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훈의 공감소통] 방송인

 “영차, 영차”
고교 총 동문회에서 주최한 체육대회 줄다리기가 한창이었다. 나를 포함한 우리 동기 30명은 있는 힘을 다해 줄을 당기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며 양 팀 모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어찌된 일인지 종료를 알리는 신호가 들리질 않는다. 그러자 모두들 투덜거린다.

“힘들어 죽겠는데 왜 끝내지를 않는 거지?”
한참이 지난 후 호각소리가 났다. 화가 난 내가 심판을 보고 있던 선배에게 따졌다.
“선배님, 줄다리기를 이렇게 운영하면 어떻게 합니까?”
“뭐 잘못 된 거라도 있어?”
그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아직도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줄다리기에서 승부가 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건가요?”
“줄이 50센티 이상 끌려가거나 끌고 오면 승부가 나는 거지.”
그의 이론은 맞다. 하지만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다. 한쪽의 힘이 우월하면 당연히 끌려오지만, 양쪽의 힘이 비슷하면 줄은 쉽사리 움직이질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50센티를 우리 쪽으로 끌고 올수 있겠는가? 모르니까 그렇다는 생각에 내가 차분히 설명해 줬다.

“줄이 한쪽으로 끌려가면 승부가 난다고 하셨죠? 하지만 그건 한쪽의 힘이 강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양쪽의 힘이 비슷하면 줄은 움직이질 않습니다. 이런 때는 시간으로 끝내야 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 아닐까요?”

자신의 이론이 틀리면 수긍해야 할 텐데 대개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임원회의 때 이렇게 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나도 어쩔 수 없어. 그냥 규칙대로 할 거니까 잔소리 마.”
맥이 빠졌다. 이런 고지식한 사람이 심판이라니. 결국 우리 동기들은 그 경기에서는 이겼지만 첫 게임에서 모든 힘을 소모했기 때문에 두 번째 경기에서는 패하고 말았다. 심판을 보던 선배는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운영의 묘를 살리지 못했다.

이론과 실제는 항상 차이가 존재한다. 그 간격을 좁혀주는 것은 ‘경험’이다. 경험은 ‘성공한 경험’은 물론이고 ‘실패한 경험’과 ‘좌절한 경험’까지도 도움이 된다.

나는 ‘단기사병(방위)’으로 군 복무(1986년)를 시작했다. 훈련소 입대를 앞둔 어느 날 나와 아주 친하게 지내던 선배가 이런 말을 했다.
“너는 사람들을 웃기는 재주가 있으니까 그 특기를 살려야 해.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신상명세서를 작성할 때 취미와 특기를 쓰는 곳에다가 ‘개그’라고 적는 거야. 그러면 상관들이 너를 눈여겨 볼 거고 재주가 있다고 생각되면 문선대로 빼줄 거야.”

그 말을 듣자 고개가 끄떡여졌다. 맞아, 연예인 병사들이 모여 있는 곳이 ‘문선대’(연예병사제도. 2013년 7월에 폐지 됨)라고 하던데 나도 거기에서 근무해 보는 거다. 설사 그곳을 가지 못하더라도 내 재주에 응원단장 정도는 하지 않겠어?

입대 첫 날, 신상명세서를 작성하며 취미와 특기를 쓰는 곳에 ‘개그’라고 적었다. 훈련병들이 제출한 신상명세서를 꼼꼼히 읽어보던 조교는 내 것을 보자마자 내 이름을 부르더니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눈도장을 확실히 찍었으니까 이제 됐다 싶었다. 그러나 거기서부터 비극은 시작 되었다. 

다음 날부터 휴식 시간 때마다 조교가 나를 앞으로 불러냈다. 
“10분간 휴식. 김경훈 앞으로 나와. 한번 웃겨봐.”
해봤다. 허나 그들은 웃지 않았다. 그들이 누구던가? 피 끓는 나이에 군대에 온 사람들인데 웃을 여유가 있겠는가? 열심히 해도 돌아오는 반응은 언제나 싸늘했다. 사실 남자들만 있으면 절대로 웃지 않는다. 웃더라도 살짝 미소 짓는 정도 뿐. 그래서 남자들만 모여 있는 행사장은 일류 MC들도 피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중에 여자가 딱 한명이라도 있으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아무튼 웃기지 못하는 나를 보며 조교는 못마땅해 했다.
“그 정도 밖에 못해? 어설픈 개그를 했으니 용서할 수 없다. 네가 우리를 웃기지 못했으니 벌을 받아야 한다.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좌로 굴러. 우로 굴러.”

