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창호의 허튼소리] 전 충남 부여군 부군수

약속 잘 지키기로 이름난 사람은 춘추시대 때 노(魯)나라 사람 미생(尾生)이 아닌가 한다. 미생이 어느 날, 동네 처녀와 다리 밑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처녀가 나갈까말까 망설이는데, 마침 비가오기 시작했다. 비 오는데 미생이 나올 리가 없다고 생각한 처녀는 나가지 않았다. 

다리 밑에 먼저 나와 있던 미생은 비가 장대비로 변해 강물이 불어나는데도 교각을 붙잡고 기다렸다.

처녀가 나올 것이라 믿으며 마냥 기다리던 미생은 마침내 불어난 강물에 떠내려가고 말았다. 미생의 행위가 우매한지 모르지만, 사자성어 미생지신(尾生之信)은 이래서 생겼다.

옛날, 서양의 한 왕국에서 한 젊은이가 왕에게 불경죄를 짓고 사형을 받게 되었다. 이 젊은이는 죽기 전에 시골의 어머니를 한번 만나 뵙고 싶었다. 그는 “형 집행 날까지 돌아 올 테니 집에 보내 달라”고 사정했다. 하지만 형 집행관은 도망갈 것을 의심해 ”인질을 잡히고 가라”고 했다. 그는 친한 친구를 오라고해서 사정을 말하며 “꼭 돌아 올 테니 사형 집행 날까지 있어 달라” 했다.

그 친구는 흔쾌히 승낙 했다. 그런데 사형집행 날, 집행시간이 다 되도록 친구는 오지 않았다. 사형 집행관들이 대신 죽게 된 그 친구를 어리석다고 비웃었다. 하지만 그는 “내 친구는 반드시 온다” “만약 오지 않으면 대신 죽겠다“고 말했다.

마침내 집행시간이 돼 교수대에 오르는 순간, 멀리서 “멈추어라, 내가 돌아왔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친구가 돌아온 것이다. 그는 친구에게 “늦어서 미안하다”면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돌아오는데 갑자기 많은 비가 왔다” “지름길의 다리가 떠내려가 먼 길을 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왕은 그들의 아름다운 우정과 약속을 지키는 신의에 감탄해 형을 면해 주었다.

옛날, 우리나라가 못살던 시대에 ‘코리언 타임’이라는 말이 있었다. 약속시간을 지키기는커녕 아예 약속 자체를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코리언 타임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 사회에 약속을 지키지 않는 폐습이 많이 남아있는 것 같다. 약속은 서로 간에 지켜야 할 신의이고 신뢰이며, 삶의 기본인데 말이다. 어느 일간신문을 보니, ‘사라진 양심 예약부도’라는 제하로 연재되는 기사가 있었다. 예약을 해놓고 나타나지 않아 골탕을 먹는 요식업체들의 고충이 실려 있었다. 예약 후 아무런 연락도 없이 나타나지 않아 다른 손님까지 못 받게 한다는 것이다. 미리 준비한 음식물 등을 비롯해 이로 인한 손해도 크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지성인인 “대학생들이 더 심하다”는 하소연도 실려 있었다. 예를 들면 서울 신림동의 한 호프집에 모 대학생 50명이 종강파티를 한다며 예약을 했는데, 예약시간이 지나도 학생들이 오지 않아 예약한 학생에게 전화를 했더니, “다른 가게에서 술 먹는다” “못 가게 됐으니 다른 손님을 받으라”면서 전화를 끊더라는 것이다.

대학가 식당이나 술집에서는 대학생들을 ‘갑’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배울 만큼 배운 대학생들도 노쇼 행태는 더 배우고 덜 배우고가 없는 것 같다”고 한 고기집 주인이 말했다 한다. 이는 대학생들이 깨닫고 반성해야 할 일이다.

물론 대학생들만 탓할 일이 아니다. 우리 사회 풍토가 그렇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 일상 생활 주변에서도 예약을 지키지 않는 사례가 허다한 것이 사실 아닌가.

이 같은 노쇼 행태는 해외에서도 악명이 높다한다. 태국의 관광경찰은 “한류로 쌓은 좋은 이미지를 노쇼로 먹칠하고 있다”고 했다 한다. 태국의 유명 관광지에서 한국 사람들은 태국말로 띵똥(정신 나간 사람) 소릴 듣는다고 한다.

예약석을 빈자리로 남겨 놓게 되는 데, 예약해놓고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은 한국인이라는 것이다.

이외에도 △ 한국인은 예약하면서 전화번호도 안 남긴다, △ 예약 후 2시간이나 지나 나타나서는 왜 자리가 없냐고 큰 소리 친다. △ 노쇼 해 놓고 황당하게 예약금을 돌려 달라고 한다. △ 한국인만 유일하게 중복 예약했다가 막판에 취소하는 등 이해되지 않는 행태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본인 뿐 아니라 국가 이미지까지 실추시키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같은 행태가 혹여 나라가 잘살게 된데 따른 섣부른 우월감 때문이라면 더욱 잘못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라가 잘 살고 국민소득이 높아졌다고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라 수준에 걸 맞는 신사도를 지녀야 한다. 해외에서도 한국인은 품격 높은 신사라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제 그럴 때도 되었다.

식당에 대한 노쇼 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하고 있는 예약부도 행태도 하루빨리 사라져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공공기관에 대한 예약도 부도나기 일쑤라 한다. 지방자치단체의 각종 강좌를 신청해놓고 강좌에는 나타나지 않고, 경찰에 고소를 해놓고 조사 일에 나타나지 않고, 정보공개 청구를 해놓고 문건을 찾아가지 않는다(3년 동안 A4용지 600만장 분)는 것이다. 이로 인한 행정력 손실도 이만저만 큰 게 아니라 한다.

이렇게 불필요한 비용을 많이 들이면서 선진국이 될 수는 없다. 물질 수준의 향상과 함께 의식수준도 높아져야 한다. 이제 국내.외를 불문하고 품위 있는 행동으로 칭송받는 한국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노쇼 행태가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면 우리는 선진국 문턱을 넘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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