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목민학] 공직자의 사생활

  김학용 편집위원  
 김학용 편집위원

재주는 뛰어난데 품성이 그에 못 미치는 사람들이 있다. 똑똑하고 배운 것도 많고, 어려운 일도 잘 해내는 사람이다. 조직에선 없어서는 안 될 유능한 사람이다. 이와 반대되는 사람들도 있다. 학식과 재주에 비해 품성이 돋보이는 경우다. 능력은 좀 떨어져도 도덕적으로 흠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다.

사람을 쓸 때 어느 쪽을 중시하여야 할까? 능력인가 품성인가? 쓰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맡기는 일에 따라 다르겠지만 과거 벼슬에 나가는 사람에겐 두 가지를 다 요구했다. 공자가 말했다는 '문질빈빈(文質彬彬)'은 이 문제에 대한 답이었다. 문(文)과 질(質)이 모두 빛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벼슬하는 사람은 문질이 빈빈한 사람이어야 했다.

공자가 요구한 공직자는 '문질빈빈'

문(文)은 보통 '글월 문'으로 읽지만 본래는 무늬를 뜻하는 말이다. 한자사전에서 文을 찾아보면 '무늬와 빛깔'의 의미로도 풀이돼 있다. 그러고 보면 모든 글(文)은 생각과 지식을 가지고 꾸민 것에 불과하다. 글과 말로는 그 사람의 식견을 짐작할 수는 있어도 그의 됨됨이까지는 알 수 없다.

질(質)은 문(文)에 상대되는 개념이다. 질은 말 그대로 '바탕'이다. 나무 조각품이 있다면 그 모양새는 문에 해당되고, 조각에 쓰인 나무의 재질은 질에 해당된다. 사람으로 치면 문은 이른바 스펙이고, 질은 도덕성이나 가치관이다. 선비는 공부로서 지식을 쌓아 문을 빛나게 해야 하고 수양(修養)으로 덕을 쌓아 질을 빛나게 한 뒤에야 벼슬길에 나아갔다.

채 총장은 서울대 법대를 나와 검찰총수에까지 올랐다. 그 분야에선 최고의 스펙이다. 전두환 추징금 환수 등 그에 걸맞는 '전과(戰果)'도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문(文)'에서는 정말 빛나는 사람이다. 그가 졸지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혼외 아들 문제로 도덕성을 의심받고 있다. '질(質)'에 큰 흠이 있어 보인다.

검찰총장이 바람피웠다 한들 그게 어떠냐?

  채동욱 검찰총장이 30일 오전 퇴임식을 마친 뒤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을 나서고 있다.  
채동욱 검찰총장이 30일 오전 퇴임식을 마친 뒤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을 나서고 있다.

혼외 아들 문제는 사생활의 영역이다. 공직자라도 사생활은 보호받아야 한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든 말든 개인의 문제로 보는 견해다. 여자 문제에 관대한 프랑스나 이탈리아 정치인들의 사례를 들기도 한다. "검찰총장이 바람을 피웠다고 치자. 그래서 어떻다는 거냐?"는 조의 반문까지 나온다.

이런 의견에는 '사생활과 공적 업무는 관계가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한겨레신문이 조선일보의 혼외 아들 보도와 관련해 실시한 여론조사에도 이러한 인식이 드러나 있다. 한겨레는 '혼외 아들 보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과 함께 '고위 공직자의 공적 업무와는 상관이 없는 사생활 문제이기 때문에 사실관계 확인 없이 함부로 보도해서는 안 된다'는 문항을 선택 항목으로 제시했다. 혼외 아들 건을 공직과 무관한 사생활로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사생활과 공직 업무는 관계가 없을까? 사생활의 내용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여색(女色)의 문제라면 공직과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다산(茶山)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다음과 같이 경계하고 있다. "즐겨 술에 떨어지고 색정(色情)에 빠지면 드디어 옥중의 송사가 해를 넘기고 옳고 그른 것이 뒤바뀌면 일의 기틀은 더욱 얽혀질 것이니 어찌 한탄스럽지 아니한가?"

