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용 칼럼]

지난해 11월 ‘부산은행의 대전 무시 사건’이 있었다. 부산은행이 대전지점을 열면서 대전시장을 초청했으나 시장이 오지 않자, 대전시에 내놓겠다던 기부금 약속을 철회한 사건이었다. 지방은행이 다른 지방에 진출하면서 보이는 태도 치고는 보기 힘든 일이다. 나는 대전이니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부산은행의 ‘대전 무시’와 전북은행의 활개

전북은행은 대전시청 코앞에 지점을 두고 있다. 전북은행의 대전 진출은 오래 됐다. 지금은 대전에만 8개의 지점을 두고 있다. 타지 은행이 시청 코앞에서 문을 열고 장사하는 것도 대전이니까 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지방은행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충청은행이 사라진 상황에서 타지 은행의 대전 진입을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우리 대전의 모습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다. 한번 우리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자는 얘기다.

대전은 깐깐한 도시가 아니다. 오히려 ‘물렁한 도시’다. 외지에서 누가 ‘쳐들어 와도’ 웬만한 일은 그러려니 한다. 별 상관 않는다. 대전은 배타적이지 않다. 텃세가 없다. 그래서 처음 이사 온 사람에게도 살기좋은 도시다. 충남도 대전과 큰 차이가 없다.

살기좋은 도시 전국 1등 대전

‘살기좋은 도시 설문조사’에선 대전이 1등을 하는 경우가 많다. 대전의 물리적 지리적 여건 외에 대전 사람들의 이런 성격도 한 몫 한다고 본다. 지난해 한 중앙지의 조사에서도 대전이 1위를 했다. ‘지금 거주하는 지역이 살기 좋다’는 항목에 대전 거주자의 94%가 공감했다. 광주는 66%, 대구는 62%였다. 서울(84%)도 대전보다 낮았다. 충남(84)은 경기도(87) 다음으로 살기좋은 도(道)였다.

외지 사람들이 기죽지 않고 각계에서 리더로 활약하고 있는 곳이 대전이다. 맥키스컴퍼니(전 선양소주)의 조웅래 회장은 경북대를 나온 경상도 출신이지만 계족산 맨발축제를 성공시키며 대전 사람도 못한 일을 해내고 있다. 대전시의원을 거쳐 유성구청장까지 지낸 진동규 전 구청장은 마산 출신이지만 이젠 대전이 고향이 됐다.

대전발전연구원장을 거쳐 대전시교육감까지 도전했던 이창기 대전대 교수는 전북 출신이다. 그는 행정도시 무산 방지를 위해 시민사회단체들과 맹렬한 활동을 펼친 바 있다. 이춘희 세종시장의 고향도 전북이다. 그는 행정도시건설청장을 지낸 인연으로 이젠 ‘세종시민의 대표’에 올랐다.

대전 충청의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에서 맹활약 하는 ‘외지인들’은 부지기수다. 이들이 ‘이방인’이라는 점을 문제삼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종종 경계의 시선을 보내기도 하지만 대전 사람이 되어 대전을 위해 열심히 뛰는 사람을 시비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존경해야 한다.

어떤 지역도 그런 명분에 토를 달 사람은 없지만 현실적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외지인은 소외되기 쉽고 기죽기 마련이다. 대전에선 예외다. 대전은 열린 도시다. 어디서 와도 환영이다. 고향을 묻지 않고 출신을 따지지 않는 도시다.

출처 : 조선일보(2014년)
물렁한 공무원 물렁한 정치인들...

대전이 ‘물렁한 도시’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물렁한 도시라고하면 부정적 어감이 강하지만, 내가 보기엔 이게 대전의 중요 특징 가운데 하나다. 대전은 여러 면에서 물렁하다. 공무원도 정치인도 경제인도 물렁한 편이다. 악착같이 덤비는 모습이 별로 없다. 그래서 다른 지역과 경쟁을 벌이게 되면 뒤지거나 패하는 경우가 많다.

각 지방 공무원의 중앙 로비스타일은 많이 회자된다. 경상도 공무원은 하루 전에 올라가 담당자를 술집으로 불러내고, 전라도 공무원은 아침 일찍 가서 점심을 대접하는데 충청도 공무원은 점심 식사 후에 찾아간다고 하니 경쟁의 결과는 뻔하다.

국회의원도 대전 충남 출신들의 활동이 가장 미약해 보인다. 사실이 어떠하든 그런 느낌을 준다. 그제 대전발전연구원이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도 이를 말해준다. 대전은 광주보다 인구가 5만~6만 명이나 많은데 국회의원 수는 2명이나 적으니 대전의 국회의원 수를 늘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그럴 필요가 없다’는 대답이 56%나 됐다. 황당한 결과다.

