 후배와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 번듯한 직장에 높은 연봉, 좋은 집,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 그는 똑똑한 마누라에 아들과 딸도 있으니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였다. 한참동안 수다를 떨고 일어서려는데 그가 어두운 낯빛으로 말했다.
“형, 우리 어머니가 곧 돌아가실 것 같아요…….”

우리는 같은 동네에 살았기에 그의 어머니는 나도 알고 있는 분이다. 후배의 어머니는 ‘치매’ 증세가 심해 10년 전부터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는데, 몇 년 전 그와 함께 요양원을 찾았던 기억이 난다. 사실 난 그때 난생 처음 요양원을 가봤다. 3층 건물의 요양원은 계단은 폐쇄되어 있었고, 열쇠를 가진 관계자만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 있는 방식이었는데 그렇게 많은 노인들이 생활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후배의 어머니는 핏기 없는 종잇장처럼 하얀 얼굴이었고 당신 아들이 왔는데도 알아보지 못하고 엉뚱한 소리만 했다.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고 후배가 하는 말들은 허공으로 흩어졌다. 나는 한 걸음 떨어져서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모든 것을 체념한 것 같은 아주머니의 눈빛. 아, 나는 여태껏 그렇게 슬픈 눈을 본적이 없다.
“많이 편찮으시니?”

내 물음에 후배는 세상 모든 상실을 다 경험한 듯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며칠 동안 통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다고 하네요. 조금 더 사시면 좋겠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아팠다. 길게 한숨을 내쉬던 후배가 뭔가 생각난 듯 이런 말을 건넨다.
“아참, 형님 어머니도 요양병원에 계시죠? 제가 주제넘게 이런 얘기 하기는 뭣하지만 정신 줄 놓지 않았을 때 자주 찾아뵙는 게 좋아요.”

그렇다. 그의 말처럼 우리 어머니도 요양병원에 계시다. 뇌경색의 후유증과 깊어진 치매 증세 때문에 집에서 돌볼 수가 없어 요양병원으로 모셨다. 후배의 말 때문이었을까? 그날 오후, 어머니가 계신 요양병원을 찾았다. 오랜만이어서일까. 침대에 누워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낯설다. 초점 없는 눈빛, 짧은 백발, 게다가 틀니까지 모두 빼놓아서 내 어머니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침대 위에 놓인 방수커버, 종이 기저귀, 얼굴 살이 빠지며 광대뼈까지 툭 튀어 나왔고 몸은 삐쩍 말라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어머니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셋째 왔네?”

나를 알아봐 주는 어머니가 고마웠다. 하긴, 얼굴을 알아보는 것은 형식일 뿐 치매로 인해 정신을 관장하는 시계는 이미 오래전에 멈춰있었고 모든 것을 다 잊어버렸다. 침대 옆에 간이의자를 가져다 놓고 손을 잡았다. 차갑다.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었을 텐데도 온기가 전혀 없다. 앙상한 손. 뼈 위에 가죽하나만 덧댄 느낌이랄까. 손 가죽이 어찌나 얇은지 투명비닐처럼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는데 핏줄이 까맣다. 원래 핏줄이 까맣던가? 
 
내 어머니는 억척스런 삶을 사신 분이다. 우리는 달동네에서 40년을 살았고 우리가 살던 집은 대문도 없었으며 화장실도 변변치 않았다. 청소를 깨끗이 해도 화장실에 앉기조차 두려웠고 두 달에 한번 정화조 차가 똥을 퍼간 날은 똥 푼 냄새가 하루 종일 집안을 맴돌았다. 그런 환경에도 어머니는 모두가 잠든 새벽에 일어나 연탄을 갈았고, 찜통을 이용해 세숫물을 데워주었으며, 손을 호호 불어가며 자식들의 교복을 빨아주셨다. 추위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교복을 빨랫줄에 널면 꽁꽁 얼어 교복이 동태가 될 정도였다.

일요일 늦은 아침, 잠결에 들리는 빨래방망이 소리에 눈을 떠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 본적이 있다. 마당에는 밤새 내린 눈으로 사방이 하얗게 변했는데 수돗가 앞에 쭈그려 앉아 넓적한 돌 위에 빨래를 올려놓고 빨래방망이를 세차게 내리치는 어머니가 가엾게 느껴져 혼자 눈물을 훔친 기억도 있다. 

