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용 칼럼] 세계과학정상회의 이후의 한국 과학

김학용 주필
서울대 전자공학과 출신의 지인에게 들었던 70년대 일화다. 한 강사가 서울대 전자공학과 학생들에게 수학문제를 냈는데 3분의 2가 만점이었다. 강사는 문제가 누출된 것으로 보고 시험을 다시 봤지만 그래도 만점자가 절반이었다고 한다. ‘신동아’(2004년3월호)에도 나오는 내용인데 문제 누출이 아니라 변별력 때문에 재시험을 봤다는 게 다르다.

과거 서울대 자연계 수석은 주로 전자공학과나 물리학과에서 나왔다. 그 전엔 화공과 인기가 더 높기도 했다. 공부깨나 한다는 이과계열 고교생들의 꿈은 의사보다는 과학자였다. 어쩌면 그들이 지금의 ‘IT강국 한국’을 이끈 주역들이다. 지난주 대전에서 열린 세계과학정상회의 의장을 맡았던 최양희 미래과학부장관(서울대 전자공학과)도 그 중 한 명이다.

70년대 수재 이과생들의 꿈 과학자

이번 과학정상회의 개최도 과학자를 꿈꾸었던 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는지 모른다. 행사 중에 나온 자료를 보면 보람은 더 컸을 것이다. 이번 행사는 ‘IT 강국 한국’을 알리고 자랑하는 행사였다. 행사 중 발표된 각종 통계지표를 보면 과학기술 한국의 미래는 여전히 밝았다. 미래의 과학기술 발전 가능성 지표라 할 수 있는 R&D 투자비율은 우리나라가 최고 수준이다.

앙헬 구리아 OECD사무총장은 “OECD 평균이 2.4%에 불과한데 한국은 4.1%나 된다”며 한국 등이 너무 앞서가 다른 나라들이 따라가지 못하는 점이 오히려 걱정인 것처럼 말하기도 했다. 기존 산업을 와해시킬 정도의 파괴력을 지닌 급진적 혁신기술, 이른바 ‘와해성 기술’ 20개 분야 가운데 11개에서 한국이 선도주자라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GNP 대비 R&D투자 비율 최고 수준의 한국

하지만 과학기술계 현장의 목소리는 그 반대였다. 행사 마지막 날인 지난 23일엔 내국인끼리 모인 토론회가 열렸다. 거품과 허세를 걷어낸 ‘뒷담화’였다. 이 자리에선 한국 과학에 대한 걱정의 목소리가 훨씬 많이 나왔다. 옥에 티를 지적하는 말도 아니고,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는 뜻의 비판도 아니었다.

R&D 투자비율은 1위지만 기술 수출 비중은 27위에 그쳤다. 총 연구인력은 6위지만 기술사업화는 43위였다. 연구에 돈을 많이 들이고 연구하는 사람도 많지만 성과는 크게 없다는 뜻이다. 허울뿐인 연구가 많음을 말한다.

한 전문가는 주제발표에서 ‘세계 일등제품의 추이’, ‘한국 독일 일본의 산업구조’ 등의 도표와 외국과 비교조차 어려운 한국의 히든챔피언, 대만에도 뒤지는 혁신생태계 등의 사례를 들며 미래를 걱정했다. 우리는 선두주자가 아니라 자꾸 뒤처지고 있으며, 제대로 혁신하지 않으면 낙오가 불가피하다는 경고였다.

심각한 출연연 비효율성 문제

그 중 하나는 정부출연연구소, 즉 출연연 운영의 심각한 비효율성 문제다. 출연연을 얘기할 때마다 나오는 단골 주제다. 이날 토론회에선 “(연구원이) 맨날 연구비를 타는데 목숨 걸어야 하고 연구비를 어떻게 썼는지 정산하는 데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말도 나왔다.

출연연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 문제가 가장 심각한 문제다. 연구 성과를 내야 월급을 받는 시스템으로 바뀌면서 연구원들은 ‘가짜 연구’라도 해야 하고 그것을 실적으로 포장해서 제출해야 한다.  ‘진짜 연구’에 매달렸다가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하면 월급조차 제대로 받기 힘든 형편이니 엉터리 연구가 성행할 수밖에 없다.

성공이든 실패든 ‘결과’가 없는 연구도 많다고 한다. 실패를 해도 그 결과를 데이터로 남겨야 성공의 디딤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정말 실패하면 연구비가 줄어들거나 더 이상 연구를 할 수가 없게 되므로 실패를 인정할 수 없다. 그래서 성공으로 포장하지만 아무 쓸모도 없는 연구들이다.

