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훈의 공감소통] 방송인

카카오 톡에 표지된 내 상태메시지에는 ‘소불인즉난대모(小不忍則難大謨)’라고 쓰여 있다. 궁금함을 참지 못한 후배가 뜻을 묻기에 알려주었다. ‘작은 일을 참지 못하면 큰일을 그르친다’ 는 뜻이라고.

유방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고 한나라를 세운 대원수 ‘한신’의 젊은 시절 때 이야기다. 시장에서 큰 칼을 차고 있는 한신을 보고 불량배가 시비를 걸었다.

“야 이놈아. 그 주제에 무슨 칼을 차고 다니는 거야. 겉으로 보기에는 무사 같다만 속은 텅텅 비었겠지?”

구경꾼들이 모여들자 불량배는 더욱 신이 나서 말한다.

“이놈아 배짱이 있거든 그 칼을 뽑아서 나를 찔러봐. 그럴 배짱이 없거든 내 사타구니 밑으로 기어나가거라.”

그러자 한신은 그 불량배의 사타구니 밑으로 기어나간다. 충분히 상대를 이길 수 있었던 실력이었음에도 사소한 일로 큰일을 망칠 수 없다는 생각에 참은 것이다. 이 때문에 ‘소불인즉난대모’라는 말이 생겨난다.

아침 출근 길에 교차로에서 신호대기를 하고 있었다. 좌회전 신호가 떨어졌는데도 내 앞에 있던 차가 꾸물거린다. 저사람 때문에 이번 신호를 못 받겠는 걸. 우씨, 왜 저러는 거야. 아니나 다를까. 바로 내 앞에서 신호가 바뀌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앞차는 신호를 무시하고 건너간다. 그 차는 가고 나는 남겨졌다. 순간 약이 오르며 화가 났다.

신호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나는 지금 무엇 때문에 화가 난걸까? 촌각을 다툴 만큼의 급한 일이 있어서? 한번쯤 더 신호 기다리는 것이 억울해서? 아직도 세상 모든 일이 내게 유리하게만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거야? 바보 같으니라고.

심리학자들에 말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공격적인 성향이 있단다. 특히나 화가 치밀 때 생기는 공격성을 경계해야 한다고 충고까지 한다. 맞는 말이다. 왜? 내가 겪어 봤으니까.

방송을 오랫동안 한 덕분인지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 그래서 공공질서는 반드시 지켜야 하고 모범을 보여야 하는 불편함도 있다. 지역방송인도 이정도인데 인기 연예인들은 어떨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런데 이 때문에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잠시 한눈을 팔다 사고가 날 뻔 했던 적이 있다. 1차선에서 2차선으로 차선 변경을 하는 도중 옆에 있던 차량을 발견하지 못해서 생긴 내 실수였다. 다행히 사고는 면했지만 옆 차량운전자도 무척 놀란 것 같았다. 그래서 마구 경적을 울린다. 그것도 아주 길게. 화가 날만도 하지. 그래 네 마음 안다. 나 같아도 그랬을 거야. 그래도 사고는 나지 않았으니까 이쯤에서 용서해 줘. 사과의 의미로 비상등을 켜주었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 경적을 울리며 내차를 따라왔다. 저 사람 왜 저래? 좀 심한 거 아냐? 운전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잖아. 그 차가 쌍 라이트까지 켜고 나를 계속 쫒아오자 살짝 불안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중앙선을 넘어 나를 추월하더니 내차 앞에 멈춰 섰다. 이윽고 앞차의 운전석 문이 열리며 건장한 체구에 짧은 머리를 한 젊은 사내가 내린다. 순간 위압감이 들었다. 그는 내가 있는 쪽으로 어그적 어그적 걸어오며 험악하게 말한다.

“아따 무신 염병질을 헌다고 도망을 간다냐.”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큰일 났다.

“할 얘기가 있응께 밖으로 쪼까 나와 보소.” 그는 짙게 썬팅 된 내 유리창을 똑똑 내려친다.

“으메 낯짝 좀 쪼까 보자니까 그란다.” 거듭되는 그의 재촉 때문에 할 수없이 창문을 내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방심해서 실수를 했네요.” “으메 죄송하다고 허면 다여? 귀신 씬 나락 까 묵는 소리 허고 자빠졌네. 가만?” 내 얼굴을 빤히 보던 그가 갑자기 멈칫한다. 그러더니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 혹시 테레비에 나오는 분 그분 맞지라.” 내 얼굴을 알아본 것 같았다.  

“예. 맞습니다.” 내가 말하자 사내의 태도가 180도 바뀐다.  

“아따, 그 짝이 뜽금 없이 그래갔고 사고가 날 뻔 했구먼요.”

“옆에 계신 걸 못 봤어요. 정말 미안합니다.” 왠지 잘 풀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도 어색해진 분위기를 의식했는지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 했다. 한걸음을 옮기던 그가 마지막으로 짜증 섞인 말투를 던졌다.

“아니, 아실만한 분이 왜 그러세요?” 그러더니 자신의 차를 타고 붕 떠나버렸다. 아실만 하다니 뭘? 순간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마지막 말은 아마도 끓어오르는 자신의 화를 참지 못하고 건넨 일종의 푸념이었을 거다. 황당무계. 어이상실이다.

