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용 칼럼] 고교 평준화의 그늘에서 ‘서글픈 변신’

김학용 주필

국제고는 국제 관계의 전문성을 갖춘 인재 양성을 목표로 하는 특수목적고, 이른바 특목고다. 국제법 등 해외 생활에 필요한 과목을 집중적으로 가르친다. 국어와 국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과목은 영어로 진행된다.

대전고가 이런 국제학교로 바뀔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대전고는 시교육청을 통해 교육부에 총정원 600명의 국제고로 바꾸겠다는 신청서를 냈다. 교육부는 정원 480명을 조건(현재 정원의 38% 수준)으로 승인할 수 있다는 뜻을 전해왔다. 대전고가 허가 조건을 수용하면 국제고로 전환될 수 있는 상황이다.

교육부, ‘대전고 국제고 전환’ 480명 조건으로 허가

대전고는 학부모와 동문회에도 찬성 의견을 얻었다고 밝히고 있으나, 국제고 전환 내용을 잘 모르고 있던 동문들 사이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일부 동문들은 시민들과 함께 국제고 전환 반대 투쟁을 시작했다. 동문회 동의 절차에도 문제가 많다며 동문회 개최를 요구해놓고 있다.

국제고 전환 논란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대전고가 국제고로 바뀌어도 대전고의 정체성이 유지될 수 있을 것이냐의 문제다. 국제고 전환을 주도하고 있는 학교 측은 국제고로 바뀌어도 대전고의 교명은 물론 교가, 교훈도 유지된다며 동문들을 설득하고 있다.

특히 교명이 ‘대전 국제고’ ‘국제학교 대전고’ 등으로 바뀔 수 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새로운 100년을 여는 국제고’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교명은 지금처럼 ‘대전고’를 유지한다는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전고’ 교명 100% 유지돼도 정체성 유지 의문

교명이 100% 유지된다고 해도 정체성이 유지될지는 의문이다. 학생과 교사는 물론 교육의 목표와 교육 방식까지 바뀌는 데도 학교의 정체성이 유지된다는 보장이 있을까? 지금 대전고는 ‘보통 중학생들’이 입학하는 ‘일반고’다. 국제고가 되면 이런 학생들의 입학은 훨씬 어려워진다. 

명문대 진학률은 높아질 것이고 외국 대학으로 진학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야말로 글로벌 인재를 육성하는 학교다. 지금 정원의 40%에도 못 미치는 학생들은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영어로 공부하고 해외연수를 다니며 고교 시절부터 국제 감각을 익힐 수 있다.

현실적으론 어느 수준이 될지는 몰라도 국제고의 목표는 이런 학교다. ‘선택받은 학생들’의 학교다. 공부 좀 하는 부자집 아이들이 주로 다니는 학교일 수밖에 없다. 남녀 공학이기 때문에, ‘여학생 강세’를 감안하면 여학생 비율이 많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학교가 전통의 ‘대전고’로 남을 수 있을까? ‘대전고의 정체성’가 유지된다는 보장은 없다.

둘째는 국제고 전환이 대전 지역 사회에 미치는 문제다. 국제고 전환 반대론자들은 국제고는 전국적으로 모집하기 때문에(국제고가 있는 지역은 제외) 지역 학생들의 입학 기회를 박탈하는 결과가 된다고 말한다. 주인을 내쫓고 외지인에게 대전의 교육 자산을 내주는 꼴이라는 주장이다.

찬성론자들은 대전에 일반고가 30여개나 되기 때문에 대전고 한 곳이 특목고로 전환된다고 해서 교육권이 박탈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반박한다. 대전고가 과거에 비해 쇠락한 건 사실이지만 여전히 대전의 대표적인 고등학교 가운데 하나임은 분명하다. 특히 동구와 중구 주민들에겐 상징성이 큰 학교다. 그들의 자녀가 갈 수 있는 대전고가 국제고로 바뀐다면 당혹스러워할 부모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우수학생 모집 기대” vs “그런 기대는 환상”

대전고가 국제고 전환을 추진하는 이유는 우수한 인재를 학교 스스로 뽑을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대전 지역은 물론 전국적으로 우수한 학생들을 모집해서 가르침으로서 명문고로 다시 도약해보자는 것이다. 반대론자들의 생각은 다르다. 대전에도 이미 과학고 2곳과 외고가 있기 때문에 국제고 수요는 그리 많지 않다고 본다. 국제고로 바꾸면 우수인재가 몰려 올 것이라는 기대는 환상이라고 말한다.

