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업인(20)] 이텍산업, 국내 특장차 시장의 70% 점유 ‘독보적’

대만인 사업가 통해 경영의 길 들어서…평생의 ‘비즈니스 파더(father)’
국내 특수장비차량 시장 점유 70% ‘독보적’…신사업 창출 본격 검토 착수
공장 건물·작업복도 미적 감각 추구 ‘감성’ 경영과 그릇 키우는 ‘나눔’ 경영
 

국내 특수장비차량(이하 특장차)의 70%를 점유하고 있는 이텍산업㈜. 20여년 만에 국내 특장차 시장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오른 소위 ‘잘 나가는’ 향토기업이다.

이텍산업을 이끌고 있는 이두식 회장(56). 1994년 사무실도 없이 집에서 달랑 컴퓨터 한 대로 사업을 시작한 그다.

성공 밑바탕에는 ‘감성경영’과 ‘도전정신’이 배여 있다. 그는 “감각 또는 감성적으로 느끼는 대로 일을 추진하는 경향이 많은데, 틀린 적이 거의 없다”고 했다. 추상화와 추진력, 이를 경영에 접목한 ‘감성’이 오늘의 ‘나’를 이끌었다는 이 회장은 “내가 가진 ‘감성 DNA’가 최고의 무기”라고 했다.

이텍산업은 올해 회사 설립 21년째. 계열사인 이텍티디에이㈜와 이텍네트웍스㈜ 등 세 회사를 모두 포함해 1100억원의 매출(2014년)에 직원 수도 250여명으로 늘어났다. 이텍산업의 매출액은 800억원 정도.

처음 잡은 인터뷰 일정을 수차례 연기했다가 만나야 할 만큼 바쁜 나날을 보내는 이 회장을 최근 사무실에서 만났다.

이텍산업, 국내 특장차 시장서 단연 ‘독보적’

국내 최초로 살포기나 제설기 등 제설장비를 국산화한 기업. 다목적 도로관리차를 비롯해 노면청소차, 도로분진흡입차량 등 60여종의 차량과 특수장비를 생산한다.

이텍산업은 제설장비 및 특장차 전문생산업체다. 특장차는 물건을 실어 나르는 화물차를 제외한 모든 차량을 말한다. 거리청소차부터 하수구준설차, 터널청소차, 궤도교량점검차, 크레인차, 제설장비차 등등. 

국산 신기술로 이 분야 국내 시장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시장 점유율은 물론 무서운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다. 회사 설립 초기부터 20여년 간 축적된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수입 장비의 국산화 및 신제품 개발에 올인 한 결과다.

과거 수년 간 해마다 30% 가까운 성장세를 보이며 어느새 기업도 덩치가 커졌다. 최근 활주로제설차를 국산화해 국내 공항 및 미군 등에 공급하고 있다. 4륜·6륜 구동장치 및 군경용 특수장비도 개발해 수출한다.

 

사실 특장차 분야라면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분야다. 대부분 “수입해 쓰지 않느냐”는 반응들이 많지만 이를 철저히 국산화해 알짜 기업으로 키운 그다. ‘외산 장비의 국산화’라는 모토를 내걸고 끊임없이 투자 해 낳은 결과다.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에서 사업을 하면 실패할 확률이 그만큼 줄어든다고 확신한다’는 그 역시 한 우물을 판 의지의 기업인이다.

무역회사 다니다 대만인 사업가 만나 경영의 길로

이 회장은 홍익대 영문과를 나왔다. 졸업 후 학과 특성을 살려 외국인 회사에 취직해 3년 정도 근무했다. 다시 특장차와 관련한 국내 K기업으로 이직을 했다. 당시 국내서 꽤 잘 나가던 특장차량 제조업체였다. 여기서 6년간 해외사업과장으로 근무했다. 특장차 분야의 길을 걷게 되는 동기 부여가 된 회사다.

그는 K사에서 해외 바이어들과 만나 국내에서 제조한 특장차를 수출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동남아와 중국, 미국, 유럽 등 안 다닌 곳이 없을 정도다. 견문도, 해외 인맥도, 넓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창업을 하게 된 직접적인 인연을 만나게 된다. K사에 근무할 당시 한 대만인 사업가가 자국 내 철도 보수용 기관차량인 소위 모타가를 한국에서 제조할 수 있는지 문의해 왔다.

국내 시장을 아무리 조사해 봐도 이를 제조할 만한 기업이 없었다. 3개 업체 정도 있으나 이마저도 대만 사업가의 요청을 수용할 만큼의 기술력을 갖추고 있지 못한데다 그 업체들 역시 관심도 없었다. 

이 회장은 “당시 우리나라에선 수출할 능력을 갖춘 업체들이 없다고 회신했더니, 대만 사업가가 한국에 와서 같이 시장 견학을 해 보자고 제의를 했다”고 말했다.