기가 막혔다. 웃기지 못한다고 얼차려를 주다니. 그 얼차려를 받으며 신상명세서에 개그라고 쓰라고 했던 선배를 원망했고, 괜한 헛짓을 했다는 생각에 엄청 후회했다. 개그는 무슨 개뿔이란 말인가. 그런데 이 소문이 다른 중대까지 나며 원정까지 나갔다.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었다. 동기 녀석들도 미웠다. 이렇게 노력하는데 한번 웃어주면 어디가 덧나기라도 한단 말인가? 두고 보자. 언젠가는 웃겨주마.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도 내 얼차려는 계속되었다. 몸을 구르며 생각했다. 왜 웃지 않을까? 웃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화생방 훈련장, 각개전투장, 유격훈련장에서도 내 머릿속은 온 통 그 생각뿐이었다. 실패를 할수록 나는 단련되고 있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일주일 정도가 지나자 조금씩 효과가 나타났다. 훈련병들이 피식 피식 웃었다. 덕분에 자신감도 붙었다. 물론 조교의 얼차려는 더 이상 없었다. 그렇게 3주 동안 내 개그는 이어졌다.

어느 덧 훈련 기간이 끝나고 ‘자대 배치’ 발표를 하는 날이 되었다. 침상 3선에 정열 한 우리는 자대배치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앞으로 근무 할 부대였으니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동기들과는 달리 나는 여유가 있었다. 그동안 훈련병들을 웃겼으니 의심의 여지없이 당연히 ‘문선대’가 아니겠는가? 동기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드디어 내 이름이 불렸다.

“훈련병 1221번 김경훈. 군수지원단.” 
군수지원단?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내가 여태껏 고생 한 이유는 문선대 때문이었는데. 나는 운도 지지리도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동기들과 군수지원단으로 갔다. 중대장실에서 전입신고를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중대장이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훈련소에서 넘어 온 내 신상명세서를 보고 있었다.
“취미와 특기가 개그라고? 한번 해 볼 수 있겠나?”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이병 김경훈. 자신 있습니다.”

자신 있었다. 3주 동안 훈련소에서 한 게 개그였으니까. 중대장이 웃었다. 옆에 있던 동기들도 웃었다. 중대장이 웃는 걸 보니 편한 보직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대장이 말했다.
“우리 부대에 진짜 물건이 하나 들어왔네. 너 어디서 근무하고 싶나?”
중대장은 내게 선택권을 줬지만 내가 이 부대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겠는가.
“이병 김경훈. 어떤 곳이든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너는 다른데 가지 말고 나하고 같이 근무하자. 내일부터 ‘장피소’에서 근무해라.”

야호, 나는 속으로 환호를 질렀다.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이 중대장이란 사실에 날아갈 것 같았다. 전입신고를 마치고 중대장실을 나오려는데 중대장이 옆에 있던 선임하사에게 하는 말이 내 귀에도 또렷하게 들렸다.

“하하하. 내 군 생활 10년 만에 특기를 ‘개그’라고 쓴 놈은 저놈이 처음이야.”
나는 중대장이 인정해준 사람이니까 ‘장피소’는 편할 곳 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그곳의 비밀이 벗겨진다. ‘장피소’는 ‘장교피복관리소’의 준말이고 장교들의 옷을 판매하고 수선해주는 곳이었다. 내가 그곳에서 한 일은 ‘단추 달기’였다.

이런 일들을 겪으며 나는 지지리 복이 없는 놈이라 생각했다. 훈련소에서 남들이 쉬는 휴식시간에 나는 앞으로 불려나갔고, 웃기지 못한다며 조교의 얼차려를 받았고, 군복 단추만 달았으니까.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사회에 나오니 그 경험은 약이 된다. 훈련병들 앞에서 매일 개그를 시도했고, 군수지원단에서 응원단장을 하며 단련된 탓에 어떤 상황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강심장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실 처음엔 나도 이런 내 자신을 몰랐다. 우연한 기회로 대학교 축제에서 사회를 보게 되었는데 무대 위에 있던 나를 눈여겨 본 방송국 관계자의 권유로 방송을 시작했고 1년 6개월 만에 대전 MBC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의 진행자가 된다. (1992년부터 2005년까지 13년 동안 별밤을 했다). 그 당시 파격적이란 말도 있었다. 물론 내가 이런 기쁨을 누린 이유는 군 시절에 단련된 경험 덕분이었다.

이후에도 방송을 하며 어려운 순간이 올 때마다 내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때 웃지 않던 애들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런 내가 이까짓 것쯤이야.’

혹자는 말한다. 어떤 경험을 했느냐 보다 그 과정을 통해 무엇을 느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그 말 공감한다. 다이아몬드 1캐럿을 얻기 위해서는 50톤에서 250톤의 광석이 필요하듯 경험도 마찬가지다.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이 뒤따라야 한다. 수많은 광석 속에서 다이아몬드를 발견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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