국제고 찬성론자들은 ‘인재의 대전 유출’을 줄일 수 있다는 점도 강조한다. “대전이 평준화되면서 우수한 인재 가운데는 충남이나 전북 등 타시도로 진학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다”며 “국제고 전환은 이들이 고향을 떠나지 않도록 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대전고의 국제고 전환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장담할 수 없다. 우수한 인재 확보에 성공한다고 해도 부자집 자녀들만 주로 다니는 ‘귀족학교’가 되고 만다면 진정한 성공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과거 대전고는 지방 명문이었지만 그런 학교는 아니었다.

대전고의 국제고 전환은 위험한 도박이다. 자신의 ‘이름’을 유지한다고 해도 몸체는 물론 정신까지 바꾸는 대수술과 같다. 그렇게 되면 그는 자신이 아니라 남이다. 자신과 이름만 같은 타인일 뿐이다. 국제고 전환은 또 하나의 특목고만 만들고 정작 자신은 죽이는 자살 행위가 될 수 있다.

'보통 학생의 일반고' 죽이는 어설픈 고교 평준화 정책

대전고가 ‘위험한 길’을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고교 평준화의 그늘이 심화되고 있는 탓이다. 고교 평준화는 청소년들을 입시지옥에서 구하고 누구나 평등하게 교육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도입됐으나 언제부턴가 ‘평준화 역행 현상’이 지속돼 왔다.

정부가 외고나 과학고 같은 특목고 신설을 남발하고 자사고 제도까지 도입하면서 고교 평준화 정책은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지금은 소위 상위권 학생들이 가는 학교가 따로 있고, 그 아래 보통 학생들이 가는 학교가 따로 있다. ‘상위권 학생은 빠진 평준화’ 시대가 되었다. 또 다른 ‘하향 평준화’인 셈이다.

대전고 교정

일반고에선 우수한 학생을 찾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어떤 일반고 교사는 “특목고와 자사고에서 상위권을 다 빼가면서 수업 시간에 질문을 해도 답을 하는 아이가 없어졌다”며 “일반고는 교사도 학생도 더 힘든 수업이 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일반고는 사립이든 공립이든 기회만 있으면 이런 ‘하향 평준화된 학교’에서 탈출하려 한다. 서울이든 지방이든 자사고(자립형 사립고) 지정 논란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근본 원인이다.

외고와 과학고가 많이 생겼는 데도 다들 법대와 의대로만 몰리고 공대나 이과대 문앞은 썰렁하다. 판검사나 의사가 되겠다는 학생들만 넘친다. 특목고는 거의 명문대 진학을 위한 입시명문일 뿐이다.  ‘특수 목적’을 수행하지 못하면서 보통학생들의 학교인 ‘일반고’만 하향 평준화해서 고사시키고 있다.

“대전고, 고교 평준화의 그늘에서 거부할 수 없는 서글픈 변신”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또 다른 특목고인 국제고를 만들어내고 있다. 전국 시도에 한 개씩 나눠주고 있다. 대전에도 TO가 배정됐고, 대전고가 이를 움켜잡은 것이다. “지금의 입시제도와 대전고의 현실을 고려하면 국제고 전환은 거부할 수 없는 서글픈 변신”이라고 한 국제고 찬성론자는 말한다.

때문에 찬성론을 펴는 사람들도 이런 선택을 떳떳하게 여기지는 못한다. 국제고는 정부가 배분해주는 ‘신흥 명문 티켓’에 다름 아니고, 학생과 학교 스스로가 성취하는 명문학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교육부의 ‘은혜’로 새로 태어나는 신흥 명문일 뿐이니 그리 자랑할 일은 못 된다. 그러면서도 자기 스스로도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다. 그런데도 대전고는 그 길을 가려고 한다. 어설픈 고교 평준화가 낳고 있는 씁쓸한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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