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업인(18)] 오성철강㈜ 회장의 ‘쇠’와 함께 한 인생

‘철은 사람 배반하지 않아… 사람이 철을 배반할 뿐’ 인생 철학
인생 멘토는 동국제강 고 장상태 명예회장, ‘철과의 의리’ 배워
성공 비결 ‘의리·신뢰·경청·비움’… 메모 습관도 ‘작은 즐거움’

 

‘철(鐵)은 절대 사람을 배반하지 않는다. 사람이 (철을 통해 돈을 벌어) 철을 배반할 뿐이다. 예쁜 와인잔을 다루듯이 애정을 갖고 철을 다루며 사랑하라.’

2000년 작고한 동국제강 고(故) 장상태 명예회장의 가르침이다. 철과 함께 하는 한 의리를 지키며 명예욕을 버린 삶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는 유재욱(66) 오성철강㈜ 회장. 그는 지금도 사업은 물론 인생의 멘토로서 주저 없이 장상태 회장을 꼽는다.

오성철강㈜은 2009년 매출액 800억 원을 넘어선 데 이어 지난해 1000억 원을 달성했다. 계열사인 두성철강산업㈜까지 포함하면 1200억 원이 넘는다. 42년, 오로지 철근 물류유통이라는 외길을 걸어왔다. 철근과 관련한 물류, 보관, 하치 작업을 모두 담당하는 기업으로 중부권에선 유일하며 전국적으로도 5위권이다.

지역서 중견·대기업 성장 발전하는 기업 나오길 

지난달 30일 대전 읍내동 오성철강 본사 회장 집무실에 만났을 때 유 회장은 자리에 앉자마자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강조했다. 나무가 크면 사람들에게 큰 그늘을 만들어 주듯이 기업도 연륜이 쌓이고 성장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큰 혜택을 준다고 했다.

그러면서 라이온켐텍, 진합 등 지역 향토기업을 예로 들었다. 국내 대기업과 겨루며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며 흐뭇하단다. 유 회장은 “박희원 라이온켐텍 회장과는 같은 해 태어났는데, 박 회장과 만날 때마다 자신이 3개월 빠르다는 이유로 ‘내가 형’이라고 우긴다”며 웃었다.(박 회장은 4월, 유 회장은 7월생이다.)

 

박 회장과는 오랜 절친이면서 공통된 구석이 많다. 동갑내기에다 기업 경영 역사도 40여년으로 비슷하다. 글로벌 인재 육성을 외치며, 기업 이익의 사회적 환원에 관심이 많은 것도 그렇다.

유 회장은 박 회장이 지난 3월 대전상공회의소 회장에 취임한 데 대해서도 관심을 보였다. 박 회장의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성향을 잘 알고 있는 터라 앞으로 기대가 크다고 했다. 유 회장 역시 대전상의 부회장을 맡고 있다.

영화 ‘국제시장’ 보고 눈물…피난 시절 낙동강 구포다리 밑 피난촌 생활 떠올라

한국전쟁이 나기 1년 전 서울에서 태어난 유 회장은 전쟁 발발 이후 1953년 휴전 때까지 낙동강 구포다리(부산 일원) 일원 피난촌에서 살았다. 징용에 끌려 간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가 삼남매를 데리고 피난을 간 것. 당시 어머니는 부산 국제시장에서 숙주와 콩나물 장사를 했다.

“어린 시절이라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곳(구포다리·국제시장 일원)에서 3~4년 정도 살았죠. 당시 또래들 중 사내아이는 나 혼자였어요. 성격이 여리고 순하다보니 여자아이들에게 매일 얻어맞고 코피 나고 괴롭힘 당하는 게 일이었어요. 그런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본 어머니가 속이 상해 내 엉덩이를 때리셨던 기억이 나요. 사내자식이 계집애들한테 맞고 다닌다고. 그러면서 어머니는 ‘다른 애들이 때리면 너도 때리고, 물면 똑같이 물라’고 하셨죠. 영화 국제시장을 보고 참 많이 울었어요. 영화를 본 뒤 국제시장과 구포다리에 가봤죠.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은 모습을 보면서 쉴 새 없이 눈물이 나더라고요.”

