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훈의 공감소통] 방송인

아침 출근길, 라디오 방송에서 재미있는 사연이 나온다. 아내가 운전하던 차가 교차로에서 교통사고가 나며 상대방운전자와 실랑이를 벌였단다. 그런데 옆자리에 함께 있던 남편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더란다. 누구의 잘못을 떠나 남편은 당연히 자기편을 들어 줄 거라 생각했는데,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나 몰라라 하는 남편 때문에 단단히 화가 난 아내. 뿐만 아니라 이 인간이 시키지도 않은 짓도 하더란다. 교차로 사고는 쌍방과실이기 때문에 몇 대 몇이라며 판정까지 내렸다나. 아내는 끓어오르는 울분을 토해내며 진행자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 인간이 과연 내편일까요? 남편일까요?”

인간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인정받고 싶어 한다. 나를 알아주고 내 등 뒤에서 박수쳐 주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일 거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응원이 그렇지 않은가? 경기장에서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면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서고, 목청껏 내 이름을 불러주면 저들을 위해서라도 젖 먹던 힘까지 내자고 이를 악물기도 한다.

선수들에게 응원단이 있어야 힘이 되듯, 우리 개개인에게도 ‘내편’이 되어주는 누군가가 있으면 행복하지 않을까. 이 험한 세상에서 무조건 나를 믿어주는 한사람만이라도 있다면 어떤 어려움도 충분히 이겨나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아내와 나는 2년 동안 연애를 했다. 그녀는 수줍음을 많이 타는 여자였다. 지금도 첫 데이트가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커피숍에서 대화를 나누는 중에 쑥스러움을 참지 못하고 자신의 핸드백을 이유 없이 계속 열고 닫았다. 그런 그녀가 좋아 보였다. 게다가 순수했다. 진하게 화장한 얼굴이 아닌 맨 얼굴로 다녔고 그 나이가 되도록 파마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실 난 화장을 덕지덕지 하며 화려한 몸치장을 하는 여자는 질색이다. 깔끔하고 소박한 여자가 좋다. 그러니 아내는 내 취향과 잘 맞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우리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아내의 ‘과묵한 성격’ 때문이었다. 아내가 얼마나 과묵했던지 2시간 데이트에 세 마디 말이 전부였다. “안녕 하세요” “뭐 먹으러 갈까요?” “잘 가요” 그러니 나라도 입을 열지 않으면 분위기가 설렁해지기 일쑤여서 매일 혼자 지껄여야 했다. 이것도 하루 이틀이지 어찌 매일 이런단 말인가. 슬슬 짜증이 났다. 게다가 앞으로도 계속 이런 상황이 지속 될 거란 생각이 들자 마음이 무거웠다.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생각 끝에 한 가지 방법을 제안했다. 안되면 되게 하고 두드리면 열리는 법이다. 아내에게 이렇게 으름장을 놓았다.
“너를 만나면 재미가 없어. 웬 줄 알아? 말수가 없기 때문이야.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나도 여우같은 여자가 좋거든? 그러니까 앞으로 나를 만날 때는 무슨 말을 할 건지 두 가지 이상 준비해 와. 어떤 거라도 상관없어. 그냥 말만 하면 돼. 만약 준비해오지 않으면 그냥 들어가 버릴 거니까 알아서 해.”

조금은 유치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내는 내 말에 조금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다음 만남부터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 종이에 뭔가를 적어왔다.
“오늘 우리 회사에 새로 들어온 여자애가 있는데요, 제 고등학교 후배예요. 근데 주산 자격증이 없다는 거예요. 참내 원, 요즘은 주산과 부기 2급 자격증이 없어도 학교에서 취업추천서를 써주나 봐요. 우리 때는 안 그랬거든요.”

아, 이거였구나. 이거였어. 놀랍고도 신기했다. 아내는 종이와 나를 번갈아 보며 다시 말을 이어간다.
“제가 어제 저녁에 처음으로 동태찌개를 끓여 봤는데요, 조금 짠데도 식구들이 다들 맛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자신감이 생겼어요. 다음에는 김치찌개도 도전 해볼 거예요.”

나는 무릎을 쳤다. 그래, 나도 이젠 여우같은 여자와 데이트를 할 수 있겠구나. 기쁜 마음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한데 이 방법에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준비해온 소재는 금방 떨어졌고 이게 끝나면 다시 예전과 같이 침묵이 흘렀다. 밑천 없이 시작한 장사가 바닥을 금방 드러내는 것과 같았다. 살다보면 안다. 안 되는 것도 있다는 것을. 그러니 자꾸 미련을 두면 뭐하겠는가. 결국 여우같은 여자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사랑했고 결혼했다. 벌써 결혼 20주년이다. 사실 그동안 어렵고 힘든 일도 있었지만 20년을 함께 했기에 나는 언제라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내 아내는 어떠한 상황이든 무조건 내편을 들어줄 거라고. 그런데 문제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생긴다.

