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국열의 밥그릇챙기기] 평생밥벌이학교 교장

# “야, 이게 얼마만이야!”, “살아 있으니까 다 만나네…”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조만간 만나서 소주 한 잔 하자며 인정머리 없게 싹뚝 끊어버린 핸드폰을 원망할만큼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무정한 세월 앞에 무너져 버린 중년남성 네 명이 ‘유성 만남의 광장’으로 하나둘씩 모여 들었다. 예전에 함께 근무했던 외국계 금융회사에서 임원으로 모셨던 K사장의 부친 사망소식을 얼마 전에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사태가 터진후 명예퇴직이다, 창업이다, 재취업이다 등등의 이유로 전국각지로 뿔뿔히 헤어졌던 직장 선배들을 수년만에 만났으니 반가움이 앞섰다. 중간지점인 유성에서 만나자고 제안한 탓에 내 차에 함께 태우고 장례식장이 위치한 전북 익산으로 차량핸들을 돌렸다.

명문 S대를 나와 현대자동차를 거쳐 경력사원으로 입사해 수억원대 연봉을 챙겨가며 후배들에게 부러움을 샀던 조수석에 앉은 선배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말솜씨가 예전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잘생긴 외모와 함께 여자 아나운서들도 울고간다며 입담을 자랑했던 것과는 달리 묵직했고 아예 말수조차 적었다. 이야기를 들어본즉, 회사를 나와 계약직 투자상담사로 일을 하면서 투자를 잘못한 탓에 그동안 벌어들인 돈 절반을 잃은데다 결혼자금으로 남겨놓은 종자돈마저도 대학 후배들에게 함께 차린 투자자문사에서 다 날렸다고 우울한 소식을 전한다. 그뒤로 결혼마저 포기한채 고향 속초로 내려가 부모님이 운영중인 횟집을 도와주면서 보냈다고 한다.

짬짬이 소주 한 잔 걸친뒤 바닷가에 나가서 사진 찍으며 외로운 마음을 달래가며 살고 있다는 58년 개띠생으로 가장 나이가 많은 노총각이었다. 본인 블로그에 수년동안 카메라로 담은 동해안 사진을 올려놨으니 잘 살펴보면 건질만한 작품이 꽤 있을 거라며 프로 작가라도 된냥 표정이 무척 진지했다.

# 인천에서 고교친구랑 동업으로 여행사를 차린뒤 돈좀 꽤나 벌었다는 소식이 들렸던 파마머리 선배가 그 다음 말을 이어갔다. 듣고 있노라니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사업중간에 지인에게서 사업자금 수억원을 사기 당하고나서 부모에게서 빌린 자금으로 겨우 시작한 아파트인근 대형 슈퍼마켓 운영에서도 큰 재미를 못본데다 설상가상으로 경제적 위기가 닥치자 이혼까지 당하는 수모까지 겪었다고 했다. 그뒤로 법인 택시기사, 중고차 판매, 기획 부동산 분양 등등 먹고 살기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고 지금은 재혼해 LH아파트 정문앞에서 20평짜리 과일가게를 그럭저럭 운영해오고 있다고 한다.

대인관계가 좋아 영업실적은 늘 최상위였고 유머감각까지 뛰어나 직장내에서도 어디 하나 흠잡을 수 없었던 매력 넘치는 남자였다. 다행히도 가끔씩 만나는 쌍둥이 자식 녀석들이 공부를 잘해 작년에 그중 한놈이 경찰대에 입학해서 학비는 벌었다며 인천으로 놀러오면 거나하게 밥 한 번 사겠다며 호탕하게 웃는다.

지난달에 고속도로 속도위반 과태료를 납부한 탓에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학부시절에 통계학을 전공했고, 공인회계사 시험공부를 한 경험이 있던 막내 형이 휴게소에 들러 담배 한대 피고 가자며 보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냐는 질문에 죄없는 담배만 연신 입에다 물어댄다. 금융권을 나와 재취업을 하려고 해외법인이나 계열사 관리직을 수차례 노크했지만 그리 쉽지 않았고 겨우겨우 들어간 곳이 중소기업 재무담당 자리였다고 했다. 사실 쉽게만 생각했던 협력업체 임원자리도 현실 문턱이 높았고, 회사가 괜찮다 싶으면 연봉이 너무 낮아서 입사포기를 수차례나 했단다. 대학동기 부친의 소개로 어렵게 들어간 지금의 회사는 얼떨결에 가업을 이어받은 30대 후반의 철부지 오렌지족 사장 때문에 관계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고등학생과 대학생인 자녀들의 교육비며 생활비 부담이 만만치 않아 당분간 참고 다니고 있는데 그나마도 조만간 회사에서 나와야 할 상황이라며 세종시에 재무쪽 일자리가 없냐며 오히려 나에게 물어본다. 틈틈이 연락을 주고받곤 했지만 차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어떻게 이 지경까지 왔는지 너무도 통탄스러웠다. 끊었던 담배 한 개피를 얻어 필터에 입을 댄후 불을 붙였다. 니코틴이 흡수된지 몇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머리가 어지러웠다.

# 최근 금융감독원의 통계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중 개인 사업자 대상 신규대출은 52조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39조원보다 13조원(34%)이 증가했다. 대출잔액을 연령대로별로 보면 50대의 대출잔액이 82조여원으로 39.8%의 비중을 차지했고, 60대는 21.4%로 나타나 50대이상 은퇴 연령층의 비중이 무려 60%를 훌쩍 넘었다. 이처럼 베이비부머 세대가 은퇴후 생계형 창업에 잇따라 나서고 있지만 지난 10년간 창업한 자영업자의 생존율은 16.4%에 불과했다.

