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만과 대세론에 무너진 대전 새누리

  김학용 주필  
 김학용 주필

다들 이긴다던 새누리당의 박성효 후보가 패하고 새정치연합(새정연)의 권선택 후보가 대전시장에 당선되었다. 어렵다던 인천과 경기도에서도 새누리당 후보가 ‘여당의 무덤’에서 살아왔으나 여론조사에서 줄곧 1위로 달려온 박 후보는 오히려 살아나지 못했다. 그의 패인은 무엇일까?

새누리 자만에 빠져 선진당 출신들 홀대

우선은 새누리당(대전시당)의 자만이 부른 결과다. 일부 구청장 후보를 결정하는 과정은 마치 나무막대를 꽂아놓고 당선시키겠다는 태도였다. 다들 ‘저러면 안 되는데..’ 했다. 선진당 출신에 대한 홀대도 오만에서 나왔다. 선진당 깃발을 내리고 새누리로 갔던 사람들은 의붓자식 취급을 당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적의 편으로 돌아서 새누리 후보들을 공격했다. 선진당 출신의 동구청장과 중구청장은 새누리당에서 쫓겨나 새정연으로 옮긴 게 오히려 복을 받았다.

공천만을 좇아 이당 저당 오락가락하는 행태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유권자는 ‘철새’보다 ‘오만’을 더 싫어한다. 지방선거가 ‘여당의 무덤’인 것은 특히 대통령의 오만이 국민들 눈에 잘 들어오는 선거이기 때문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은 이번에 ‘눈물의 담화’까지 발표하며 백방으로 뛰었고 어느 정도 효과를 보며 선방했다. 

박 후보 지지율 고공행진에 ‘이회창식 대세론’ 안주

그러나 대전에선 대통령의 눈물이 먹히지 않았다. 세월호 사건에도 수도권과 달리 대전의 표심엔 큰 영향을 받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면서 자신의 오만을 돌아볼 기회도 없는 상태에서 대세론에 안주했다. 대세론에 기댄 선거에는 절박함이 없다. 당연히 눈물도 별 필요가 없다.

박성효 후보 캠프엔 이회창 씨가 2002년 대선에서 실패할 때와 같은 상황이 연출되었다. 당시 이회창 후보 캠프는 대세론에 힘입어 선거가 끝나기도 전에 마치 대통령이 된 듯한 분위기였다. 이런 상황에선 선거운동보다 자리다툼이 먼저 벌어진다. 박 후보 캠프에도 선진당 출신 같은 ‘곁다리’는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노병찬 이재선 캠프에서 박 후보 쪽으로 건너갔던 몇 명도 괄시를 받았다.

선진당 출신의 염홍철 시장도 기본적으론 이런 처지에 다름 아니었다. 그는 박성효 후보와의 개인적 갈등 문제도 있었다. 전임과 후임시장 사이에 발생하는 ‘처첩 갈등’에 다름 아니었지만, 염 시장으로선 박 후보의 당선만은 막고 싶은 것으로 보였다. 실패로 돌아갔지만 염 시장의 ‘노병찬 밀어주기’도 그래서 나왔다고 본다.

풀지 않고 방치한 염 시장과의 갈등 결국...

새누리당에선 어떻게든 ‘염 시장 문제’를 풀었어야 한다. 하지만 박 후보의 지지도가 고공행진을 계속하면서 이를 크게 고민하지 않고 손을 놓고 있었다. 염 시장으로선 상대당 후보라도 밀고 싶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른바 ‘염맨들’의 상당수가 박 후보가 아니라 권 후보의 캠프로 옮겼던 점을 보면 염 시장의 처지를 알만하다. 그렇지만 현직이고 엄연히 새누리당 소속 시장이니 드러내놓고 상대당 후보를 밀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권선택 후보와 새정연 지도부가 염 시장에게 면담을 요청해 온 듯하다. 염 시장으로선 ‘불감청 고소원(不敢請 固所願)’이었다. ‘감히 (먼저) 부탁한 것은 아니나 바라는 바’였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불감청의 복수극’이 되고 말았다. 권선택 후보와 새정연 지도부는 선거를 10여일 앞둔 시점에서 염 시장을 2차례나 만났다. 권 후보 측은 염 시장과 찍은 사진을 적극적으로 써먹었다. 염 시장은 권후보를 지지한다는 메시지였다.

  지난 5월22일 새정치연합 박영선 원내대표가 권선택 후보와 함께 염홍철 시장을 찾아가 만났다.  
지난 5월22일 새정치연합 박영선 원내대표가 권선택 후보와 함께 염홍철 시장을 찾아가 만났다.


