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벨트 굴복’은 정치적으로도 패착

  김학용 편집국장  
 김학용 편집국장

염홍철 시장이 과학벨트 수정안을 그냥 받아들인 것은 잘못된 선택임이 분명해 보인다. 내년 시장선거 출마를 염두에 둔 것이라면 결정적인 패착이다. 염 시장은 과학벨트 수정안의 문제점을 시민들에게 제대로 설명하고 중앙정부와 맞서 싸워야 했다. 그것이 염 시장에겐 내년 시장선거에 출마하고 당선도 될 수 있는 길이었다.

그러나 염 시장은 굴욕적인 수정안을 받아들였다. 미래창조과학부(미래부)가 수정안을 제안했을 때 시장이 수용조건으로 '4대 원칙'을 내세운 것 자체가 대전시로선 수정안이 불리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수정안이 정말 괜찮은 것이라면 조건을 붙일 하등의 이유가 없다.

수정안이 괜찮다면 대전시가 ‘조건’ 붙일 이유 없어

미래부는 대전시가 내세운 ‘4대 원칙’ 가운데 어느 것도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대전시는 미래부와 과학벨트 수정안 MOU를 체결했다. 물론 갑(甲)인 정부와 을(乙)인 대전시가 맺는 계약에서 그 내용을 대전시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5조원 규모가 넘는 국가사업인 데도 정부가 대전시한테 3000억 원이 넘는 돈(부지매입비 분담금)을 대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이 사업은 진행되기 어렵다고 억지를 부리며 내놓은 게 정부의 과학벨트 수정안이다. 3000억 원은 총사업비의 5% 남짓한 수준이지만 대전시로선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다. 10여 년 간 1조원 가량 들어간 대전시 지하철 1호선 사업에서 시가 분담했던 금액(40%)에 육박하는 금액이다. 시가 이 돈을 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미래부의 수정안은 억지다. 원래 계획은 둔곡·신동 지구 100만 평에 과학자와 그 가족 1만 명이 거주하도록 돼 있는, 명실상부한 ‘국제적 수준의 과학타운’이었다. 과학비즈니스벨트의 두 핵심 시설 가운데 하나인 기초과학연구원을 떼내 엑스포과학공원으로 옮기는 게 수정안의 핵심이다. 그렇게 하면 과학벨트가 사실상 둘로 쪼개지는 것이고 규모의 축소도 불가피하다. 이는 '과학타운'은 사실상 없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1만명 과학타운’ 없어지는 수정안은 수정 아니라 파기

정부가 수정안을 내놓게 된 이유가 딱 하나라는 게 더 기막힌다. 정부는 “대전시가 분담금을 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만 이유로 대고 있다. 애초부터 과학공원이 더 유리해서 옮기자는 게 아니다. 그래도 명색이 국가사업으로, 50년, 100년 앞을 내다보는, 노벨상급 과학자도 유치하겠다는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인데 지방자치단체에서 내야하는 5% 때문에 계획을 송두리째 바꾸겠다는 건데 이걸 어떻게 이해할 수 있나? 이걸 어떻게 수정안이라고 부를 수 있나?

수정안이 아니라 원안 파기라고 하는 게 차라리 맞다. 5% 부족한 예산 때문에 과학벨트를 쪼개겠다는 제안은 충청권 주민, 특히 대전시민에 대한 조롱이다. 그러나 대전시는 이런 수정안을 받아들였다. 염 시장은 정부의 공식 제안이 있은 지 며칠만에 수용 입장을 밝혔다.

시민들 가운데 과학벨트에 대해선 원안이든 수정안이든 그 내용을 잘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본다. 과학벨트가 어디에 어떤 규모로 들어올 계획이었는지, 그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아는 시민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과학벨트 기사나 칼럼을 쓰는 기자와 교수들도 대개는 과학벨트 기본계획을 읽어본 뒤에야 수정안이 말도 안 되는 제안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과학벨트 때문에 밤잠 못 잤다는 대전시장

염홍철 시장은 과학벨트 원안과 수정안을 누구보다 꼼꼼히 비교해보았을 것이다. 수정안이 ‘정말 엉터리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리 없다. 대전시장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라는 걸 몰랐을 리 없다. 염 시장의 한 측근은 “염 시장은 과학벨트 문제로 밤잠을 거의 자지 못했던 것으로 안다”고 했다. 