그는 곧바로 대만 사업가와 3일간 국내 시장을 조사하고 다녔다. 그럼에도 역시 답을 찾지 못했다. 기술력을 갖춘 업체들이 국내에는 없다고 두 사람은 결론을 내렸다.

대만 사업가가 한국을 떠나기 전날, 이 회장은 본인 집으로 그를 저녁식사 자리에 초대했다. 이 때 이 사업가가 이 회장에게 사업을 제의하게 된다. ‘평생 사업을 한 사람의 시각으로 볼 때 당신(이 회장)이 사업을 하면 잘 할 것 같다’는 칭찬과 함께.

당시 이 대만인 사업가는 이 회장에게 “‘자기가 밀어줄테니, 이를 승낙하면 자신이 신용증을 써 주겠다’며 적극적이었다”고 했다.

동분서주 ‘영업맨’으로 사업 본격화

며칠 간 고민하던 이 회장은 사업에 뛰어들기로 마음먹고 1994년 무역업 사업자등록을 냈다. 36살 때다. 사무실 구할 형편이 못돼 자택에다 전화기와 팩스 등을 놓고 초라하게 시작했다. 본인 퇴직금에다 아버지가 일부 금액을 빌려주고 보증을 서는 식이었다.

1990년대 초중반, 무일푼인 사람이 은행에서 돈을 빌린 다는 것이 지극히 어려운 현실. 하지만 이 회장은 대만인 사업가가 써 준 신용장만으로 무담보로 자금을 융통해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여기다 당시 국내에선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펴던 시절. 대만인 사업가가 써 준 당시 신용장은 이 회장에게 엄청난 자산이었다.

회사 이름도 대만인이 제의해 지은 ‘이가((李家, leega), 중국명 이기(李技))상사’였다. 이름의 앞 글자 성을 따 기업명을 짓는 중국인의 특성이 반영된 것.

이 회장은 “당시 대만인 사업가는 내가 직장생활을 하던 30세 때 만나 창업의 기회를 준 분”이라며 “나에겐 ‘비즈니스 파더(father)’인 셈”이라고 했다.

이 회장은 제조 능력이 없어 해외 바이어들과 접촉해 물량을 따낸 뒤 수주 받은 곳에 납품하는 형태로 사업을 해 나갔다. 특장차 분야에서 영업으로 사업을 시작한 것. 그는 지금도 ‘영업맨’임을 자청하며 전국을 무대로 바쁘게 다닌다.

당연히 시행착오도 많았다. 이 회장은 1994년 창업 후 6개월 만에 대만에 수출할 물량을 따냈다. 하지만 대만에 수출해야 할 차량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국내 철도차량과 대만 철도, 즉 양국의 궤도 시그널(신호) 체계가 달라 납기일을 맞출 수 없었다.

이 회장은 국내에서 반조립 상태의 상품(차량)은 물론 용접기와 자재 등을 대만으로 가져간 뒤 현지에서 직접 해당 시스템에 맞게 조립했다. 이 과정에서 이 대만인 사업가는 납기일을 연장할 수 있도록 대만 정부기관에 협조를 요청하는 등 사업적으로 많은 지원을 했다.

이 회장은 여전히 “(대만인 사업가를) 아버지 같은 분”이라고 말한다. 그와는 자주 전화통화하며 안부를 묻는 등 꾸준히 연락하는 사이다. 이 대만인 사업가는 지금도 현지에서 자식들을 곁에서 도와주며 대만 F기업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996~1997년 외환위기 시절 환차손에 따른 40억원의 현금 손실이 났을 때는 사업적으로 가장 큰 위기였다. 위기일 때가 또 다른 기회일 수도 있는 법. 이 회장은 고통을 감수하며 국내와 일부 해외 수출 등의 물량을 따 내며 막대한 손실 자금을 메워 나갔다. 

돈 버는 일보다 경영에 ‘감성을 얹히는 일’ 중요

이 회장은 대학 재학 시절부터 사업에 대한 열망이 컸다고 한다. 당시엔 사업 할 방법도 몰랐고, 계기도 없었다. 그럼에도 사업을 할 수 있는 ‘감성 DNA’가 있어 가능했다고 말한다.

29세 때부터 해외 출장을 다니며 ‘내가 사업을 한다면 어떤 식으로 할 것’이라는 등 뚜렷한 경영의 자세를 남 보다 일찍 깨달았던 셈.

이 회장은 매출액이 100억원을 넘으면서 회사 이름을 ‘이가상사’에서 지금의 ‘이텍산업’으로 바꿨다. 2000년 법인으로 전환하면서다.

그는 수많은 해외 출장 경험을 토대로 공장 건물 하나 짓는 데도 미적 감각을 추구한다. 오는 10월이면 본사와 공장 등을 이전할 세종시 공장이 완공된다. 19만600여㎡ 부지에 본사와 특장차 관련 국내 최대 규모의 공장을 신축하고 있다. 이곳 역시 이 회장이 각별히 신경을 써 타일 하나, 벽지 하나에도 신경을 쓴다.  

