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용 칼럼] ‘지역 언론의 마지막 보루’ 사라지는 중

김학용 주필
작년 선거에서 만일 새누리당의 박성효 후보가 시장에 당선되어 권선택 시장과 똑같은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다면 시민단체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2006년 9월 이완구 지사가 선거법 재판을 받을 때 대전참여연대가 보인 반응을 보면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이 지사가 밥값을 낸 죄로 1심에서 벌금 150만원의 당선무효형을 선고받자, 대전참여연대는 다음과 같은 논평을 냈다.

“이번 법원의 판결은 깨끗한 선거문화를 조성하기 위한 공직선거법의 취지대로 판결한 것으로 보여진다. … 행정공백 및 지역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법원은 조속한 시일 내에 공직선거법 위반건에 대해 엄중 처리해 줄 것을 요청한다. 아울러 당사자인 도지사 또한 혐의사실에 대해 당당한 태도로 재판에 임해 주기를 기대한다.”

권선택 시장 재판에 한마디 말도 없는 시민단체

권 시장이 불법선거운동 혐의로 기소돼 여러 명이 구속되고 1심에서 수십 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권 시장 캠프의 간부는 수사가 시작되자 도주했다가 얼마 전에야 나타났다. 권 시장 자신과 회계책임자는 징역형까지 받고 2심에서 다투는 중이다. 사건이 시작된 지 벌써 10개월째다. 권 시장의 사과를 요구하든 검찰 수사의 문제점을 비판하든 평가는 나와야 정상이다. 시민단체들은 가장 중대한 지역 현안에 한마디 말이 없다.

작년 가을, 새누리당의 한 사람은 “만일 박성효 후보가 당선돼 재판을 받았다면 시민단체들 때문에 시장을 할 수 없을 지경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나도 언뜻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요즘은 그게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박 시장도 ‘시민단체에 하기 나름’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자꾸 든다.

참여연대 등 대표적인 시민단체는 아무래도 보수 정당 쪽보다는 진보적인 정당과 코드가 맞는 편이다. 한나라당(새누리당) 이완구 지사에 대한 시민단체의 엄중한 비판은 자연스런 것이다. 새누리당 ‘박 시장 재판’을 가정해도 같은 반응이 예상된다. 지금 새정치연합의 권 시장 재판에 대한 시민단체의 침묵도 이상할 게 없다.

대전 시민단체, 몇년 전부터 지방권력 감시 기능 크게 약화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다. 그게 더 심각한 문제다. 최근 몇 년간 대전지역 시민단체들한테서 나타나는 ‘권력감시 약화 현상’은 정당에 대한 우호도나, 정책의 진보성 여부와도 무관하게 나타나고 있다. 전임 염홍철 시장은 선진당을 거쳐 새누리당 소속 시장으로 있다가 그만둔 사람이다. 내가 보기엔, 민선5기 염 시장 때부터 시민단체의 지방권력 감시가 현저하게 약화되었다. 이후 도시철도2호선 문제를 빼놓고는 거의 모든 문제에서 시민단체의 목소리는 사라져가고 있다.

자원순환단지나 유성복합터미널 등 2000~3000억 원 규모의 대형사업들이 상식을 벗어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사업계약을 맺어, 온갖 소문이 나도는 데도 시민단체는 논평이 없었다. 최근 드러난 현대 아웃렛을 위한 ‘초법적인 용도변경’은 지역경제 문제를 넘어 감시받아야 할 자치행정의 문제임이 분명한 데도 참여연대는 입을 닫고 있다. 전임 ‘보수당 시장’에 이어 후임 ‘진보당 시장’에서도 시민단체의 권력 감시 쇠퇴 현상은 계속되고 있다.

지역에서 시민단체가 주로 감시야 할 곳은 시도지사와 법원 검찰 같은 사법부 권력이다. 그 중에서도 지방권력의 핵심인 시도지사는 시도민의 삶과 미래에 엄청난 영향을 주는 자리로 최우선 감시 대상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감시 대상에서 정작 대전시장은 빠지고, 시의회나 구의회 같은 변두리 권력 위주로 감시의 타깃이 바뀌었다.

권선택 시장의 엉터리 인사가 거듭되고 있는 데도 시민단체는 침묵하고 있다. 대전시 인사 문제는 권 시장을 먼저 비판해야 맞는데 엉뚱하게도 인사청문회를 하는 시의회만 꼬집는다. 시장은 봐주고자 하는 모습이 역력해 보인다. 시민단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결국 대전시장 품으로 들어가는 시민단체

돈 문제다. 시장한테 ‘도에 지나치게’ 기대면서 생기는 일이다. 전임 염홍철 시장은 민선5기 시장이 되기 전 참여연대를 ‘적극적으로’ 후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민단체 내부에선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정치인의 과도한 후원은 오히려 독이 된다는 걱정이었다. 결국 그가 나중 다시 시장이 되면서부터 시민단체의 지방권력 감시 기능은 크게 둔해졌다.

