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용 칼럼] 소신인가 대권욕인가?

김학용 주필
안희정 지사의 특징 중 하나는 ‘갈등의 현장’에선 안 보인다는 점이다. 대신 갈등의 현장과 떨어진 자리에서 화해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당진시민들은 지난달 13일 평택과의 경계선 분쟁에서 평택의 손을 들어준 중앙분쟁조정위원회(중분위) 결정에 대해 울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안 지사는 보름이 넘도록 이 문제에 대해 침묵했다.

시장 혈서 쓰고 국회의원 삭발하는 날 ‘외유’ 떠난 도지사

중분위 결정대로라면 당진시는 10년 이상 당진 주소로 써온 당진-평택항 매립지 땅을 평택시에 내줘야 할 판이다. 당진시민들은 지난 주말 단식투쟁과 함께 행자부장관을 화형식에 처하며 분노를 표출했다. 김홍장 당진시장은 혈서를 쓰고, 당진 출신 김동완 국회의원은 삭발을 했다. 그 시간에 안 지사는 유럽 출장길에 오르고 있었다.

안 지사는 해외에서 돌아온 다음 날 기자실을 찾아 이 문제에 대해 처음 입을 열었다. 문제가 발생한 지 17일만이었고, 기자의 질문에 나온 대답이었다. 기자가 묻지 않았으면 언급도 없었을 것이다.

안 지사는 “중분위의 결정에 대해 당장 재논의 해 달라고 요청해 놓았다”고 했다. 안 지사는 “지역 주민들의 민주적인 의사표시는 존중 받아야 하지만 도정을 이끌고 있는 제 입장에서는 행정과 법적인 절차에 따라 도계와 우리 영역에 대한 자기 관할권을 지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했다.  “당진시민과 평택시민이 힘을 합쳐 아산만권 자체가 환황해시대의 산업 및 물류 항만 기지로 공동번영을 누리게 해야 한다”며 “행정적·법률적 다툼은 그것대로 하되, 지역민의 화합을 꾀하는 지혜를 지도자들이 발휘해야 한다”고도 했다.

도계 분쟁 패배 결정 보름 넘도록 침묵한 도지사

틀린 말은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게 빠졌다. 안 지사의 말과 행동에는 당진시민의 낭패감과 분노를 헤아리는 구석이 안 보인다. 당진시민들은 이번 중분위 결정을 독도를 빼앗기는 심정에 비유하고 있다. 도지사가 당진시민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면 보름이 넘도록 입을 다물고 있기는 어렵다.

물론 도지사는 이런 문제를 대하는 방식이 도민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도지사가 중분위의 결정에 흥분하여 즉각적으로 반발하는 성명을 내기보다는 차분하게 대응하는 것도 필요하다. 당진시민과 평택시민들이 감정적으로 충돌하는 상황에서 도지사까지 분위기에 휩쓸리는 건 옳지 않다. 그러나 정말 그런 이유만일까?

그동안 안 지사는 갈등 현안에 대해선 회피하는 행동만 해왔다. 충남도 안의 일이든 밖의 일이든 갈등이 심각한 문제에 대해선 그는 언급을 피하고 그런 사안 자체를 멀리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결국 정부가 결론을 내려준 가로림만 조력발전소 설치 갈등 문제에도 충남지사의 역할은 없었다. 정부가 알아서 하고 이해 당사자들끼리 타협하라는 것이 안 지사의 입장이었다.

충남도의 역할을 기대하는 청양군 강정리 석면문제도 도지사의 입장은 없었고, 충청과 호남의 갈등으로 번진 호남선KTX 문제에 대해서도 안 지사는 얘기가 없었다. 기억으로는 심각한 갈등 현안에 대해 안 지사가 전면에 나선 적이 거의 없다. 그는 늘 ‘갈등의 현장’에선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갈등 현안에는 모습 안 보이는 안 지사

이번 당진-평택 경계선 분쟁 문제에 대해서도 기본적으로는 이와 같은 입장으로 보인다. 당진시민들이 울분을 토하며 행자부에 쫓아 올라갈 때도 안 지사 본인은 일언반구가 없었다. 공무원과 부지사가 신경 쓰면 됐지 도지사까지 나설 일은 아니라는 뜻 같았다.

당진시 전체가 울분에 빠져 있는 데도 도지사 생각은 무엇이길래 ‘침묵 모드’로만 일관하는가? ‘중분위 결정’이 나온 지 보름이 넘도록 아무 말이 없다가 기자의 질문을 받고서야 입장을 밝히고, 당진시의원들이 도지사 사무실까지 찾아 가서 도지사의 적극 대응을 요청해야 할 일인가? 도대체 이 일이 누구의 일인가?

안 지사의 태도를 보면, 경기도민이나 평택시민들 몰래 행자부에 ‘조용히 항의하겠다’는 생각 같다. 도지사가 전면에 나서면 지역 갈등이 더 커져 무슨 큰 일이라도 날까 걱정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안 지사는 오버하는 거다. 안 지사는 도지사이지 아직 대통령이 아니다. 안 지사는 충남도민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대변해야 할 도지사다.

도지사는 도민의 대표로서 충남도민의 이익을 위해 주장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설사 그것 때문에 갈등이 다소 커질 수 있다고 해도 도지사는 도의 입장을 분명하게 표명하고 대변해야 한다. 중대한 문제에 도지사가 아니면 누가 나서줄 것인가?

도지사가 나서 따질 것은 따지고 양보할 것은 양보하면 된다. 당진시 전체가 큰 걱정을 하고 있는 데도 충남도 대표인 도지사가 마치 남의 일 대하듯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더구나 이 문제는 당진-평택간의 문제를 넘어 충남도와 경기도 간의 도계분쟁이고, 형식적으로는 중앙정부와의 문제다. 도지사가 뒤로 한 발 빼고 지켜볼 문제가 아니다.

소극적 대처, 소신인가 대권욕 때문인가?

중분위 결정 사항을 행자부장관이 최종 결재해서 그 공문이 도에 도달하면 그에 따라 대응하겠다는 게 충남도의 기본 입장이다. 김앤장 같은 비싼 변호사를 사서 법적으로 대응한다는 게 도의 방침이다. 법적 대응도 필요하지만 이게 전부라면 도지사가 왜 필요한가?

안 지사가 갈등의 현장에서 숨어버릴 때마다 ‘대권욕심 때문에 이쪽 저쪽 눈치 보느라 도지사 노릇도 제대로 못하는구나’ 하는 의심도 든다. 그렇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지만, 지역 갈등을 줄이겠다는 순수한 뜻의 ‘소신’이라고 해도 소극적인 대처는 도지사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다. 지금 당진시민들이 가장 기댈 사람이 누구겠는가? 안 지사는 그걸 생각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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