이 회장은 “공장 하면 통상 칙칙한 건물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이태리 등지를 가보면 30~50년 된 스토리와 역사가 있는 공장들이 많다”며 “세종공장은 멋스럽고 스토리가 있는 건물로 만들 예정”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세종시를 방문하는 외국인이나 공무원들의 견학코스가 되도록 하고 싶다”고도 했다.

현재 대전 유성구 테크노밸리첨단복합산업단지 내 있는 공장 역시 이 회장이 2000년 법인 전환해 오픈할 당시 공장 외벽을 초콜릿 색깔로 입히자고 제안하는 등 손수 설계하고 만들었다. 남들이 ‘특장차 회사가 너무 호사스럽다’고 평할 때 이 회장은 다른(감성) 개념으로 접근했다. 

그는 “기업가라면 돈을 번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감성을 실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경영에 ‘감성의 옷’을 입혀 온 것.

경영에 인문학적 감성이 접목된 그의 ‘DNA’가 자체 발광한 것만은 아니다. 유학자이자 서예가로 성균관 부관장을 역임한 부친 이병섭씨의 가풍을 받은 영향도 크다고. 물론 영문학도였던 이 회장 자신의 개성도 작용했다.

그래서 그는 세종시로 본사와 공장을 이전하면서 근로자 작업복도 ‘멋’을 추구하는 쪽으로 전면 바꿀 계획이다. 특수한 분야인 ‘특장차 산업’이라는 자산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발전시키는 탁월한 경영 능력과 리더십을 엿볼 수 있다.

본인의 그릇을 키우는 방법은 ‘나눔’

‘나눔’은 기업의 사회적 환원으로 늘 관심의 대상이다. 기업가들에겐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 회장은 나름 독특한 시각을 갖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 정해진 성품과 기질, 그릇, 크기가 있다는 것. 그래서 작은 그릇에 큰 걸 담으려 하면 넘치기 마련이며 소용이 없다는 것.

하지만 그 그릇을, 크기를 키우는 방법은 나눔·환원 밖에 없다고 했다. 불교 신자인 이 회장은 이를 ‘보시’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그는 “그릇을 키우려면 보시밖에 없으며, 나누고 베풀면 종지가 대접이 되고 자기의 크기를 키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그는 현재 대전 구암사 신도회장을 맡고 있다)

제2의 먹거리 찾아 신사업 진출 본격 착수

국내 특장차 시장은 이미 경쟁이 치열한데다 어느 정도 한계점에 도달하고 있다는 게 이 회장의 판단. 그래서 신사업 진출을 검토하고 있다. 특장차라는 태생적 분야에서 버릴 건 과감히 버리고, 유지할 건 유지하면서 새로운 시장에 진출하겠다는 방침.  

이미 3년째 진행 중이다. 방산 시장에 진출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 오는 2017년쯤이면 조금씩 제품도 양산할 예정. 특장차는 주로 주문 생산으로 이뤄진다. 하지만 이를 양산체제로 바꾸는, 기업의 기본 프레임을 바꾸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여기다 대기업과 컨소시엄을 구축해 수출시장에 본격 진출할 계획. 앞서 수출을 하고 있지만 특장차가 대부분. 수출 범위를 확대하겠다는 구상이다.

2023년 이택산업의 목표는 ‘매출액 6000억원’, ‘고용 1000명’ 달성이다.     

그에 앞서 우선 올해 수출을 다변화할 계획. 수출 전진기지인 중국 허난성의 합자회사인 원동대방도로유한공사를 비롯해 북유럽사무소(체코), 남아메리카 중부지역(페루)사무소 등을 통해 중국, 대만, 홍콩, 베트남, 몽골 등 동남아 시장과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 러시아, CIS 등에 진출 및 시장을 확대할 예정이다. 기동형 취사차량, 전차운송트럭, 독립현가트럭, 방탄차량 등 방위산업 부문에 주력해 올해 3000만 달러를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이 회장은 “경영이란 것은 끊임없는 도전과 실패의 반복 등 희생과 고통 없이 이룰 수 없는 시행착오의 연속”이라며 “성공의 차이는 있겠지만 도전과 실패를 극복하다보면 더 큰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고 했다.

 

[이두식 이텍산업 회장 약력]

-1959년 경기도 파주
-홍익대 영문과 졸, 충남대 평화안보대학원 제1기 최고위평화안보정책과정 및 제1기 최고위사회안보정책과정 수료
-1994년 이텍산업(이가상사) 설립, 2000년 법인 전환
-정부조달우수제품협회 회장(2013.2~)
-대전지방검찰청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이사장(2012.8~)
-대전상공회의소 부회장(2012.3~)
-대전충남경영자총협회 부회장(2008.3~)
-중소기업융합 대전세종충남연합회 부회장(2008.1~)
-대전지방국세청 세정자문위원(2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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