강원도 안찰사의 ‘로맨스’까지 비판한 정약용

다산은 '칙궁(飭躬 자기 몸을 가다듬음)'조에서 여색(女色)에 대한 경계를 거듭 당부하고 있다. 칙궁조 분량의 3분의 1 정도를 술과 여자 문제에 할애하고 있다. 그것이 비록 '로맨스'에 가깝다 해도 다산에겐 경계의 대상이었다. 다산은 한 기생을 사랑하여 정이 두텁게 들었던 박신(朴信)이란 강원도 안찰사(도지사)의 사례를 소개하면서 그를 혼미(昏迷)한 사람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200년 전 공직자의 윤리교본인 목민심서로 채 총장 사건을 재단할 수는 없지만 옛것이라는 이유 하나로 무시해서도 안 된다.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 라틴계 국가에서 여자 문제에 대해 관대한 것은 전통적인 남성우월주의가 남아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그렇다면 이들 국가야말로 여성 문제에 관한 한 오히려 후진 사회일 수도 있다.

채 총장은 여자 문제로 - 그것이 불륜이든 로맨스든 - 자기 가정을 파탄낸 사람이 되었다. 일부러 가족을 버리고자 한 일은 아니라도 해도 그의 책임이다. 설사 권력의 부당한 '찍어내기' 탓이라고 해도 찍혀 나가지 않도록 자신을 단속하지 못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

가정 파탄내는 사람이 공조직 지킬 수 있나?

자신의 허물로 인해 가정을 파탄내는 사람이 공조직의 수장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사생활이 공적 업무와 무관하다고 볼 수 없는 이유다. 만일 채 총장이 그 여인에게 검사의 지위를 이용하여 경제적 도움을 주었거나 그 여인이 가정부에게 협박한 게 사실일 경우 이게 검사라는 지위와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공직자라 해도 언론이 그의 사생활을 무책임하게 까발려선 안 된다. 권력도 검찰총장이 맘에 안 든다고 해서 찍어내면 안 된다. 그러나 검찰총장이라면 도덕적으론 까발려 질게 없어야 한다. 권력이 찍어내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검찰총장은 그런 인물이어야 한다. 

우리 검찰은 종종 '검찰공화국'이란 비판을 받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졌지만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검찰은 아니다. 검찰을 시녀로 두고 싶어하는 권력과 스스로 권력의 시녀가 되고자 하는 '정치검찰' 탓이 컸다. 검찰 내엔 스스로 권력의 시녀가 되고자 하는 부류가 있기 마련이다. 권력은 이런 정치 검찰을 활용해 검찰을 수중에 넣으려 하고 검찰은 스스로 권력 안으로 들어가 안주하려 한다.

채동욱 총장한테선 적어도 '정치 검찰' 얘기는 안 나왔다. 여권으로부터는 오히려 야당 편이 되어 정부 여당을 괴롭힌다는 의심을 받을 정도였다. '야당 검찰'이란 말이 나온 것 자체가 권력으로부터는 독립성을 유지했다는 뜻이다.

권력에 맞서는 검찰총장의 무기는 도덕성

'채동욱 검찰'은 아무도 못했던 전두환 추징금을 환수하는 공을 세우고 살아있는 권력이 껄끄러워하는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도 소신있게 밀어붙이던 의기양양한 검찰이었다. 그런 검찰의 수장이 자신의 혼외 아들 사건에 무릎을 꿇었다. 혹시나 하던 '검찰 독립'은 다시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다.

검찰은 강자지만 권력에는 약자다. 약자가 강자의 부당한 간섭에 맞설 수 있는 방패는 도덕성이다. 검찰, 특히 검찰총장에겐 능력보다 도덕성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검찰에 요구되는 '정치적 중립' 자체가 이미 능력보다 도덕성의 문제다.

돈 문제든 여자 문제든, 사생활은 자신의 도덕성을 드러내는 숨겨진 거울이다. 누구라도 -언론도 권력자도 - 남의 거울을 함부로 들여다봐선 안 된다. 공직자의 거울이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엄격한 도덕성이 요구되는 고위공직자의 거울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넓고 투명하다는 점을 공직자들이 잊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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