이 조사가 권선택 시장의 불법선거 문제가 자주 보도되는 시점에서 나온 것으로 ‘비정상적인 결과’라는 점을 감안해도, 대전 정치인들에 대한 심각한 불신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물렁한 충청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이다.

한쪽 정당만 밀어주지 않는 ‘물렁한 시민들’

그러나 대전 시민들도 악착같은 구석이 없다. 제3당인 자민련이 있을 때도 대전 충남도민들은 엇비슷한 비율로 지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정 정당에 매여 있지 않다는 뜻이다. 외지인들은 ‘충청도 사람들은 줏대가 없다’고 평한다. 이것도 ‘물렁함’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물렁한 게 나쁜 것은 아니다. 물렁함은 부드러움의 다른 말이다. 외지 출신에게 “왜 대전이 살기 좋으냐?”고 물어봤다. “배타적이지 않고 남을 배려하며 유(柔)해서 좋다”고 했다. 영남 출신이든 호남 출신이든 거의 모든 외지인이 내놓는 평이다.

물렁해야 열린 도시가 될 수 있다. 깐깐하고 배타적인 도시는 발전이 힘들다. 대전의 물렁함은 당장은 단점으로 보일 수 있지만 대전 발전에는 오히려 장점이다. 대전도 인구가 줄어 걱정이다. 4개월 째 인구 감소를 기록하고 있다. 물렁해서 외지인들이 들어오기 좋은 도시가 인구 늘리기엔 강점 아닌가?

부드럽기만 하고 정체성 없으면 ‘맹탕’

물렁하기만 하고 자기 것이 아무것도 없으면 사람이든 도시든 맹탕일 뿐이다. 그런 식의 부드러움을 추구할 수는 없다. 뭔가가 있어야 한다. 그게 무엇일까? 권 시장이 신년사에서 “대전을 가장 대전답게 만들자”며 대전의 정체성을 언급한 것도 결국 같은 문제다.

권 시장의 말대로 대전은 ‘제2의 뉴욕’이나 ‘제2의 서울’ 전략으론 대전의 정체성을 찾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대전이 배타적이지 않은 ‘열린 도시’로 가야 한다는 점이다. 대전이 보유한 물렁함과 부드러움은 대전의 장점으로 개발되어야 한다.

닫힌 국가, 배타적인 도시보다는 열린 도시, 열린 국가가 늘 번창하고 발전했다. 지역성이 너무 강하면 그게 힘들다. 다른 도시가 따라 올 수 없는 대전의 강점이다. 부산은행이 대전 와서 오만해 보이는 행동을 해도, 전북은행이 대전에서 텃밭처럼 영업점을 늘려가도 크게 시비하지 않는 도시가 대전이다.

하지만 대전은 그저 열려만 있는 도시에 가깝다. 충청 본토박이가 절반, 영호남과 이북 출신이 절반이라는 융합의 도시다. 그러나 마땅한 대전의 얼굴이 아직 없다. 혹자들은 ‘선비정신’과 ‘양반의 도시’를 내세우기도 하지만 멋쩍은 게 사실이다. 아직은 대전이 선비의 도시와 양반의 도시는 아니다.

원로도 없는 ‘무관심의 도시’를 바꾸려면

어떤 ‘이방인’은 대전에 대해 이런 평을 했다. “대전(충남) 사람들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상대를 존중하고 인정하지 않는다. 피해의식이 많고, 상대방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다. 부산은행이나 전북은행의 경우도 어쩌면 무관심의 반영일 수도 있다.”

이게 사실일까 싶지만 대전에 이렇다 할 원로가 없고, 지역 소식을 가장 잘 전해주는 지방신문 구독률이 전국 꼴찌라는 점은 이를 부인하기 어렵게 만든다. 원로가 없다는 건 원로로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 없는 탓일 수도 있으나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풍토 때문일 수도 있다. 지방신문에 대한 외면은 이웃에 대한 무관심을 말해주는 것일 수 있다.

모두 선비정신과는 거리가 있다. 선비는 속내를 숨기지 않고 상대를 인정한다. 피해의식도 없다. 대전은 ‘대전의 얼굴’을 찾아야 한다. ‘물렁함’을 무기로 삼는 ‘열린 도시’는 이를 위한 제1의 조건이지만, 거기에다 무언가를 그려 넣어야 된다. 누구의 몫인가?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대전시민들의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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