소득이 일정하지 않은 자영업의 특성상, 지속되는 불황과 과당경쟁으로 인해 경영난이 심화돼 폐업의 위기로 내몰릴 경우, 이들이 1100조원을 넘어선 가계부채 폭탄을 터뜨릴 뇌관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주택을 보유한 50대 이상 연령층의 주택담보대출이 가계부채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데다 대출금을 자영업 사업자금이나 생활비로 지출했을 가능성이 커 더욱 심각하다. 향후 국내외에서 닥칠 금융 리스크가 언제든지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 내심 불안감을 감출수가 없다. 이에따라 ‘58년 개띠’를 상징하는 베이비 부머들은 리스크 관리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 여산휴게소에 들러 테이크 아웃으로 주문한 커피를 들고 서서 주름진 얼굴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같은 세월앞에 기라성 같았던 선배들도 비켜갈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한창 잘나갈 때 노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던 사내들이었는데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왔는지 세상이 야속했다. 고급 술집서 폭탄주 돌리고, 노래방가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대형 아파트 장만한뒤 집들이하고, 배기량 높은 외제 차량으로 바꾸고, 푸른 잔디 위에서 골프치고, 자녀들 해외 어학연수 보내면서 살았던 한때 치기 어리고 배불렀던 시절이 다 부질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누군가 방송에 나와서 말했던 걸로 기억된다. 잘 놀아야만 잘 산다고 했는데 이 말은 완전 거짓말처럼 들린다. 한때 후회없이 잘 놀았고 지금도 살풀이하듯 연신 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요즘 가장들의 슬픈 현실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해서 허무한 것만으로 채워진 것이 고달픈 인생살이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진짜로 재미를 찾아야 한다. 사업에서 실패하고 재취업과정이 견디기 힘들더라도 돈벌이보다는 재미라는 가치를 선택해야 한다.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눈 비비고 어떻게든 나만의 즐거움을 찾아내야 한다. 세상이 뒤집어지는 통쾌함을 주는 영화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작고 사소한 재미는 평생동안 살아가면서 유익함을 가져다 준다. 출근길 아침에 아파트 창가에서 울어대는 까치의 울음소리에 기뻐하고, 라디오에서 우연히 흘러나오는 바비 맥버린의 ‘돈 워리 비 해피’(Don't worry be happy) 팝송 노랫말에 감사하고, 주말에 뒷산을 산책하면서 떨어진 낙엽을 밟아가며 충실해진 내면에 만족하고, 주말 EBS 일요시네마에서 알리 맥그로우와 라이온 오닐이 출연한 ‘러브 스토리’ 영화를 눈물 흘려가며 감동할 수 있어야 한다.

진짜 행복한 사람은 자신만의 재미로 온전히 압축해서 사는 사람이다. 일상처럼 작고 사소한 것에서 본질을 찾고, 오감으로 흠뻑 즐기고, 적고 낮은 것에 기뻐하며, 내 이름을 불러줌에 있어 뜨거운 박수를 보내며, 방바닥에서 뒹굴며 동물처럼 본능의 소리를 질러대면서 그렇게 살아야 한다. 결과보단 일련의 과정에다가 후한 점수를 줘야 한다. 얼렁뚱땅 말고 똑부러지고 야무지게 제대로 놀 줄 알아야 한다. 그럴수록 완전하게 몰입할 수 있고, 절대로 후회가 남지 않는 법이다. 남은 인생살이 50년만이라도 흔해빠진 비슷비슷한 껍데기같은 삶을 당장 벗어 버려야 한다. 그래서 거치적거림 없이 당당하고 멋지게 살려고 할때 비로소 한판 잘 놀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나 역시 제대로 실천하지도 못하면서 이 칼럼을 쓰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생각마저 든다.

# 에스키모는 자기 내부에서 슬픔을 비롯해 걱정, 분노, 우울한 감정 등이 떠오를 때면 무작정 걷는다고 한다. 아픔이 가라앉고 걱정과 분노가 해소될 때까지 대책없이 걷기를 계속하다가 비로소 마음이 평정심을 찾을 때 드디어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간다고 한다. 그리고는 반환점에 막대기를 꽂아 둔다고 한다. 살면서 분노가 치올라서 걷기를 시작할 때 이전에 꽂아둔 막대기를 발견한다면 요즘 살기가 엄청 힘들어졌다는 의미이고 반면에, 막대기가 안 보인다면 그래도  견딜만한다는 뜻이라고 한단다. 잘 노는 것은 내 삶의 막대기를 꽂는 일이다. 내 안의 나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면서 평안함을 찾을 때까지 무작정 걸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렇다면 대청호 오백리길을 포함해서 나만의 올래길을 찾아 보는 것도 썩 괜찮은 생각일 듯 싶다.

초저녁인데도 가을 바람이 쌀쌀했다. 호두과자 두봉지를 집어들고 상가집을 향해 차에 올라탔다. 때마침 TBN 교통방송에서 사이먼 앤 카펑클의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Bridge over troubled water)라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잠깐동안 지금 이들과 멋지게 나이들어 유쾌하게 나중에 다시 만날 그날을 상상해봤다. 노랫말을 가만가만 음미하니 운전내내 감사했고, 살아있기 때문에 함께 만날 수 있어서 또 감사했고, 손꼽아 다시 만날 사람들을 챙겨준 오늘이 있었기에 다시한번 감사했던, 상가집 가는 슬픈 길이었다.

저작권자 © 디트NEWS24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