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영의 세상사는 이야기

참신한 문장 레토릭수사와 감각적 표현의 세련된'도시적' 감성 김승옥 작가 문학세계 

2015년 을미년(乙未年)새해를 맞아 주말 집에서 차분하게 보냈다. 지난해 일을 정리하고 새로운 올해 할 일에 대하여 생각을 하였다. 우연히 TV 채널을 돌리다가 K-TV 앙코르 베스트 셀러 TV 문학관 ‘무진기행(霧津紀行)에 시선이 멈추었다.

전남 진도 한국소설가협회 세미나/두 번째 사진 왼쪽 두 번째가 김우영 작가
김승옥 작가는 몇 년 전 전남 진도군에서 한국소설가협회 회원을 초대하는 자리에서 만났다. 마침 잘 아는 진도군 후배 소설가 초대도 있어서 그 곳에 갔는 한국소설가협회 유재용 회장님과 함께 김승옥 작가와 1박 2일간 숙식을 했다.

김승옥 작가는 당시 뇌경색으로 쓰러져 발음이 어눌하고 걸음이 부자연스러웠다. 그러나 당대를 풍미했던 대 작가의 외모만큼은 넉넉한 채취에서 풍겨 나오고 있었다.

김승옥 작가와 같이 1박 2일을 지낸 인연도 있었지만 평소 그의 개성있는 유니크(Uniqre)한 필치를 좋아했다. ‘무진기행’ 소설작품도 읽어 본 터라 이번에는 TV 브라운관을 통해 감상하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하고 밤 12시부터 새벽 2시 가까이 심야시간에 시청했다.

 KBS 방송국에서 지난 1983년부터 방영을 시작한 ‘베스트 셀러극장’은 대중적이면서도 예술성을 지닌 현대소설 원작을 각색 당시 흔치 않았던 필름 촬영을 시도하고 올 로케이션과 동시녹음으로 제작해 시청자의 관심이 높은 프로그램이다. TV 시청을 잘 안하는 편이지만 ‘베스트 셀러 TV 문학관'은 꼭 시청한다.

'무진기행'은 지난 2010년 12월 27일 소개한 프로그램을 이번에 K-TV에서 앙코르 방영했다. 전남 순천 출신 김승옥 작가의 단편 ‘무진기행’(1964)은 한국 소설계의 보물 같은 작품이다. 항상 안개에 싸여 있는 소설 속 무진은 작가가 고향 순천 일대를 배경으로 창조한 가상의 공간이다.

'무진기행'에 나오는 무진(霧津)은 바닷가에서 나오는 안개 해무(海霧)이다. 전쟁 후 1960년대 시대적 혼돈(混沌)과 방황 속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아 헤매는 주인공의 내면세계를 해무라는 안개 이미지를 차용한 것이다.

뿌우연 안개로 둘러쌓인 무진 염전

특히 '무진기행'은 1967년 김수용 감독의 영화 ‘안개’로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는다. 김승옥 작가가 직접 각색한 '안개'에는 당대 최고의 영화배우 신성일과 윤정희, 김정철, 이낙훈 등이 출연한다. 당시 스토리 위주의 한국영화계에 심리·분위기 묘사로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 영화였다. 흑백 화면 속에 흐르는 무진마을 안개 낀 해안가는 지금도 기억이 선명하다.

영화 ‘안개’는 김수용 감독의 대표작이면서 1960년대 한국영화를 꼽을 때 우선적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원작소설에 충실한 영화이면서 ‘안개’ 가수 정훈희를 일약 스타로 만들기도 했다.

‘무진기행’을 영화화한 또 다른 작품이 있다. 1974년 조문진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황홀’이다. 경기도 김포에서 찍은 ‘안개’와 달리 ‘황홀’은 순천 일대에서 올 로케로 촬영되었다고 한다.

김수용 감독의 영화 ‘안개’(무진기행) 포스터
소설작품을 원작 각색한 드라마 속 '무진기행'은 감각적이고 섬세한 언어구사와 도드라진 문체, 무진이라는 안개로 덮이는 공간을 배경으로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무너진 혼돈의 현대세계를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960년대 당시 우리사회는 전쟁이 끝나고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경제적 혼란이 가중되었다. 급속한 사회적 변화와 그 과정에서 생기는 괴리감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미래에 대해 불안한 내면과 부조리함에 젖어들 수 밖에 없는 시대에서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출세한 인물의 내면심리를 형상화 한 작품이다.