시장의 고민은 엉터리 수정안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처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수정안대로라면 기초과학연구원이 들어올 과학공원은 염 시장이 3년 넘게 올인했던 ‘롯데테마파크 유치’를 위한 부지 아닌가? 이 땅을 '과학벨트 쪼개기 용'으로 내줘야 하는 처지가 염 시장으로선 참담했을 것이다.

염 시장이 굴욕적인 수정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은 갑(甲)인 정부의 요구를 을(乙)인 대전시가 거부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미래부의 제안은 제안이 아니라 갑의 요구였다. 대전시가 말을 안 들으면 과학벨트 사업은 어렵다며 내놓는 수정안은 제안이 아니라 정부의 통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염시장 수정안 수용, 정부 여당과 관계 개선 위한 목적도?

또 다른 이유도 있다고 본다. 정치적인 이유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4월 청와대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과학벨트 문제는 정부가 너무 나서지 말라”고 ‘지침’을 내린 후 정부 여당에선 과학벨트 원안에 대한 ‘불가(不可) 합창’이 이어졌다. 염 시장도 수정안이 단순히 미래부의 뜻이 아니라는 점을 어느 순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지난 대선 때 선진당이 새누리당에 흡수되면서 대통령과 같은 당 식구는 되었지만 염 시장은 새누리당 사람들과 남남으로 지내왔다. 

염 시장은 내년 대전시장 선거 출마를 위해선 이런 관계를 개선해야 할 처지다. 수정안 거부는 관계 개선은커녕 파탄으로 몰고 갈 가능성이 크다. 새누리당으로 시장 출마를 염두에 두고 있다면 수정이 아니라 과학벨트 폐기안(案)이라도 받아들여야 할 입장이다. 염 시장으로선 이 점을 고려했을 수 있다.

하지만 내년 선거를 염두에 둔 선택이었다면 패착으로 결론 날 가능성이 크다. 어차피 칼자루를 정부가 쥐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염 시장의 ‘수정안 수용’에 정부와 새누리당이 크게 의미를 부여할 일은 아니다. 그저 항복할 사람이 항복한 것일 뿐이다. 대전시의 수정안 수용 이후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가 대전에 왔었다. 황 대표는 염홍철 시장과 박성효 시장에 대해 좋은 의견을 내주었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지만 "누구보다 이장우 시당위원장의 노고가 컸다"는 말에 방점이 찍힌 듯했다.

염 시장은 수정안 반대했어야 정치적 회생도 가능

염 시장이 수정안을 받아들였는 데도 정부의 태도가 달라진 건 없어 보인다. 미래부 간부가 대전시청을 찾아 과학벨트에 대해 설명하는 자리도 가졌지만 새로운 내용은 거의 없었다. 대전시가 수정안 MOU에 합의해주면서 미래부에 요구했던 부분도 아직 수용되지 않고 있다.

염 시장으로선 수정안을 반대하는 것만이 시장으로서의 ‘존재감’도 살리는 방법이었다. 시장은 원안 추진을 주장했어야 한다. 그럴 경우 내년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가 되긴 어렵겠지만 진정 시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시장으로 재탄생하지 말란 법도 없다. 

시장은 수정안을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한다. 정부에 반기를 드는 것이지만, 대전의 이익은 물론이고 국가 과학산업의 장래를 위해서도 필요한 것인 만큼 주장의 명분도 확고하다. 염 시장은 수정안의 문제점을 사실대로 알리면서 시민들과 힘을 합해 정부 설득에 나서야 했다.