유 회장은 한국전쟁이 나기 1년 전 큰집인 서울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의 본 고향은 아버지부터 조부모 및 집안 어른들이 대대로 살고 있던 충북 옥천이다. 그래서 휴전과 함께 아버지와 재회한 가족은 집안 어른들이 사는 충북 옥천에 들렀다가 이와 가까운 대전(인동)에 정착했다.

아버지는 일제 치하에서 서울 영등포공고 야간학교를 다니며 기계 공업 분야를 배웠다고 한다. 이는 유 회장이 철과 인연을 맺게 되는 계기가 된다. 대전에 정착한 아버지는 곧바로 인동 일원에 달랑 선반 하나 놓고 기계공작소를 차렸다. 가게는 제법 잘 됐고, 유 회장은 그럭저럭 유복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

고교 재학 시절 상위 1%에 들었던 유 회장은 고3 무렵부터 방황을 했다. 고교 졸업 후 중앙대에 진학했지만 대학 생활이 적성에 맞지 않아 6개월 만에 때려 치웠다. 그리고 아버지와 약속을 하면서 해병대에 자원입대하는 것으로 방황을 끝냈다. 

유 회장은 “해병대에서 근무한 경험이 이후 사업을 하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정신의 밑바탕이 됐다”고 했다.

제대 후 본격적으로 위인전과 경영학 서적을 파고들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운영하는 기계 공장에서 어깨 너머로 쇠를 다루는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동시에 대전에서 가장 큰 부자가 누구인지를 찾아 그 사업장 주변에서 며칠씩 맴돌며 배우기도 했다. 당시 동양백화점(대표 오영근), 남선기공(대표 손종만), 동양강철 등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부자들이 운영하는 사업장을 찾아다니며 무작정 배우고 또 배웠다고 했다.

오늘날 오성철강의 모태 ‘중부철재상사’ 창업

유 회장은 아버지 곁은 물론 이곳저곳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20대 중반 무렵인 1972년 초 철물공구점인 한신공구를 냈다. 당시 점포를 빌려 진열대를 직접 만들고 망치와 펜치 같은 제품을 팔았다. 그런데 어느 날, 돈을 조금 벌어 서울 청계천에서 비싼 공구들을 대량 구입해 가게에 적재해 놨는데 그만 몽땅 도둑을 맞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게에 화재까지 났다. 유 회장은 그래서 도둑맞을 염려가 없고, 불이 나도 손해가 가지 않을 사업을 고민했다. 답은 철강제였다. 그는 부산에 있던 동국제강을 찾아갔다.

유 회장은 “20대 때는 열정이 대단했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자신감이 충만했다”며 “그래서 전혀 연줄도 없던 동국제강을 무작정 찾아 갔다”고 했다.

유 회장은 1973년 중부철재상사를 세웠다. 이것이 현 오성철강의 모태다. 이후에도 동국제강을 꾸준히 찾아가 제품을 납품받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다. 동국제강은 당시 철강업계 부동의 1위면서 국내 재계(財界)에서도 5위권에 들던 대기업.

유 회장과 고 장상태 동국제강 명예회장과의 30년 가까운 인연이 시작된 계기였다.

‘철은 배반하지 않는다’ 동국제강 고 장상태 회장과의 인연

“무턱대고 부산에 있는 동국제강을 찾아가 (장상태)회장님 주변을 맴돌다 마주치면 ‘꾸벅’ 인사를 하곤 했죠. 그럼 회장님이 ‘니 뭐꼬’ 하시면 ‘저, 대전에서 온 누구입니다’라고 했어요. 그러면 또 ‘오 그래, 대전!’ 하시곤 했어요.”

그러던 중 동국제강이 전국에 철강 물류유통망을 갖추는 계획을 추진했다. 유 회장 나이 30세인 1978년 무렵이다. 당시 동국제강은 대전은 물론 광주, 부산, 대구 등 전역에 동국제강이 생산한 제품을 각 지역에 관급 자재로 보급하는 유통망을 갖추는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동국제강의 하치장을 따내려고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철근업체들이 소위 ‘국회의원 인맥’까지 동원하며 로비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학연, 지연 등 연줄이 없던 유 회장은 자신만 믿고 동국제강 주변을 계속 맴돌았다.