무능했던 아버지를 대신해 150센티의 작은 체구로 고무대야를 머리에 이고 다니며 행상을 하셨고, 남자들도 힘들어하던 고물장사 리어카를 끌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어머니가 싫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머니가 창피했다. 거리에서 폐지와 고물을 가득 실은 리어카를 끌고 가는 어머니를 봤을 때 아는 척을 할까봐 멀찌감치 피했던 기억도 있다. 하루 종일 일하고 해가 뉘엿뉘엿 질 때 쯤 지친 몸으로 빈 리어카를 끌고 달동네 비탈길을 올라오던 어머니. 애석하게도 그 시절의 나는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당신이 갖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은 아까워 한 푼도 쓰지 못한 분이 내 어머니다. 당신의 손자였던 내 아들이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의 일이다. 집에 다녀가란 말을 듣고 혼자 살고 있는 어머니 집을 찾아갔을 때 하얀색 천으로 된 자루를 내 앞에 내놓으셨다.
“우리 손자 주려고 모은 건데 이걸로 준석이 교복 맞춰줘라.”
“우리 돈 있어요. 저희는 괜찮으니까 어머니가 쓰세요.”
“어허, 거절하지 말고 가져가래도…….”

효자는 부모의 말을 듣는 사람이라 했든가. 나는 효자는 아니지만 어머니의 말에 순종했다. 그 동전자루를 가지고 집에 돌아와 신문지를 깔고 자루를 쏟았다. “와르르” 순식간에 동전이 수북하게 쌓이며 곰팡이 냄새가 훅, 하고 코를 찌른다. 이걸 모으기 위해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아이들은 내 속도 모르고 “와! 많다.”하며 탄성을 질렀다. 나는 안다. 이 돈은 어머니가 동네를 돌아다니며 종이박스를 주워 모은 돈이란 것을. 어머니가 주신 동전과 지폐를 구분하는데 자꾸 눈물이 났다. 나는 화장실로 들어가 물 틀어 놓고 변기에 앉아 울었다. 그 돈은 60만원이 넘었다. 당신은 아끼고 아껴 자식에게 주고 싶은 것이 어머니의 마음이었으리라. 그 돈을 차마 쓸 수가 없어 아들 통장에 모두 넣어줬다.

언젠가는 이런 일도 있었다. 신발장 위에 놓여있던 아파트 관리비를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는데 전세였던 10평의 아파트는 개별난방이었는데, 한 겨울 한 달 난방비가 ‘만원’밖에 안 나왔다. 좀 더 정확히는 9천 8백 원. 취사만 해도 만원이 넘게 나오거늘, 이게 도대체 뭐지? 그렇다면 어머니는 한 겨울에도 보일러를 가동하지 않고 지냈다는 말이 아닌가. 아, 이렇게 지독한 분이 우리 어머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그렇지만 우리 어머니도 자식들에게 귀한 대접을 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 우리 4형제에게 존경받아야 마땅하고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 그런데 호강해야 할 나이에 일상적인 궤도에서 벗어나며 생의 내리막길을 내달리고 있다. 이놈의 인생이란 불공평한 것 같아 화가 난다. 뼈만 앙상한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으려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와 바닥에 뚝, 하고 떨어진다. 병실에서 환자들을 돌봐주는 공동 간병인이 나를 힐끔 보더니 파티션을 쳐준다. 사실, 어머니가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내 책임이다. 내가 어머니를 이렇게 만들었다.

최근에 나는 누군가의 선거운동을 해준 적이 있다. 일상의 모든 것을 뒤로 미뤄 놓으며 한 가지 목표였던 ‘그분의 당선’만을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시절이다. 우리 4형제 중 대전에는 유일하게 나 혼자 살고 있는데, 2014년 6월 2일, 선거일을 이틀 남겨 놓고 뜻하지 않은 일이 생긴다. 새벽 5시부터 일어나 선거운동을 하던 내게 혼자 사시던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때가 아침 7시였다. “셋째야,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일어나질 못하겠다. 일어나면 자꾸 왼쪽으로 넘어지는데 네가 여기로 와주면 안 되겠니?”

평소의 어머니답지 않았다. 일생동안 자식들에게 폐가 되지 않으려 노력한 분이었는데……. 내 차로 집에까지 모셔다 드릴 요량이면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불편하니까 여기서 세워줘. 내가 걸어갈게” 라고 말하는 분이었다. 그런 분이 도움을 요청했으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한달음에 달려갔을 텐데 선거가 코앞에 있으니 유권자를 한명이라도 더 만나야 했기에 핑계를 대고 말았다.

“오늘은 제가 바빠서 갈수 없어요. 일단 동네 병원에 가보시고 불편하면 다시 전화주세요. 죄송해요. 바빠서 끊을게요.”
둘러대긴 했지만 자식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점심 일정을 끝내고 전화를 드리면 되겠지 뭐. 그러나 불길한 예감은 맞는다던가? 정오쯤 되었을 때 동네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수화기 너머에 있는 간호사 목소리는 무척이나 다급했다.

