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훈의 공감소통] 방송인

“고발합니다. 제 마음속에 못된 도둑놈이 있습니다.”
 무대 옷 전문 의상실을 운영하는 누님에게 전화가 왔다.
“우리 딸이 다음 달에 결혼식 날짜를 잡았는데 경훈 씨가 결혼식 때 사회 좀 봐줄 수 있어? 주례 없는 결혼식이라 마땅히 부탁할 곳이 없네.”

친한 누님의 딸인데 그 정도 못하랴 싶어 흔쾌히 승낙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아이를 처음 본 때가 중학생이었는데, 벌써 결혼을 하는구나. 세월 참 빠르다. 그러고 보니 이 누님과 알고 지낸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의상실 근처를 지날 때는 꼭 가게에 들러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었는데.

결혼식 당일. 눈부신 신랑신부는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을 했다. 내가 사회를 봐준 건 물론이다. 결혼식이 끝난 며칠 후 누님에게 전화가 왔다. 가게로 점심 먹으러 오란다. 그래서 다음날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 한데 과분한 칭찬을 한다. 하객들이 사회자 칭찬을 많이 했다나. 은근히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뭘 그까짓 것 가지고. 그런데 누님이 호주머니에서 흰 봉투를 꺼낸다.

“이거 고마움의 표시로 조금 넣었어.”
예상치 못한 일이라 당황스럽다. 정신을 차리고 손사래를 치며 거부했다.
“누님 저 이거 안 받을래요. 제가 하고 싶어서 했던 거예요. 그냥 넣어두세요.”

애당초 이런 걸 바라지도 않았지만 내 양심이 허락하질 않는다. 하지만 누님도 포기하질 않았다. 그런데 간사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더니 그 돈 때문에 마음 한쪽 구석에서는 천사와 악마가 싸우고 있었다.

“너 요즘 형편이 어렵잖아. 아파트 관리비 낼 돈도 없으면서 왜 허세를 부리는 거야. 저 돈은 네가 수고한 대가로 주는 거니까 받아도 돼.”
 “안 돼. 저 돈을 받으면 너는 나쁜 놈이야. 예전에 방송 펑크 났을 때 누님이 자기 일처럼 도와줘서 위기를 모면했잖아. 그러니 받으면 안 되지. 게다가 누님 가게에서 그동안 마신 커피 값만 해도 얼만데?”

내가 이렇게 갈등하고 있자 누님이 벌떡 일어나 내 양복 호주머니에 봉투를 찔러 넣었다. 이때부터 내 마음이 달라졌다. 막상 수중에 봉투가 들어오니 다시 빼줄 생각이 사라진 거다.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 없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그럼 누님의 성의로 알고 받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냐, 내가 고맙지. 많이 넣지 못해서 미안해.”
별말씀을요. 이렇게 주시는 것만도 고마운데요. 그런데 궁금했다. 얼마를 주셨을까? 30만원? 20만원? 아무튼 기분 좋다. 생각지 않은 돈이 생겼으니. 이걸로 아들 운동화 한 켤레 사줘야겠다.

식사가 끝난 후 누님과 헤어지고 차에서 봉투를 꺼내 돈을 세어봤다. 그런데 웬걸. 내 예상과 다르다. 10만원이었다. 엥? 10만원? 실망이다. 보통 결혼식 사회는 20~30만원을 받는데. 그러자 내 마음속에 있던 냉소가 말했다.

‘너 아주 못된 놈이구나. 누님과 10년 넘게 지낸 사이가 겨우 요 정도였니? 그 분이 봉투에 돈을 넣을 때의 심정을 헤아려 봤어? 돈 액수 때문에 서운한 감정이 든다면 너는 도둑놈이다.’

아, 그랬구나. 누님은 이 봉투 때문에 무척 고민했을 텐데 나는 내 생각만 했던 거구나. 다음에 누님가게에 갈 때는 맛있는 것 좀 사가야 되겠다. 