인간은 분노의 감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더니. 그 경우가 아니던가. 참아야 하는데 참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결과는 뻔하다. 상황은 악화되고 모든 손해는 자신에게 돌아온다. 어린 시절 이야기가 생각난다. 순간적인 화 때문에 생긴 트라우마(상처)다.

1978년. 초등학교 5학년 때 일이다. 그 당시 ‘로보트 태권브이’라는 만화영화는 우리시대 최고 중의 최고였다. 우는 아이도 울음을 그칠 정도였으니 지금의 ‘뽀로로’에 버금갔다고나 할까. 나와 어린동생은 이 ‘로보트 태권브이’ 3탄이 우리 동네에 있는 극장에서 개봉된다는 소식을 듣고 엄마를 졸랐다.

“엄마, 우리도 영화 구경 시켜주세요. 친구들은 전부 본다고 했단 말이 예요.” 어머니는 “안 된다”는 말만 되풀이 하셨다. 하루하루 목구멍에 풀칠하기도 빠듯한 살림이었는데 그럴 돈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때 옆에서 우릴 지켜보고 있던 큰형이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제가 내일 월급 받으니까요. 동생들 영화구경 시켜줄게요.” 와, 신난다. 나와 동생은 그 말을 듣고 너무나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다. 그 당시 고등학교에 다니던 큰 형은 학비를 보태기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신문배달을 했다. 그 월급으로 동생들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나보다. 영화를 본다는 생각에 밤잠도 설치며 빨리 아침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그토록 기다리던 날이다. 아침을 먹은 우리 삼형제는 극장으로 향했다. 일요일 오전이었는데도 평화극장 앞에는 이미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우리 형제들도 줄을 섰고 입장이 시작되었다. 이때 큰형에게 고민이 생긴다. 초등학교 1학년인 막내의 표를 살까 말까 하는 고민이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큰형은 결심 했다는 듯 동생에게 당부를 한다. 

“막내야, 표 받는 사람이 몇 학년이냐고 물으면 아직 학교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해야 된다. 알았지?”

고개를 끄떡이는 걸 보니 동생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것 같았다. 드디어 우리의 입장 차례. 표를 받던 검표원이 우리를 제지한다. 큰형이 건네준 두 장의 표 때문이다.
 “얘는 몇 학년 이예요?”

막내를 가리키며 묻자 큰형이 대답한다. “7살이라 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가지 않았어요.”

그때였다.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막내가 나서며 말한다. “저는 아직 빵 학년 이예요. 빵 학년…….” 동생의 말에 검표원은 뭔가를 알아챈 듯 살짝 웃는다.

“안 됩니다. 표를 한 장 더 가져오셔야 해요.” 걱정하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순간 큰형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직 학교에 안 들어갔다니까요. 학생도 아닌데 표를 왜 사야 합니까? 그냥 들여보내 주세요.” 큰형이 항변해도 검표원은 들은 체도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한쪽에 세워두고 뒤에 서있던 사람들부터 입장시키기 시작했다. 마음이 다급해진 큰 형은 검표원에게 계속 사정을 해댔다. 그러자 검표원은 짜증이 났는지 큰형에게 소리쳤다.

“야, 너 왜 자꾸 거짓말을 하는 거야? 표를 한 장 더 가져와야 된다고 말했잖아. 돈이 없어서 그래? 돈 없으면 그냥 꺼져.”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말이다. 큰형이 검표원을 노려봤다. 

“어쭈? 네가 노려보면 어쩔 건데?” 무시하는 투가 역력하다. 그러자 큰형은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안 들어가면 될 거 아녜요.”

그러더니 들고 있던 극장표를 쫙, 하고 찢어버리는 게 아닌가? 형, 그걸 찢으면 어떻게 해. 그와 동시에 꾹 참고 있던 동생의 울음이 터졌다. 막내는 극장이 떠나가도록 꺼이꺼이 울어댔다. 그러자 내 눈에서도 눈물이 뚝, 하고 떨어진다. 고개를 푹 숙이고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생각했다. 친구들에게 우리 큰형이 영화 보여준다고 엄청 자랑했었는데……. 극장 앞에 서있던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며 안으로 들어갔고 우리 삼형제는 그냥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동생에게 모든 사정을 들은 어머니는 들릴 듯 말 듯 한숨만 내쉬었다.

건강보호 심사평가원에서 분석한 최근 5년간(2010~2014년)의 자료에 의하면 ‘성인 인격 및 행동장애’로 인해 한해 평균 1만 3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병원을 찾는다고 나와 있다. 이들 환자들 중에는 남자가 여자보다 두 배나 많고 20대의 젊은 남성이 증가하는 추세란다. ‘성인 인격 및 행동 장애’는 정신질환의 일종인데 평소에 ‘욱!’하는 습관이 있거나 지나치게 의심하는 성향이 있다면 이를 의심해봐야 한단다.

불교에서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말라’는 말이 생각난다. 화가 나면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첫 번째 화살이요. 그 행동으로 인해 자신은 물론이고 타인을 해치거나 피해를 입히는 것이 두 번째 화살이다. 만약, 이 순간에도 화가 치밀어 오를 때는 이 말을 명심하시길.

‘작은 일을 참지 못하면 큰일을 망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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