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브리핑⑨] 그가 남긴 쪽지의 의미

#1. 2012년 4월. 고(故)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디트뉴스를 찾았습니다. 충남 서산․태안에서 19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뒤 인사 차 방문한 겁니다. 성 전 회장과 지역현안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러다가 성 전 회장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습니다. 국회의원 배지였습니다.

“오늘 아침 JP(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께 당선 인사 차 들렀더니 국회의원 배지를 하나 선물로 주셨습니다. JP 당신이 다시던 배지라고 하더군요.” 성 전 회장은 그러면서 “JP께서 9선을 하셨으니 배지 9개를 가지고 계실 거예요. 이게 그 중 하나”라고 했습니다.

JP가 성완종 정치인맥 확장 디딤돌?

고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과 JP의 관계를 보여주는 에피소드입니다. 성 전 회장은 국회의원 당선 후 맨 처음 JP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성 전 회장에게 JP는 자신을 정계와 연결해 준 스승이자 동경의 대상이었을 겁니다.

그렇다고 JP가 성 전 회장의 정치권 인맥 확장의 디딤돌이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습니다. 실제 성 전 회장은 호남 고립화를 위해 민정계(TK), 민주계(PK), 공화계(충청)가 합쳐 만든 민자당의 재정위원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신한국당에서도 ‘합법적인 돈줄’ 역할을 이어갔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성 전 회장은 사업을 위해 권력에 가까이 다가서려는 건설경제인에 불과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돌변합니다. JP가 YS(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토사구팽’을 당하면서 충청정치에 깊숙이 개입하는 전기가 마련됩니다. JP의 지근에서 정치적 입지를 다지고 충청 정가의 중심인물이 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성 전 회장은 2000년 총선 때 자민련에 공천(서산․태안) 신청도 했지만 탈락하기도 했습니다. 충청포럼이 출범한 것도 이 때입니다. 성 전 회장과 JP의 관계는 그가 직접 현실정치에 뛰어들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한층 밀접해졌다고 보는 게 더 객관적인 이유입니다.

성 전 회장은 2003년 총재(JP) 특보단장을 거쳐 2004년 총선에서 JP에 이어 비례대표 2번을 배정받았습니다. 이는 성 전 회장이 자민련에 불법 정치자금 16억 원을 제공한 혐의로 구속기소 돼 징역 2년과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배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JP가 총재직에서 물러나고 정계를 은퇴한 뒤에도 성 전 회장은 주로 충청권에 기반을 둔 지역정당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왔습니다. 급기야 19대 총선에서는 자유선진당(이후 새누리당 통합 전까지 선진통일당) 소속으로 지역구에 출마해 국회 입성에 성공했습니다. 성 전 회장은 JP를 평생의 스승으로 여겼고, 그를 통해 국회의원까지 됐다고 믿었을 겁니다.

#2. 오래 전 일이라 기억이 정확치 않습니다만 2001년이었던 것 같습니다. 서울의 한 호텔에서 고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창립한 충청포럼이 진대제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총괄 사장을 초청해 특강을 열었습니다. 진 사장은 노무현정부 출범 후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진 사장을 포럼 강사로 초청한 것은 DJ정부가 국가차원에서 IT(정보통신) 분야를 집중 육성하던 것과 무관치 않았습니다.

포럼 행사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습니다. 당시는 DJ(고 김대중 전 대통령)와 JP(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가 ‘동거정부’를 구성하던 시절입니다. 충청과 호남이 물리적으로 결합한 터라 자민련은 물론 민주당 정치인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충청→영남→호남 인맥지도 확장

당시는 DJP연합의 전제조건인 의원내각제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있었고 JP는 국무총리 자리에서 물러나 있었을 때였습니다. 제가 충청포럼 행사장을 기억에서 되살린 이유는 성 전 회장이 인맥지도를 호남 혹은 진보진영까지 넓히는 계기가 된 것이 DJP연합이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성완종 게이트’에 현재의 야당 인사들까지 거론되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여야 실세 14명의 실명이 적힌 ‘성완종 장부’<조선일보 “4월 17일자 참고>가 나온 것이 그 방증입니다. 장부에는 야당 정치인 7~8명에게 건넨 돈의 액수, 시간, 장소가 적혀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모르면 몰라도 성 전 회장이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인들에게 돈을 줬다면 DJP연합이 그 단초가 됐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당은 노무현정부 시절 성 전 회장이 두 차례 사면 받은 사실을 걸고넘어집니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도 “정치권에서 오가고 있는 불법 정치자금 전반에 대한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라며 “특정인에 대해서만 검찰이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정치권 전반으로 수사가 확대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비친 셈입니다.

한 종편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검찰도 경남기업의 최근 10년 치 자금흐름을 추적하고 있답니다. 노무현-이명박정부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 금품로비 의혹을 캐겠다는 사정당국의 의지가 읽힙니다.

‘성완종 게이트’는 철저한 학습의 산물

성완종 전 회장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주머니에 금품로비 대상과 액수가 적힌 쪽지를 남겼습니다. 이는 검찰에 수사범위를 정해준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성 전 회장의 뜻대로 흘러가지는 않는 듯합니다. 검찰이 수사범위를 확대하고 있으니까요. 더구나 성 전 회장이 여야를 막론하고 돈을 뿌렸다고 의심하고 있는 게 국민적 정서 아닌가요?

성 전 회장의 금품로비는 그가 기업을 일구고 정치를 하는 과정에서 학습하고 체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JP와의 관계, 충청포럼에 대한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은 이유입니다. 그가 이른바 ‘친박 실세’들에게 줬다고 주장하는 돈은 단순히 정치를 후원하는 행위 그 이상이었습니다. 돈을 주면 사업에 더 큰 기회가 생기고 어려운 일을 당해도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은 이 학습과정에서 생겼다고 봐야 할 겁니다. 그가 ‘보장성 보험’을 통해 어떤 어려움을 헤쳐 왔는지 여기서 되풀이해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가 이런 걸 어디에서 배웠을까요? 바로 철저히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인들입니다. 사회적 위계의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은 일반인보다 더 탐욕스럽고 파렴치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더 탐욕스럽고 더 파렴치해집니다. 정치인들이 그동안 보여준 이 같은 ‘진화’도 학습의 결과물입니다.

성완종 게이트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드러나지 않은 제2, 제3의 성완종 게이트가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명명백백한 수사결과가 나와도 거대한 빙산을 깨부수진 못할 겁니다. 적어도 잘못된 학습이 반복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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