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김영관 전 대전엑스포과학공원 상임이사

  김영관 전 대전엑스포과학공원 상임이사  
김영관 전 대전엑스포과학공원 상임이사

삶의 최후란 어떤 모습일까?

몹시도 사무치는, 오래 전에 하늘로 떠나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지막 의식은 어떠했을까? 현세에서 내 존엄의 표상이었던 정치가이면서 수필가 활동도 하셨던 K숙부님, 그리도 단아하고 고고하셨던 할머님, 고교시절 2달씩 일기를 교환해 쓰던 연산 시골 친구D, 치열한 악동 노릇에 열정일 때의 S와 K.

다들 이승에 있는 이들이 아니다. 그들의 죽음 이외에도 숱하게 지켜 본 기억 속의 인연들, 그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마지막 본 영상은 무엇이었을까?

당신들의 배우자, 혹은 결코 잊지 못할 흠모나 숭모 또는 연모의 제3의 인물이 대상이었을까? 아니면 별리(別離)의 아픔으로 오열하는 자식 중 그 누구였을까? 그도 저도 아니면 생애 최고의 희열적 순간을 되새겼을까? 정반대로 가장 애처롭고 후회스런 순간의 장면이 펼쳐졌을까?

-이 세상을 뜰 때 보는 '마지막'은 무엇일까?

단언컨대 아무도 모른다. 스페셜 다큐 프로의 인기 소재일 수는 있어도, 현존하는 그 어느 종교도 증거하지 못하고 섣불리 거론하기를 삼가고 있다.

뿌리를 가르치는 종교(宗敎)가 끝(終)을 보여주면 신비감도 떨어지고, 특유의 종파적 색깔도 분별이 없어지니 어느 종교가 앞장서 불필요한 논란에 휘말릴 이유가 없 을테니 말이다. 더구나 자연사가 아닌 인간의 존엄한 죽음을 규정하고, 안락사를 앞장서 주장할 종교는 없을 듯 싶다.

도달할 수 없는 목표 - 사후세계의 무궁한 평화나 윤회, 영원한 낙원 등 - 를 설정한 설계가 여지없이 무너질 상황을 짐작조차도 이단시할 것이 분명하다. 아무리 돼지 같은 삶이라도 '저승보다는 이승'이라는 세간의 공론을, 뇌가 멈추는 순간까지만 삶이라는 의료적 판단을 넘어서야 할 종교는 당연히 기피할 존엄사?

-14년 전 일본 뒤흔들었던 고독사 이제 우린 현실로

우선 시계를 14년 전 일본으로 돌리면 흔하디 흔한 기사가 고독사 사건이고, 그 중 일본열도를 뒤흔든 할머니 자매 고독사가 절정을 찍는다. 자식 없는 77세의 쌍둥이 자매가 나란히 숨진 채 발견된다.

드라마적 비극은 세상에 몇 분 먼저 태어난 행동장애 언니를 돌봐주던 동생이 뇌출혈로 급사하고, 그로 인해 식사를 못하게 된 언니마저 동생 시신 옆에서 굶어 죽고 만다. 수십 일이 지나고 나서야 당시 일본 도쿄 남쪽의 가나가와현 주민 자치위원이 두 자매의 시신을 발견해 일본 전체가 들썩거리는 뉴스가 되었다.

실버 문제에 관련한 일본의 복지는 아마 우리나라보다 족히 20년은 선진국일 듯 싶다. 두 할머니의 고독사 당시에도 홀로 사는 노인에게 매일 안부 전화를 묻는 서비스가 시행중이었고, 정기 방문 건강검진도 실시중이었지만 신청하지 않은 노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소극적 행정 구조 형태였다. 두 자매는 신청 안 했지만 안 한 게 아니라 못했다고 보여진다.

이젠 우리 쪽을 돌아보자. 2013.10.02 노인의 날을 맞아 공개된 65세 이상 실버 통계는 600만 명을 넘어 전 인구의 12.2%를 점유하고 2018년이 되면 본격적인 노령화 사회로 진입한다는 엄혹한 현실이 코앞에 있다.

그런 통계는 일본의 1990년대 인구 구조와 동일한 추세로 가고 있다고 한다. 일본은 실버 고독사에 대비한 복지 그물망이 훨씬 더 촘촘하고 세밀하게 갖추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2010년 '무연고 고독사 3만 2000명'이란 TV특집 프로가 방영되는걸 보면 충격이랄 수밖에 없다.

복지 그물망 쳐도 눈멀고 귀 먼 노인에겐 '구멍'

아무리 복지 그물망을 쳐 놓아도 눈 안 보이고 귀 멀면 문서와 거리가 먼 노인들에게 행정적 복지 대책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나마 눈밝은 자식이라도 있어 각종 수급 신청을 대행이라도 해준다면 다행이지만, 그마저 할 수 없는 거동이 불편해 식사는 물론이고 대소변마저 가리기 힘든 노인들의 최후는 고독사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때문에 존엄사를 말한다! 인간의 존엄은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받지만 마지막을 장식할 때에도 존엄할 권리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예전에 눈에 띄지 않던 숱한 요양원, 요양병원의 간판을 보면서 실버 복지의 구멍을 보는 듯 하다.