동국제강은 당시 광주에 있는 아세아자동차를 계열사로 두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국제강 비서실로부터 ‘회장님이 광주 사업장을 가기 전에 유 회장이 운영하는 중부철재상사를 방문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장 회장과 만나기로 한 날, 오전 6시 30분 무렵 이미 장 회장은 유 회장이 운영하는 사업장을 20~30분 전에 도착해 꼼꼼히 둘러 본 뒤 유 회장과 독대를 하게 된다.

장 회장과 독대하던 날은 지금도 유 회장에게 충격이며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장 회장이 평생의 철학을 유 회장에게 가르쳤기 때문.

“철이란 사람을 배반하지 않는다. 사람이 (돈을 벌어) 철을 배반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처럼 와인잔을 다루듯 철을 사랑하고 다뤄라.”

장 회장이 이때 유 회장에게 준 가르침이다. 유 회장은 창업한 지 42년여가 흐른 지금도 당시 장 회장의 가르침을 가슴 깊이 새기며 산다고 했다.

유 회장은 당시 회장님이 두 가지 철칙을 강조하셨다고 했다.

‘첫째, 철강 사업을 통해 돈을 벌면 절대 정치나 다른 잡다한 일에 시간과 열정을 빼앗기지 마라.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이 업을 접어라.’

‘둘째, 모든 건 현장에 답이 있다. 와인잔을 다루듯이 열과 성을 다해 철을 다뤄라. 철은 절대 너를 배반하지 않는다.’

유 회장은 “지금도 로터리, 라이온스, 적십자 등 각종 단체의 회장직 제의를 수도 없이 받았지만 모두 다 고사했다. 오로지 사업에만 몰두하며 ‘철사랑’이란 외길을 걷고 있다”며 “정당 가입 활동도 하지 않으며 오로지 상공인들의 발전을 위한 단체인 상공회의소 일만 보고 있다”고 했다.

중부철재상사는 그 뒤 동국제강의 (중부권) 철강물류 하치장에 선정됐다. 유 회장은 곧바로 중부철재상사를 오성철강주식회사로 법인 전환했다. 이때가 1983년 무렵. 오성철강은 지금도 대전 대덕구 읍내동 본사 외벽에 오성철강주식회사라는 간판과 함께 동국제강 하치장이라고 표시해 놓고 있다.

유 회장이 이후 한 달에 한 번쯤 동국제강 서울 본사에 올라가 장 회장을 만나 ‘꾸벅’ 인사를 하면 ‘오, 대전 왔나!’ 하시며 반겼다고 한다. 사실 장 회장이 유 회장이 운영하던 중부철재상사를 직접 방문하겠다고 한 일 자체가 당시 그룹 내에서는 대단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이후에도 장 회장이 이따금 서울 본사로 유 회장을 불러 선술집에서 만나면 “철은 절대 사람을 배반하지 않는다”는 경영 철학을 강조했다고 한다.

장상태 회장에게 기업 이익의 사회 환원도 배우고 따르다

유 회장은 1970년대부터 장 회장이 작고하던 2000년까지 30년 가까이 장 회장과의 인연을 이어 왔다.

송원 장상태 동국제강 명예회장은 당시 창업주인 장경호 회장의 3남으로 2대 회장이다. 앞서 창업주인 장경호 회장이 타계 직전인 1975년 사재(私財) 35억원(현 2000억원 상당으로 추산)을 조건 없이 국가에 헌납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 기금은 불심이 깊었던 장경호 회장을 배려해 불교진흥원 설립 자금으로 쓰였다.

2대 장 회장 역시 창업주인 선친 장경호 회장의 유지를 이어받아 기업 이익의 사회 환원에 관심이 많았다. 장 회장은 1977년 회사 경영이념에 ‘사회 환원을 (위해)노력한다’는 항목을 집어넣었다. 공장부지 부족으로 당시 주력 사업장이던 부산을 떠나 포항으로 옮기게 되자 장 회장은 부산제강소 부지 매각으로 생긴 특별이익금 중 100억원을 출연해 1996년 대원문화재단(현 송원문화재단)을 설립하기도 했다.