나는 참 못된 놈이다. 내가 운영하는 기획사가 이벤트 행사를 할 때는 비가 오지 말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우리와 경쟁했던 다른 기획사의 행사 때는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또 행운권 추첨에서 내가 당첨되면 당연한 거고 당첨자 명단에 내가 없으면 주최 측의 농간 이라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 적도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겉으론 고고한 척 하면서 속으로는 은근히 무언가를 바랬고, 재능기부를 하면서 공치사를 했고, 나에게 도움이 안 되는 일은 좋은 일이라도 거들 떠 보지 않았고, 착한 일을 하면서도 대가를 바랬다. 아, 나는 이렇게 속물이다. 올 여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대전 당진 간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 공주휴게소에 들렀다. 화장실에 들어가 보니 누군가가 놓고 간 스마트 폰이 휴지걸이 선반 위에 놓여있었다. 스마트 폰에는 신용카드도 끼워져 있었다. 쯧쯧,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나와 비슷한 사람이군. 나는 뭐든 잘 잃어버린다. 휴대전화를 잃어버려 입력되어 있던 전화번호를 다 날려 엄청 고생했고, 지갑을 분실해 발을 동동 구르며 신용카드를 다시 갱신한 적도 있었다.

잃어버린 사람의 속은 얼마나 탈까? 그 심정을 헤아리고도 남을 것 같다. 안내소에 가져다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기 주인이겠지, 싶어 받았다.

“여보세요. 제가 그 전화기 주인인데요. 지금 어디계신가요?”
목소기가 절박하다. 그만큼 다급하다는 뜻이리라.
“여기 공주 휴게소입니다. 화장실에 전화기를 놓고 가셨던데요? 안내소에 맡겨놓겠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금방 갈 테니까 거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기다려 달라고? 사례를 하겠다는 건가? 이건 생각지 못한 건데? 그렇다면 땡잡은 일이 아닌가. 알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화장실 앞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데 금방 오겠다는 사람이 30분이 지나도 오질 않는다.

기다리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에이, 좋은 일 한번 하려다가 이게 뭐람. 그때였다. 색 바랜 점퍼를 입은 60대 아저씨가 그의 아내와 함께 내 앞으로 황급히 뛰어와 나를 바라보고 섰다. 우리 눈이 마주쳤다.

“제 핸드폰 주우신 분이죠?”
“네. 제가 아까 통화한 사람입니다.”
그에게 스마트 폰을 건넸다. 그러자 그분은 자신의 핸드폰과 신용카드를 확인하더니 나이가 어린 나에게 연신 고개를 숙인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이걸 잃어버려서 얼마나 애가 탔는지 모릅니다. 고속도로라 유턴 할 곳이 마땅치 않아 유구IC 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 왔어요.”
그러더니 지갑을 꺼낸다. 아이고,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하면서도 나도 사람인지라 은근히 기대했다.

“이건 고마움의 표시입니다. 받아주세요.”
 암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지갑에서 1만 원짜리 달랑 한 장을 꺼내더니 내게 건넨다. 아이고, 이걸로 뭘 하라고. 망설여진다. 이걸 받아야 하나. 받자니 40분 동안 기다린 내 수고로움이 퇴색될 것 같고, 안 받자니 상대가 서운해 할 것 같고. 나는 한동안 그냥 멍하니 서 있었다. 침묵이 이어졌다. 1초, 2초……, 약 5초 정도가 지나고 난 후 할 수 없이 그 돈을 받았다. 그러나 기분은 좋지 않았다. 애들도 아니고 만원이 뭐란 말인가?

그들과 헤어지고 난 후에도 계속 투덜거렸다. 짠돌이, 자린고비. 괜히 기다리면서 아까운 시간만 소비했잖아. 그런데 그 순간 퍼뜩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내 마음속의 도둑놈.’ 목적지를 향해 가며 이렇게 생각했다.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서 기뻐하는 사람의 얼굴을 봤고 그 덕분에 공치사까지 했지 않은가. 그걸로 위안을 삼자. 그 정도면 좋은 일 한 보람이 있는 거다.’

나는 도둑놈 심보를 찾을 때마다 내가 슬프다. 내 추악한 단면이 드러나는 것 같아 부끄럽다. 하지만 내 속에 있는 도둑놈을 찾았으니 이젠 경거망동 못할 거다.내 나이 벌써 쉰. 요즘의 내가 가장 두려운 것은 나이 값을 못하는 거다. 그래서 손가락질 받는 것이 무섭다.

지금의 내가 원하는 건 ‘더 좋은 사람’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이란 남에게 결코 우쭐대지 않고 내가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할 줄 알며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잘못된 것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갖되 상대를 존중해주는 그런 사람이다.

나는 정말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언제쯤이나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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