“큰일 났습니다. 환자분이 요청해서 영양제 링거를 놔드렸는데 환자분이 정신을 잃고 깨어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보호자분이 빨리 여기로 오셔야겠습니다.”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졌다. 도대체 우리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모시고 있던 후보에게 사정을 말하고 어머니가 계신 동네 병원으로 달려갔다. 화장실에 계시다는 말을 듣고 여자 화장실 앞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나오질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 가봤다. 그때 눈앞에 펼쳐진 광경. 어머니는 바지를 추스르지 못한 채 쓰러져 있었고 쓰러진 어머니를 일으켜 세우려 간호사는 땀을 흘리며 낑낑 대고 있었다. 여기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너무나 어이가 없어 간호사 뺨을 한 대 후려갈기고 싶었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환자분이 정신을 잃어서 일으켜 세우는 중입니다. 환자가 이지경이면 사람들이 다 같이 도와줘야 되는 거 아닌가요? 큰 병원으로 모시게 빨리 119를 불러주세요. 어머니 제가 왔어요. 정신 차리세요.

흩어진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어머니를 등 뒤로 업었다. 그런데 간호사가 또 다시 황당한 말을 한다. 119 구급대는 병원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단다. 그게 규정이란다. 의료사고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들이 지금 뭐하는 거지. 사람이 다 죽어 가는데 들어 올수 없다니. 할 수 없이 코마 상태인 어머니를 다시 업고 2층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가 구급차에 태워 대형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그때가 오후 1시였다. 응급실에서 한참동안 이것저것 검사를 끝내고 차트를 보며 여자의사가 말한다.

“뇌경색입니다. 일단 필요한 조치는 끝낸 상태인데 의식이 돌아올지는 경과를 지켜봐야 될 것 같습니다.”
이게 뭔 소리일까? 그렇게 건강하셨던 분이 뇌경색이라니? 수긍하기 어려웠던 내가 물었다.
“어머니는 한 두 시간 거리는 너끈히 걸어 다닐 정도로 건강하셨는데요?”
“나이 든 분들에게 혈관이 터지거나 막히는 것은 언제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눈앞이 캄캄하다. 반쯤 넋이 나가있는 내게 의사가 물었다.
“분명히 전조증상이 있었을 텐데 환자분이 말씀 안하시던가요?”
순간 머릿속을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아침에 받은 전화였다.
“아침 7시쯤에 저에게 전화해서 어지럽다고 하며 몸이 왼쪽으로 자꾸 쏠린다고 하셨어요.”
그러자 의사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아이참, 그럼, 그때 빨리 병원으로 모시고 왔어야죠. 뇌경색은 초기 3시간이 골든타임인데 벌써 6시간도 넘었잖아요.”

그 말을 듣고 너무나 기가 막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어머니께 죄송해서 몸까지 덜덜 떨렸다. 그깟 선거운동이 뭐라고 골든타임을 놓쳤단 말이냐. 무엇이 먼저이고 어떤 것이 나중인지도 모르는 후레자식 같은 놈.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식 놈이란 생각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 자신이 한심해 미칠 지경이었다.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어머니는 그날 오후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간간히 들리는 의료기기의 소음을 빼곤 정적이 흐르는 중환자실에서 나는 어머니의 손을 꽉 쥔 채 간절하게 기도했다. 어머니 제가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부탁합니다. 제발 일어나 주세요.

오후 5시쯤 나는 표시나지 않게 다시 선거캠프로 돌아왔다. 온당하지 않은 현실이었지만 슬프게도 갈 곳이 그곳 밖에 없었다. 그리고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에게 비밀로 했다. 어머니로 인해 모두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최소한의 예의라고 믿었다. 이틀 뒤, 선거에서 우리는 이겼다. 하지만 나는 좋아 할 수 없었다. 혼수상태였던 어머니는 닷새 만에 깨어나셨고 뇌경색 후유증으로 치매가 찾아오며 세 살배기 어린애가 되어버렸다.

다시 요양병원. 침대에 머리를 쳐 박고 울고 있으니 어머니의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앙상한 손이 내 머리를 만져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아들아, 울지 마라……. 나는 괜찮으니까 울지 마라…….”
못난 자식 놈이란 생각에 더 눈물이 나서 어깨까지 들썩이며 엉엉 소리 내면서 울었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이 글을 쓰면서도 눈물 때문에 몇 번을 중단했는지.

지금 나에게 소원이 있다면 어머니가 다시 건강을 찾는 것이다. 이제는 영영 불가능해 보일지 모르더라도 희망을 잃지 않으련다. 그리고 만약 어머니가 건강해진다면 우리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고 싶다. 그랬으면 좋겠다. 부디, 꼭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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