현직 시장과 찍은 사진 한 장은 박빙의 선거에선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있다. 한 정치학과 교수는 언젠가 “내가 교수라서 선거 때면 어떤 후보를 찍으면 좋으냐고 묻는 사람들이 꽤 있다. 오피니언 리더들의 영향력이 결코 적지 않다”고 했다. 대전 최고의 오피니언 리더인 대전시장이 상대당 후보와 나란히 찍은 사진은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다고 봐야 한다.

새누리당이 문제를 삼자, 염 시장은 “누구는 와서 사진을 찍고 누구는 와서 왜 사진을 찍느냐고 뭐라고 하고... 저는 가만히 있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하고 싶은 말도 없는데... 저에게는 묻지도 않고 다들 자기 편한대로 말하고 생각합니다. 하늘에 뜬 뭉게구름에게 묻습니다. 날더러 어쩌란 말이냐”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외간 남자'의 방문을 허락한 염 시장의 ‘불감청 복수극’

염 시장 말은 사실이겠지만 맞는 말은 아니다. 꼭 말로 해야 말이 아니고 가만히 있어도 전할 수 있는 게 사람 마음이다. 시장선거가 한창 진행 중인 상태에서 현직시장이 다른 정당 후보를 만나 서로 손을 잡고 웃으면서 사진을 찍는 건 ‘정상’이 아니다. 외간 남자가 남의 집 여자를 방문하는 것만큼이나 비정상이다.

어떤 여자가 집에 있는데 외간 남자가 찾아와 사진이나 한 장 찍자고 하면 문을 열어주겠는가? 여자가 문을 열어주고 사진 찍기까지 허락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상태거나, 그래서 이혼을 결심한 정도가 아니라면 함부로 문을 열어줄 이유가 없다.

외간 남자가 찾아간 것도 그 여자의 처지에 대한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없는 남의 집에 찾아가서 “사진이나 한 장 찍자”며 문을 두드릴 수는 없다. 외간 남자가 찾아온다고 해도 문을 열어 줄지는 여자 자신에게 달렸다. 페이스북의 말처럼, 여자가 ‘가만히 있는데’ 외간 남자가 문을 부수고 들어와서 사진을 찍었다면 바로 경찰행이다. 문은 여자 자신이 열어줘야 하고 사진도 허락해야 찍을 수 있다.

자기당 시장에게 선거중립 지키라는 코미디

염 시장은 문을 열어줬고 사진 찍는 일까지 허락한 꼴이다. 그러나 외간 남자(새정연)에게 문을 열어준 여자만 탓하기는 어렵다. 여자가 그렇게 하도록 만든 남편(새누리 대전시당)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 누구 책임이 더 크든 일단 남편이 치명상을 입었다.

남편은 지금 땅을 치며 한탄하고 있겠지만 이런 일까지 있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남편은 그 여자와 곧 헤어지게 될 것이라고 여기며 방치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은 그 여자가 여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현직 시장이었다. 이 점을 남편은 간과했고 외간 남자는 간파했다.

외간 남자는 그녀를 이용했다. 남편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으나 제 얼굴에 침뱉기니 큰 소리로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남편은 사람을 보내고 중앙당까지 동원해서 주의를 주었으나 외간 남자의 ‘남의 여자 마케팅’은 이미 끝난 상태였다. 남편 쪽의 후보자는 선거에서 떨어졌고, ‘여자의 복수’는 성공으로 끝났다. 현직 시장이, 자기 편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상대당 후보를 만나 ‘묵언(默言)의 응원’을 표하고, 시장이 속한 정당은 오히려 선거중립을 외치며 자당 시장에게 항의하는 일이 벌어졌다. 지방선거사(史)에 남을 한 편의 코미디다.

새누리가 염홍철과 죽은 선진당에 진 선거

새정연 지도부와 염 시장이 나란히 찍은 사진은 박 후보가 왜 졌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새누리당의 갈등과 분열을 말해준다. 선거에서 그런 문제가 으레 있기 마련이지만 현직 시장이 대놓고 상대 후보를 응원할 정도면 볼 장 다 본 선거다. 그런 선거를 해놓고 당선되기를 바라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새누리는 세월호 사건 이전에는 너무 오만했고 이후에는 경계심을 가졌으나 후보 지지율에 큰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보이자 대세론만 믿었다. 결전의 날이 임박해서야 문제의 심각성을 알았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그러는 동안 동료들이 적으로 돌아서고 자기 편 시장의 ‘복수극’까지 부르면서 스스로 무너져내렸다. 어쩌면 이번 선거는 박 후보와 새누리당이 염 시장과 죽은 선진당에 패한 선거다. 대개의 패전(敗戰)이 그렇듯 밖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진 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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