출연연 출신 A씨에게 “그래도 제대로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아니냐?”고 물었다. 그는 “5% 쯤 될지 모르겠다”고 했다. 연구원 출신 B씨는 “연구소에 들어오는 신참들은 똑똑하지만 2~3년만 지나면 타성에 젖어 그냥 묻어간다”고 했다. 그는 “출연연은 아예 연구를 하지 않아야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조직”이라며 “내 자식이면 차라리 농사를 지을망정 연구원으로 보내고 싶지는 않다”고까지 했다.

R&D투자비율은 세계 최고지만 기술수출 비중은 27위, 연구인력은 6위지만 기술사업화는 43위다. 진짜 과학, 진짜 연구는 적다는 의미일 수 있다.

연구원들 줄서서 과천 술집 찾아가는 이유

연구비를 대주는 정부 관료들이 이런 현실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가짜 연구’와 거짓말로 날을 보내는 연구원들에겐 관료나 힘있는 정치인은 확실한 갑(甲)이다. 연구감도 안 되는 허접한 주제라도 청와대에 줄을 대면 풍족한 연구비를 타낼 수 있다.

연말이면 과기부(현재 미래부)가 있는 과천 술집에 대덕특구 연구원들이 줄을 지어 찾아간다고 한다. 과기부 공무원들이 먹고 마신 술값을 대신 내주기 위해서다. 5년 전 쯤 얘기지만 지난주 토론회에서 나왔던 탄식을 듣고 보면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보장이 없다. 출연연은 ‘을’, 정부는 ‘갑’이다. 을은 어떻게든 갑을 대우해줘야 하는 게 세상의 이치다.

이런 문제 때문에 그날 토론회에선 ‘연구 주권(主權)’에 대한 불만도 나왔다. 연구소와 연구원이 연구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공무원과 정치권에 끌려 다니는 현실을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개선은 쉽지 않을 것이다. 연구원 중엔 이미 연구보다 정치에 맛을 들인 사람들이 많다.

연구실보다 골프장이나 술집을 더 자주 찾는 가짜 연구원들이 갑질에 빠져 있는 정부 관료와 한통속이 되어 실속 없는 엉터리 연구로 날을 보내는 게 우리나라 출연연이다. 정부의 과장급 이상 공무원이 퇴직 후 핵심연구원으로 내려오는 낙하산 인사도 적지 않다. 입으로만 연구하는 가짜 연구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지금 한국은 OECD까지 부러워하는 IT강국이 되어 있고, 세계과학정상회의까지 개최하는 나라가 되었으니 아이러니다. 한국과학의 메카인 대덕특구와 그 주역이랄 수 있는 정부출연연이 이렇게 엉터리로 굴러가는 데도 한국이 어떻게 과학기술 국가의 명성을 얻게 되었을까? 세계과학정상회의를 지켜보면서 가졌던 의문이었다. 과학기술 분야 쪽 취재 경험이 별로 없는 필자의 억측으로는 이렇다.

과거 ‘천연기념물’로 불리던 연구원들 지금은...

지금 ‘과학 한국’이란 열매를 딸 수 있는 나무를 심은 사람은 ‘과학입국’, ‘공업입국’의 기치를 내걸었던 박정희 대통령이다. 당시 연구원 월급은 일반 공무원의 3배였다. 출연연 출신 B씨의 증언이다. “83년 공무원에서 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월급이 20만원에서 60만원 가까이로 올랐다. 그때 연구원들은 ‘천연기념물’로 불렸다. 외국에서 연구원을 데려올 때는 집은 물론이고 이사비용까지 정부가 대줬다.”

그러니 과학자 꿈을 가진 인재들도 많았고, 과학 한국의 꿈나무로 컸다. 연구소에서, 대학에서, 외국에서 이들은 밤을 새며 공부하고 연구에 매달렸다. B씨는 말한다. “연구원을 천연기념물로 대우를 해주는 분위기에선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출퇴근 시간이 따로 없었다. 하루 종일 연구에 매달렸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전두환 정권 때까지는 ‘관성의 법칙’으로 이런 분위기가 어느 정도 이어졌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 들어 연구원과 공무원의 임금을 맞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인재들이 연구소를 떠났다. 대학으로 옮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이후엔 어떤 정권도 진정으로 과학을 중시하는 정책을 펴지 않았다. 다들 입으로만 과학을 외쳤다.