대략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무진기행 열차안에서 주변 여행객들이 나누는 이런 대사로 드라마는 시작이 된다.

무진 안개와 습지대
“무진엔 명산물이…… 뭐 별로 없지요?”

 “별게 없지요? 그러면서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건 좀 이상스럽거든요?”

 “바다가 가까이 있으니 항구로 발전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가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럴 조건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수심(水深)이 얕은 데다가…(중략)”

 “그럼 역시 농촌이군요!”

 “그렇지만 이렇다 할 평야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下略)

주인공 윤희중은 오랜만에 고향인 무진으로 내려간다. 그는 처가에서 운영하는 제약회사 간부로서 이번 주주총회를 통해 전무로 선출될 예정이고 모든 것은 장인과 처가 알아서 할 것이다.

무진의 늪지대
무진기행에서 무진은 윤희중의 고향이자 현실의 도피처이다. 하지만 고향 역시 어머니 품속 같은 안식처로서의 고향이 아닌 암울한 젊은 날의 기억이 녹아있는 곳이다. 그의 젊은 날이란 6.25 사변으로 중학생들도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선다면…! 을 부르며 전쟁터로 떠날 때 어머니에 의해서 골방에서 숨어 지냈던 시절이다.

윤희중에게 무진은 어머니의 산소와 젊은 날의 추억이 있는 곳이다. 그는 무진에서 세무서장이 되어있는 학교 동창 조 서장과 모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후배 박 선생, 그리고 같은 학교에서 음악선생으로 있는 하인숙과 같이 술자리를 같이한다. 술자리 도중, 그는 가곡이 아닌 유행가를 부르는 하인숙에게 연민의 정을 느낀다. 술자리가 끝나고 하인숙과 단둘이 귀가하는 도중, 그녀가 자신을 서울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고 다음날 바닷가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무진의 갈대숲과 둑길
다음날, 윤희중은 어머니의 묘에 갔다 오다가 방죽에서 자살한 술집여자의 시체를 보며 연민을 느낀다. 그는 갈대밭에서 하인숙을 만난다. 둘은 갈대밭에서 남녀의 정을 통한다. 하인숙은 다시 서울로 데려가 줄 것을 요구하고, 윤희중은 꼭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한다.

이튿날 아침, 아내에게서 갑자기 상경하라는 전보가 오고, 윤희중은 하인숙에게 남기는 편지를 쓰다가 찢어버리고 서울로 향하면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무진은 항구도 아니고 농촌도 아니며, 명산물이라 할 것도 마땅하지 않은 어중간하고 애매한 공간이다. 그야말로 무진이라는 마을은 무엇이라고 규정하기 힘든 곳이다. 이와 같이 무진이라는 공간의 애매성은 이 작품의 중요한 상징물인 ‘안개’와 연결된다. 게다가 무진(霧津)은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안개 나루’를 뜻한다. 이는 무진을 ‘안개’의 속성과 연결하여 생각하는 것에 설득력을 더해 줄 것이다. 

그간 김승옥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서 언제나 느끼는 것이 있다. 그는 세련된 '도시적' 감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의 작품들을 에워싸고 있는 일종의 비관적이고 회의적인 정조가 역시 한번쯤은 잿빛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을 사로잡을 만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김수용 감독과 김승옥 작가
그러나 그 힘은 어떤 정치적 노선이나 이념을 바탕으로 한 소설들이 갖는 '지나친 큰 목소리'가 갖는, 다소 거부감을 일으키는 힘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작품들은 도덕적 불감증을 과감하게 드러내려 하고 있으며 거기에 대해서 어떤 부정적인 논평을 직접적으로 가하지 않는 편에 속한다. 말하자면, 작품 속의 인물들의 행위와 사고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독자들에게 맡겨두는 것인데 그 점이 뜻밖에도 현대 사회의 모순과 가치의 부재, 거기서 소멸되어 가고 있는 개인들의 자아에 대한 반성적 사고를 독자들에게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모교 박 선생과 세무서 조 서장, 하인숙 음악선생, 그리고 냇물에 투신한 채 발견되는 어떤 술집 여자 모두 어떤 의미로는 ‘무진’에 운명적으로 종속되어 있다. 그리고 ‘나’만이 그 경계를 넘나드는 인물인 셈인데 그 역시 순수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무진’과 동질성을 지니고 있다.  