후임인 권 시장도 공약까지 내걸고 시민단체에 대한 대우를 약속했다. 시장이 돼선 ‘NGO지원센터 조례’를 만들고, 최근 관련 예산을 편성해서 시의회를 통과시켰다. 시민단체 출신이 NGO지원센터의 장을 맡을 것으로 보인다. NGO지원센터는 대전시의 산하 기관과 다름없다. 대전시장이 주는 돈으로 조직을 운영하고 월급도 받는다.

시민단체가 시장 품으로 들어간다면 시민단체의 살림은 나아지겠지만 시민단체의 권력 감시 기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누구든 자신에게 돈을 주는 사람을 제대로 감시할 수는 없다. 어떤 기묘한 이론을 갖다 대더라도 이는 부정할 수 없는 건 만고의 이치다. 대전의 시민단체들이 지금 지방권력에 대해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거기 있다.

지난 4월 열린 대전NGO지원센터 설립방안 모색을 위한 토론회 모습.
지역 언론의 ‘마지막 보루’ 사라져… 지방권력 더 썩고 병들어 갈 것

지역 시민단체의 죽음은 심각한 문제다. 지방언론의 위축을 의미한다. 지방에도 언론사는 많아도 언론은 거의 없다. 지방언론이 어려워지면서 시민단체가 지방권력 감시자의 역할을 했다. 시민단체가 사라지면 지방언론이 사라지는 것이다.

어느 사회든 언론이 위축되면 썩고 병들게 돼 있다. 대전은 시민단체 역할이 약화되면서 이미 그런 과정을 밟고 있다. 대전시장이 갑천 옆에 인공호수를 만들기 위해 갑천고속화도로를 통째로 들어내는 중대한 도시계획변경을 시민들 몰래 진행하고, 2000억 원대 대기업 특혜를 위한 불법적 용도변경이 아무렇지도 않게 추진되는 곳이 대전이다.

그런데도 지역언론의 마지막 보루였던 시민단체마저 침묵하고 있다. 시민단체가 과거처럼 이런 일이 드러날 때마다 들고 일어났다면 시장이 시민들을 깔보는 행정을 함부로 하지는 못할 것이다. 시장은 지방언론은 물론이고 이젠 시민단체까지 제역할을 못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이런 오만한 행정을 펼치는 것 아닌가?

과거 시민단체의 노력이 없었다면 ‘갑천우안도로’가 났을 지도 모른다. 도솔산과 갑천의 환경파괴가 벌써 심각하게 진행됐을 수도 있다. 이를 막아낸 1등공신은 환경단체다. 그러나 지금 도솔산이 다시 위험에 처해 있다. 대전시는 호수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작년 시민들 몰래 도솔산을 희생시키는 쪽으로 도로계획을 변경했다.

그런데도 유력한 시민단체들조차 침묵하고 있다. “도솔산 도로 계획을 살린 건 맞지만 우린 도솔산 도로를 낼 생각이 없다”는 대전시의 말을 믿어보자는 게 시민단체의 반응이라고 한다. 이제 시민단체 관계자의 말과 공무원의 말을 구분할 수 없게 됐다. 

시민단체 가는 길 막을 수 없으나 대안 찾아야

우리는 그동안 시민단체에게 많은 빚을 졌다. 시민과 지방언론을 대신해서 지방권력을 감시하고 환경을 지켜왔다. 가난을 달고 살던 시민운동가들의 희생 덕분이다. 그들에게 그런 헌신과 희생을 계속 강요하기는 어렵다는 게 문제다.

그래도 시민단체 내부에서조차 걱정은 많다. 한 시민단체 출신 관계자는 “시민단체가 시장의 품으로 들어가면 시민단체의 본래 기능인 권력 감시가 어렵다”며 “어렵더라도 시민단체는 독립적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시민단체가 시장의 지원을 받으면 정작 시민의 후원은 오히려 끊길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시민단체가 아니라 관변단체다. 관변단체를 자기 돈으로 후원하는 시민은 아직 못 봤다. 지금 시민단체는 아주 위험한 길을 가고 있다. 죽음의 길을 가고 있다.

누구도 이를 막을 수는 없다. 그들에게 희생을 강요할 명분은 없다. 다만 지역언론의 ‘마지막 보루’마저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 큰 걱정이다. 민선 자치단체장들은 이제 더욱더 거리낌 없이 권력을 휘두르고, 지역은 더 부패하고 망가져 갈 것이다. 지방언론을 되살리는 방법을 강구하든 독립적인 시민단체를 새로 만들든, 시민단체 역할을 대신할 그 무엇을 찾아야 한다.

저작권자 © 디트NEWS24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