'신(新) 고려장?' 금년 봄, 요양 병원 앞 공원에 잠시 머물렀을 때 만났던 83세 할머니의 말씀이다. 하필 어버이 날이었다.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간호원과 함께 휠체어에 단정(?)하게 앉아계신 할머니께 말을 건넸는데, 이후 1시간을 넘게 쏟아 던진 말들, 말들..

83세 요양원 할머니 쓸쓸한 한탄

"기저귀 차고 산다는 게 사는 겨?
원래 청양인디, 남편은 8년 전에 가버리고 4남매 다 괜찮게 살어~ 그럼 뭘 혀?
큰애는 유명 공사에 댕기구, 둘째는 큰 기업 냄편 두고 지두 보험해 벌구, 셋째가 간호사여-. 냄편도 장사혀서 쏠쏠하게 살구, 넷째는 지방공무원이구,
셋째가 추천해서 3년째 여그 있는겨.
어버이 날인디 손자 애들 안 왔냐구?
손주 놈들 목소리래도 듣고 싶은디..
다 글렀어. 아래쪽 못 움직일 때 죽어 뻔질라구 수십번 약 먹으까 하다가... 그눔의 자식들 앞길 맥힐까봐- 다 바쁘다는디?! 살기가 워디 쉽나유? 워쨋든 고마워유!"

그럼에도 끝절은 자식 변호였다. 그날, 참 심각하고 착잡했다. 산다는 게 무엇이고 삶의 끝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화두에 묻혀 지내다가 존엄사에 이르렀다.

꽤 유명한 여류 시인이 남편의 극심한 통증을 보다 못해 조망 좋은 호텔에서 동반 죽음을 선택한 기사를 어느 해 접했을 때, 의아했던 물음들이 이해 쪽으로 선회하면서-

주요 종교들이 존엄사를 죄악시하는 가운데, 가족들 동의 하에 연명치료 중단을 허용한 안락사 보도가 있었다. 회생 불가능한 임종 단계의 환자에게 환자 자신의 의사를 확인하거나, 추정할 수 없을 때 배우자와 모든 자녀가 합의하면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는 '생명 윤리의 특위' 권고안 기사이다.(2013.05.17 중앙일보)

존엄사 허용 땐 저소득층보다 부유층이 이용

그나마 단초가 보이는 게 참 다행이다. 뇌손상으로 식물인간이 된 채 기약할 수 없는 시간들을 중환자실에 방치(?)하고 무한정 의료비가 투입되는 구조적 모순을 요양이라는 이름으로 떠넘긴 실버 정책이 진정한 해결책이 아님을 호소한다.

사람으로 사는 최후의 품위를 지키며 숨을 거두는 안락사, 보다 더 진보한 존엄사는 미국의 3개 주와 유럽의 벨기에가 모델이다. 미국의 오리건주(1997년)를 비롯한 워싱턴, 몬테나 3개주는 '존엄사법'에 따라 의사로부터 중증환자 또는 유사한 시한 판정 환자에게 치사량의 진정제를 처방받아 자신의 최후를 자연스럽게 맞이하는 선택이 허용되고 있다.

존엄사가 허용될 경우 중증환자들의 의료비 부담으로 저소득층 환자들의 '조력 자살'이 급증할 것이라는 우려와 달리, 백인에 교육 수준 높고 경제적 부유층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벨기에는 인구의 2%가 안락사로 죽음을 맞이한다. 2002년 허용된 벨기에의 안락한 존엄사는 매년 급증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우리 한국의 농촌 노인 자살률 OECD 국가 중 1위는 무얼 의미할까? 유교 문화권 자존과 끝도 없는 자식에의 집요한 애정이, 존엄사가 허용 안되는 제도 및 풍토의 한계점에 대한 처절한 저항이 아니었을까? 일본이 그토록 부끄러워 했던 1위를 우리가 차지 하고서도 정부는 물론이고 종교계도 관련 사회단체도 심각성을 외면하고 있다.

웰빙 시대 이어 웰다잉 고민하는 시대로

이제 웰빙(Well-being)의 시대를 웰다잉(Well-dying)의 시대로 전환해야 되는 시점임을 지적한다.

얼마 전 부산에서 벌어진 5년만에 발견된 67세 할머니의 쪽방 무연 고독사를 접한 국민들의 마음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해 본다. 이웃이 있다 해도, 복지라는 도깨비가 아무리 살펴준다 해도, 계속 현재 진행형으로 튀어 나올 지금 상황을 타개할 묘책을 강구해야할 이유임이다.

존엄사라는 말조차 금단시하는 모두에게 묻는다. 당장은 아니니 지금의 일이 아닌걸 갖고 떠들지 말라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만은 죽음이 멀리 있다고 착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죽는다는 것은 태어난다는 것과 한치도 다를 게 없다.

자연의 순환처럼, 태어날 때 죽음을 예비하는 것처럼 ,제왕절개로 태어날 시각을 조율하는 것은 누구도 탓하지 않으면서 안락하게 죽을 권리는 절대 없다고 우겨대는 논리는 무언가?

피할 수 없는 죽음이 다가올 때 자기 결정권을 존중해 주는 존엄사법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엄중한 권리임을 깨달아야 한다.

기존병원들이 느닷없이 노인 타이틀을 걸고 요양병원으로 둔갑하고 난데없이 곳곳에 간판 달고 나타나는 요양원에서 '뇌사망'판정날 때까지 청양 할머니처럼 사는 게 진정한 복지 지향시대의 실버모습이라면, 존엄사를 다시금 더듬어 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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