무진기행은 1960년대의 작품이면서도 지금껏 문학적 빛을 발하고 있다. 그 것은 참신한 문장의 레토릭(Rhetoric)수사와 감각적 표현들이 작품 자체 의미를 풍부하게 하면서 독자들을 끌어당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특유한 텍스트 외적인 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이 오래도록 생명력을 지닐 수 있는 장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수 여자만을 바라 본 순천만 칠면초 군락지
윤희중의 내면적 갈등은 다음과 같은 독백으로 묘사된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다. 꼭 한 번만…….'

 김승옥 작가는 무진기행에 대하여 이렇게 밝히고 있다.

“비관주의 속에 스며 있는 안타까운 호소'이지요. 감각적인 수사와 '무진기행'에서 보여지는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에 가까운 심리 묘사이지요.”

세련된 '도시적' 감성을 지닌 ‘무진기행’을 에워싸고 있는 비관적이고 회의적인 정조. 역시 한번쯤은 잿빛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을 사로잡는 김승옥 작가의 작품세계이다.

새롭게 시작하는 2015년 을미년 새해. 참신한 문장의 레토릭(Rhetoric)수사와 감각적 표현들이 작품 자체 의미를 풍부하게 하면서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김승옥 작품과 만나보기를 권하고 싶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 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일어나서 무진을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있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 놓은 입김과 같았다.

순천만 용산에서 바라다 본 습지대 S자 코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중에서

□ 김승옥(金承鈺)작가 소개    
1941년 12월 23일 일본 오사카 출생. 서울대학교 불문과 졸업. 1962년 《한국일보》신춘문예에 <생명연습>이 당선되어 등단, 김현·최하림과 동인지《산문시대》를 펴내고, 단편 <건(乾)> <환상수첩>과 이듬해 <누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확인해본 열다섯 개의 고정관념> 등을 실었다. 1950년대의 작가들이 6·25와 그로 인한 사회적 갈등과 모순을 파헤친 데 반해서, 그는 남녀의 성을 모티브로 자아의식(自我意識)세계를 밀도 있는 문체로 전개, 인간의 내밀성과 사회관계에 있어서의 윤리적 문제를 다뤘다. 1965년《서울, 1964년 겨울》로 제10회 동인문학상· 1977년《서울의 달빛 0장》으로 제1회 이상문학상을 받았다. 소설집에《서울, 1964년 겨울(1966)》《무진기행(霧津紀行, 1977)》등이 있다.

- 아는 만큼 크게 보인다(무진기행의 배경지)

 전라남도 순천만길 513-25번지의 광활한 갈대 군락과 그 사이로 흘러가는 물길. 갯벌이 키운 수많은 생명이 순천만을 채우고 있다. 갯벌의 면적은 22.6㎢에 달하고, 그중 4/1이 갈대밭이다. 갈대밭 여행은 순천만자연생태공원에서 시작되는데, 초입의 자연생태관에는 순천만의 생태를 알 수 있는 다양한 전시물이 있다. 잘 조성된 산책로를 걷는 것은 순천만에서 느끼는 가장 큰 즐거움이다. 어른 키를 훌쩍 넘는 갈대밭 위로 철새들이 날고, 갈대의 합창을 들으며 용산전망대로 가면 S자로 휘어지며 바다로 나아가는 순천만의 물길을 볼 수 있다.

특히 낙조가 아름다워 해 질 무렵이면 카메라를 든 사람들로 분주하다. 유람선을 타면 갈대밭 사이를 헤치고 바다로 나아가며 순천만의 진면목을 만나볼 수 있다. 갈대열차도 인기이다. 꼬마기차를 타고 순천만으로 합류하는 이사천과 동천이 만나는 지점까지 돌아보고, 순천만을 배경으로 탄생한 소설 ‘무진기행’의 김승옥 작가와 순천이 고향인 동화작가 정채봉 문학관을 탐방하는 코스도 볼 수 있다.

 (문의) 순천시 관광안내소 061-749-3107
순천만 자연생태공원 061-749-4007
순천만 자연생태공원 홈 페이지 www.suncheonba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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