명절을 맞아 처가에 가면 아내와 나는 장인어른 산소에 성묘를 다녀온다. 장인어른의 묘는 선산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올라가는데도 30분이 걸린다. 그날도 아내와 둘이 산소에 올라갔다. 산소 앞에서 술을 가득 붓고 절을 하고 있는데 옆 숲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바람소리인줄 알았다. 다음에는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인줄 알았다. 그런데 낙엽 밟는 소리 때문에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뭘까? 사람은 아닌 것 같고. 궁금해 하는 와중에도 소리는 멈추질 않았다. 걱정 반 두려움 반으로 아내에게 물었다.
“숲속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 같은데. 당신도 저 소리 들리지?”
무심코 던진 내 질문에 아내는 갑자기 생각난 듯 대답했다.
“아, 맞다. 둘째 오빠가 이산에 멧돼지가 많다고 그랬는데…….”
뭐라고? 멧돼지? 둘째오빠라면 고향인 이곳에서 농사를 짓는 분이다. 그때부터 나는 온갖 나쁜 상상에 빠지기 시작했다. 멧돼지가 우리 앞에 나타난다면 여기서 도망 갈 수 있을까? 여긴 우리뿐이잖아? 불안감은 순식간에 내 마음을 지배해 버렸다. 가만, 전화기. 아내에게 황급히 물었다.  

“당신 핸드폰 가져왔지?”
“아니. 차에 놓고 왔는데?”
아이구우. 내가 미쳐. 화가 치밀어 올라 아내에게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고 말았다.
“당신 참 답답하다. 평소에는 그렇게 잘 들고 다니던 핸드폰을 왜 하필 이런 때는 놓고 온 거야.”
그때까지도 아내는 영문을 모르는 눈치다. 별수 없다. 이 위기를 벗어나는 길은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피하는 것 뿐. 아내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오늘은 예감이 좋지 않으니까 빨리 산에서 내려가자.”
“갑자기 왜 그래? 아빠 산소에 오랜만에 왔는데 조금 더 앉아 있다가 가자.”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아내의 말은 내 귀에 들리지 않았다. 이쯤이면 성묘고 뭐고 없다. 산소에 따라놓은 술을 허둥지둥 마무리한 채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내는 내 속도를 따라오질 못했다. 꾸물대는 아내를 보니 속이 터져 큰 소리로 호통을 치고 말았다.
“그러게 내가 뭐라고 했어. 평소에 운동 좀 하라고했잖아. 진짜 답답하다. 꾸물거릴 시간 없으니까 빨리 가자고.”

이렇게 한마디 하고는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들입다 달렸다. 그렇게 얼마나 내려 왔을까? 뒤가 허전한 느낌이 들어 돌아보니 아내가 없었다. 가만?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나만 살겠다고 도망친 거잖아.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야 아내는 숨을 헐떡이며 내려왔다. 이마엔 땀까지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아내는 내 얼굴을 보더니 표정이 일그러졌다. 예상했던 그대로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이런 상황에 “당신 정말 너무하다. 어떻게 나를 버리고 혼자만 갈수 있니?”하고 소리를 치겠지만 내 아내는 다르다. 말했잖은가? 연애시절에 자신이 할 말을 종이에 적어오던 여자였다고. 아내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미안한 마음에 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내리막길이라서 그랬어. 미안해.”

그것도 변명이라고 둘러댔다. 하지만 아내는 묵묵부답이었다. 그 마음 이해한다. 나라도 그랬을 것 같다. 믿었던 남편이 자기혼자 살겠다고 내빼는 모습을 보고 실망하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날 이후 나는 후유증에 시달렸다. 아주 오랫동안.

다른 부부 이야기를 해볼까? 그들은 진정한 ‘내편’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준 사람들이다. 우리 조기축구팀이 원정경기를 갔을 때의 일이다. 축구 경기 도중 공이 골대를 벗어나며 가정집 유리창에 탕, 하고 부딪쳤다. 집안에 사람이 있다면 깜짝 놀랐을 것이 분명했다.

잠시 후, 창문이 벌컥 열리며 중년의 사내가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잡것들아. 이 무신 염병 질이여? 나가 지난번에 조심하라고 그렇게 야그를 했는디도 아직도 못 알아들은 겨?”