과학도시 대전에서 열린 세계과학정상회의. OECD 본거지를 벗어나서 열린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다행히 삼성 현대 등 대기업들이 연구의 필요성에 눈을 뜨면서 민간연구소가 과학 인재들을 끌어들였다. 지금 삼성은 연구 인력에서도 세계 최대 기업이다. IT강국 한국은 이들 기업체의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부가 과학의 씨는 뿌렸지만 민간기업이 키우고 열매까지 따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희생자가 있었다. 정부는 중소기업보다 대기업 위주로 지원정책을 폈다. 지난주 토론에서도 정부는 이제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을 밀어줘야 한다는 주장이 많이 나왔다. 연구인력을 스스로 갖추기 힘든 중소기업은 여전히 출연연의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지만 출연연의 현실을 보면 앞날이 어둡다.

이공계의 좌절감... 한국 과학 전망 있나?

그러나 ‘한국 과학’의 미래를 더 어둡게 하는 것은 따로 있다. 출연연을 포함한 이공계 전체의 좌절감이다. 이제 서울대 전자공학과의 만점 일화 같은 건 기대하기 어렵다. 오히려 그 반대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서울대 입학생조차 수학 기초실력이 부족해서 별도로 가르쳐야 할 정도다.

카이스트 포스텍처럼 세계적인 대학들과 경쟁을 벌이는 과학인재 양성기관들도 생겼지만 최고 인재들은 공대가 아니라 의대의 문을 두드린다. 우수한 실력으로 공대에 들어갔다가도 의대로 방향을 트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

지금 중국은 IT기술 분야까지 우리를 앞질러 치고 나가는 기세다. 과거 우리처럼 과학자의 꿈을 꾸는 학생들이 많다. ‘과학 대국’ 미국은 자국 학생들의 수학 과학 성적이 자꾸 뒤처지는 것으로 나타나자 다른 예산을 줄이면서까지 교육 예산은 늘리고 있다. 작은 강국 이스라엘의 힘도 알고 보면 과학에서 나온다.

과학은 그 자체가 진실을 탐구하는 학문이지만, 한 국가의 경제력은 물론 국방력까지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우리의 삶의 질을 결정짓는 가장 현실적 산업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미국 방문 중 한국형 전투기의 핵심기술 이전을 애걸했으나 거부당했다. 과학기술의 중요성은 늘 실감하면서도 과학정책엔 뒷전이다.

박근혜 정부는 ‘창조경제’를 테마로 삼고 있다.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일자리를 만들자는 것이지만 이것도 결국은 ‘과학기술’이 핵심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이렇다 할 과학정책은 없다. 진정한 연구원들의 탄식 소리는 여전하고, 이런 식이면 세계의 일류가 된 삼성의 앞날도 장담할 수 없다. 공대에 진학하는 학생이 없다면 미국처럼 다른 나라에서 과학자를 수입해 와야 할 텐데 그게 가능할까?

과학인재 육성책 없으면 한국 과학 내리막길 갈 수도

이번에 열린 세계과학정상회의는 어쩌면 한국 과학 수준의 정점(頂點)이 될지도 모른다. 과학인재 육성책이 없고, 출연연이 계속 헛도는 한, 한국의 과학은 내리막길로 갈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정부는 과학기술 정책, 특히 출연연을 정상화하는 데 힘을 썼으면 한다.

과거처럼 연구원 봉급을 공무원의 3배로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연구원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방법은 찾아야 한다. 연구원이 정치인과 관료에게 끌려 다니면서, 혹은 한통속이 되어 가짜 연구로 세월을 보내는 출연연의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

단기적인 성과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 출연연이 무너지면서 관계부처 장관 입에선 종종 이런 주문이 나왔다고 한다. “내일 신문 1면에 뻥 터뜨릴 것 뭐 없어?” 혹시 근래 나온 ‘노벨상 프로젝트’가 그런 주문에서 나왔다면 실망스런 일이다.


 *정부 출연연구소의 성과도 적지는 않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이 개발한 CDMA 기술은 세계 최초로 상용화에 성공, 100조원 이상의 시장유발 효과를 냈다. 대덕특구에는 출연연 30개를 중심으로 기관과 기업체 1266개가 입주해 있고, 5만여 명의 전문 인력이 종사하고 있다. 특허출원은 10만 건 이상이다. 그러니 더욱 혁신이 필요한 조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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