동국제강의 현 장세주 회장은 3세 경영인이다. 최근 3세 회장이 검찰 소환 조사를 받은 것부터 앞서 선친의 유지를 거스르고 서울에 대규모 사옥을 마련한 것 등에 대한 생각을 묻자  유 회장은 “입장을 밝히기가 조심스럽다”면서도 “정말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그러면서 장 회장이 준 또 다른 가르침을 소개했다. 바로 경청의 자세다.

“(철을 다루는 사람으로서) 뼈대 있게 살아라. 뼈대 있게 살려면 돈을 쫒아가지 말아야 한다. 돈은 항상 얼굴이 있고 감정이 있다. 쫓아가면 도망가는 게 돈이다. 돈이란 모든 이에게 평등하게 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이 기회를 보기 위해 마음과 귀를 항상 열고 들어라”

유 회장 역시 오랜 세월동안 기부를 실천해왔다. 1980년대부터 30여 년간 한 달도 빠지지 않고 기부한 공을 인정받아 최근 초록우산(어린이재단)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올랐다.(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 따르면 30년 이상 장기 후원자는 전국에 94명, 대전·충남에 6명이 있다.)

또 장학재단인 ‘오성아카데미’를 만들어 시설 아동들의 학업을 지원해 오고 있다. 2008년부터는 대덕구인재육성사업에 매년 1000만원씩 성금을 내고 있다.

메모 습관도 성공 비결…사회 환원도 사업도 더 확대

유 회장은 성공 비결 중 하나가 메모하는 습관이라고 했다. 그의 집무실 책상 한쪽에는 20여 년 전부터 쓴 수첩이 빼곡히 쌓여 있다. 항상 수첩을 들고 다니며 시시콜콜한 일까지 모두 적는다. 메모를 통해 어제를 기억하고, 오늘을 충실히 보낼 수 있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유 회장이 직접 보여 준 수첩에는 가족의 경조사 기념일부터 친인척 기념일, 예방주사 접종일, 종합소득세 신고일, 운전면허 갱신일 등 잡다한 일들이 기록돼 있었다.

 

그가 가끔 중·고등학교에 강의를 나가면 수첩을 모두 들고 가서 펼쳐 놓은 뒤 강조하는 게 하나 있다.

유 회장은 어린 학생들에게 “메모하는 습관을 가지라고 한다. 본인 자신이 스스로의 일정을 관리를 해야 한다. 세상 살아갈 때 기회가 똑같이 주어지니 자신에게 투자해야 한다. 나무가 자라듯,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게 없지 않나”라고 했다.

장상태 회장을 인생의 멘토로 여기는 유 회장은 “만물에는 적당한 무게가 있듯이 자신에게 맞는 무게를 지키며 살아야 한다는 장 회장님의 말씀을 새기며 살아 왔다. 특히 그분을 통해 의리와 신뢰와 경청과 비움을 배웠다”며 “그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다보니 어느 날 ‘오늘의 (성공해 있는)내’가 있더라”고 했다.

유 회장의 호는 덕광(德光)이다. 친분이 있는 스님한테 받았다는 이 호는 ‘많이 베풀고 살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했다. 큰 나무가 주는 그늘처럼, 앞으로도 더 많이 베풀고 봉사하며 살고 싶다고 했다.

 

[유재욱 회장 약력]

-1949년 서울 출생 
-대전 신흥초, 충남중, 대전상고, 방송통신대 졸
-충남대 경영대학원, 한밭대 산업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충남대 평화안보대학원, 충남대 예술최고위과정 수료
-오성철강 및 두성철강산업 대표이사 회장(현)
-신용보증재단 이사, 대전MBC 사내이사(현)
-대전상공회의소 21대 부회장 역임 및 22대 부회장(현), 대전경제통산진흥원 이사(현)
-북대전세무서 세정협의회 부위원장, 대전사회복지공동모금회 부회장(현)

저작권자 © 디트NEWS24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