놀랐을 테니 화내는 건 당연한 일. 미안한 마음에 사과부터 했다.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조심할게요. 공 좀 던져주세요.”
하지만 사내는 화가 풀리지 않는지 막말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웃기고 있네. 지송하면 다냐. 아따, 나가 참말로 이것들 땜에 오늘은 아침부터 스팀이 확 돌아 뿌리겠네.”

내 존재 자체가 귀하면 다른 사람도 귀한 법이거늘 그는 운동장에 있는 사람들의 인격은 안중에도 없었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공 좀 주십시오.”
“지랄하고 자빠졌네. 이 잡것들 땜 시, 열 불나 죽겄구만.”
그의 일방적인 행동에 우리도 서서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참다못한 우리 회장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 양반아, 사과를 하면 받아줘야 할 거 아냐. 우리가 무슨 죽을 죄를 지었어? 왜 자꾸 욕을 하는 거야?”
회장의 말 때문이었을까. 사내가 약간 흠칫 하는 것 같았지만 그는 이 정도로 기가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뭐시여? 저런 염병할 놈이 있나? 나가 환장해 불겄네. 나가 나갈 텐께. 너 거기서 꼼짝 말고 기다리드라고.”
잠시 후, 운동장에 조금 전의 그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씩씩거리며 성큼성큼 걸어오는데 한눈에 봐도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50대 중반쯤 되었을까. 160센티 정도의 작은 키에 목에는 자전거 체인처럼 굵은 금목걸이를 하고 있었고, 귀에는 귀걸이도 걸려 있었다. 그는 오자마자 막되어 먹은 사람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누구여. 워 떤 놈이 터진 주둥이를 함부로 놀려. 확 제껴 블랑께.”
사내의 말이 끝나자 축구를 하고 있던 20여명의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그의 주위를 에워쌌다.
“왜 자꾸 반말을 하는 겁니까? 우리가 미안하다고 했잖아요?”
“너무 하는 거 아닙니까? 왜 소리를 지르고 욕하는 거예요?”
“학교 옆에 사니까 이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잖아요.”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건장한 남자들이 한마디씩 던지자 사내의 기세가 확연히 움츠러든다. 그가 우리의 눈치를 살피더니 마지못해 한마디를 꺼냈다. 기어들어가는 작은 목소리였다.
“뭐, 축구를 하다보먼 글 수도 있제라.”
꼬리 내린 사내를 보며 모두들 이쯤에서 정리 될 거라 생각했다. 한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모두의 예상을 뒤집는 극적인 반전이 생긴다. 파머머리에 통통한 체구의 아주머니 한명이 교문에서부터 우리들 쪽으로 뛰어오며 회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누구여? 어떤 놈이 내 남편보고 지랄을 하는 거여. 한번 걸리기만 해봐. 가만 안둘 겨.”
아주 무서운 기세였다. “당신이여? 아님 당신이여?” 이렇게 말하며 한명 한명에게 삿대질을 한다. 자초지종이고 뭐고 없었다. 무조건 악다구니를 쓰며 사람들을 향해 길길이 날 뛰었다. 그녀가 펄쩍펄쩍 뛰며 소리치자 우리들은 당황했다.

수십 명의 남자들이 여자 한명과 싸울 수도 없어 그저 혀를 끌끌 차며 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다시 예상치 못한 반전이 일어난다. 조금 전까지 수그러들어 있던 사내의 기세가 살아난 것이다.
“아따 나가 참아 볼라 했는디 말여. 이 잡것들이 내 화를 돋구는구먼.”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힌다. 사내는 허리춤에 양손을 척, 하고 올리며 마지막으로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긍께. 너그들 디지기 싫음, 입 닥치고 가만히 있으랑께…….”
그러더니 아내와 함께 뒤도 안돌아보고 운동장을 빠져나갔다. 질렸다. 어쩜 저렇게 철이 없을까?

그 일은 그렇게 마무리되었지만 왠지 그 아주머니에게 한 수 배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행동은 내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만약 내 아내였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이 들자 문득 그 사내가 부러워졌다. 나는 그 사내가 어떻게 사는지 알고 싶은 마음이 없다. 다만 자신의 아내를 ‘평생 내편’으로 만든 방법만큼은 배우고 싶었다. 그의 인생은 아내로 인해 충분히 가치 있는 삶이 되고 있으니까.

집에 돌아온 나는 아내에게 그 일을 호들갑스럽게 얘기 해줬다. 그런데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난 아내가 정곡을 정확히 찌른다.
“뭐든 주고받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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