정치적으론 위험한 선택이지만 지금 염 시장에겐 그게 생존하는 길이다. 정치적으로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각오도 불사해야 한다. 염 시장에겐 그것이 살아나는 방법이다. 내년 선거에 뜻이 있다면 희망을 가져볼 수 있는 길이다. 시장은 자신을 위해서도 수정안을 반대해야 했다.

염, 수정안 수용으로 정부 여당과의 관계 개선 기대했다면..

나는 염 시장이 새누리당 내에서는 기회를 얻기 어렵다고 본다. 합당 이후에도 염 시장과 새누리당은 남남처럼 지내온 게 사실이다. 오히려 남보다도 못한 사이였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면서 염 시장은 더욱 어려움을 겪었다. 정부와 관련된 대전시 사업들은 잇달라 브레이크가 걸렸다. 과학벨트도 롯데테마파크도 사실상 스톱 상태였다. 대전시 공무원들이 중앙정부에 가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염 시장 입장에서 보면 '탄압'에 가까웠다.

염 시장과 현 정권의 ‘관계’ 때문이라고 본다. 염 시장이 배신자 소리를 들으면서 행정도시를 핑계로 한나라당을 탈당했던 ‘과거’가 씻기지 않은 상태이고, 여기에다 지난 대선 과정에선 시민의 이익을 내세워 당시 박근혜 후보의 최대 경쟁자였던 문재인 후보를 공개적으로 만난 ‘죄과’까지 더해진 상태다.

이런 ‘관계’는 대전시가 과학벨트 수정안을 수용한 후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고 있는 듯하다. 염 시장의 수정안 수용이 내년 새누리당 공천 가능성을 높일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뜻이다. 

'창조경제 상' 받은 건 오히려 감정요인 될 수도

시장이 ‘창조경제’라는 이름이 들어간 상을 탄다고 공천에 유리하다고 볼 수도 없다. 더구나 창조경제에 대한 공적도 없는데 언론사에다 적지 않은 광고비까지 지불하고 타는 상이라면 안 타느니만 못하다. 내년 지방선거 후보 공천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는 박 대통령은 이런 식으로 상 받는 건 싫어할 사람 아닌가? 박 대통령 자신이 주창하는 '창조경제'가 들어간 상이라 해도 그렇게 받은 상은 박 대통령에겐 감점 요인일 것이다.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라도, 대전시장은 시민들에게 대전의 미래와 관련된 중요 현안에 대해 솔직하게 전달해줄 의무가 있다. 대전시장은 150만 시민을 법적으로, 정치적으로, 행정적으로 대표하는 제1의 책임자다.

어떤 이유로든 염 시장은 이번 과학벨트 문제에 대해선 어느 때보다 당당하게 나갈 필요가 있었다. 박 대통령에게도 ‘수정안은 정말 대전시민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호소했어야 한다. 그게 오히려 대통령과 정부를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염 시장은 행정도시(세종시) 문제는 사실 대전시의 문제는 아니었는 데도 탈당까지 불사했으면서 정작 대전시 미래를 좌우하는 과학벨트가 반쪽으로 쪼개지는 데도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금이라도 과학벨트 문제점 사실대로 알려야

과학벨트 문제는 염 시장에게 정치적으로 회생할 수도 있는 기회였지만 수정안에 굴복하면서 기회를 날리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이라도 대전시장은 입장을 바꿔, 과학벨트의 문제점을 시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야 한다.

광역시장으로서 수정안을 무조건 반대하고 거부하는 건 무책임한 일이다. 그러나 엉터리 수정안까지 찬성표를 던질 수는 없다. 수정안의 문제점을 시민들에게 알리고 조목조목 비판하며 정부를 설득하는 게 왜 무조건적인 반대인가? 정부가 아무리 갑이고 지방자치단체가 을이라고 해도 이런 정도의 저항은 해야 되는 것 아닌가? 대전시장이나 충남도지사를 왜 선거로 뽑는가? 관선 시도지사처럼 정부에 고분고분만 하지 말고, 말도 안 되는 정부의 요구에는 맞대응하고 저항하라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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