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길 충남대교수  
 정용길 충남대교수

지난 9일 미래창조과학부가 대전시에 보낸 공문이 공개되었다. 내용의 핵심은 기초과학연구원(IBS)을 엑스포 과학공원에 입지시키겠다는 것이다. 이 제안에 대해 민주당과 시민사회단체는 과학벨트를 축소하고 부지매입비를 대전시에 전가하려는 꼼수라면서 즉각 반발하고 있다. 반면에 대전시와 새누리당은 일단 과학벨트 사업의 물꼬를 텄다는 차원에서 신중하지만 반기는 기색이다.

미래부의 구상은 형식과 내용면에서 너무나 오만하고 불합리하며, 대전 시민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 만일 과학벨트에 대한 기본계획을 변경하여 과학공원에 IBS를 들어서게 할 계획이면 대전시와 사전조율을 거치거나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가 선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미래부는 정부 출범 이후 3개월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달랑 공문 한 장을 통해 정부의 구상을 대전에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있다. 비민주적 행정이고, 전형적인 ‘갑을관계’의 모습이다.

오만하고 불합리한 미래부

공문의 내용에서도 구체성이 없는 총론 수준에 불과한 것을 대전시에 보내면서 조속한 의견 회신을 요청하고 있다. 만일 과학공원에 IBS가 들어서게 되면 여타 다른 시설과 공간배치,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비용과 일정계획 등을 함께 밝혀야 한다. 중이온 가속기와 IBS를 인접한 지역에 두고자 했던 것은 두 기관의 연계를 강화하고 시너지 효과를 기대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래부의 제안을 판단할 구체적인 자료와 내용이 전무한 상태에서 어떻게 조속한 시일 내에 답을 하라는 것인가?

만일 미래부가 제시한 대로 과학공원에 IBS가 들어오게 되면 애초에 둔곡지구에 들어설 예정이었던 IBS 부지는 필요없게 되고, 그만큼 과학벨트 사업이 축소되는 결과를 가져 온다. 이는 KDI에 용역을 주어 IBS 부지면적을 절반 수준으로 축소하고자 하는 기획재정부의 의도를 그대로 담고 있다.

과학공원에 들어오면 결국은 대전시가 부담하는 것

과학공원에 IBS가 들어오게 되면 정부가 부지를 매입하는 것이 아니고 무상으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대전시가 IBS의 부지매입비를 전부 부담하는 결과가 된다. 설령 대전시에 임대료를 지불한다 하더라도 그 금액은 미미한 수준에 불과할 것이다. 이는 그동안 대전시와 지역 정치권이 줄기차게 주장해 온 전액 국비부담이라는 주장과 배치되는 것이다. 얼마 전 새누리당 국회의원들과의 간담회에서 전액 국고지원을 하겠다는 미래부 장관의 발언은 허언에 불과하였다는 말인가?

과학벨트 사업에 대한 박근혜 정부의 일처리 방식을 보면 이명박 정부 시절 충청인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고 분노케 한 세종시 사태가 재현되고 있는 느낌을 지워버릴 수 없다. ‘제2의 세종시 사태’가 촉발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두 국책사업의 추진동기, 대선 과정에서의 약속, 그리고 대통령이 되고 나서 보이는 행동 등에서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제2의 세종시 사태로 번지나?

세종시에 행정도시를 건설하겠다는 구상은 원래 참여정부의 작품이었기 때문에 이명박 전 대통령은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대통령 선거에서 충청인의 표를 얻기 위해 원안대로 추진할 것이며, 명품도시로 건설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그 원안은 폐기되고 수정안을 만들어 다른 성격의 도시를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이 전 대통령은 명분도 실리도 잃어버리는 참담한 결과만 얻었을 뿐이다.

작금에 과학벨트 추진을 두고 벌어지고 있는 박근혜 정부의 모습을 보자. 과학벨트 사업은 이명박 정부에서 기획한 사업으로서 박근혜 대통령은 이 사업의 필요성에 대해 크게 공감하지 않은 듯이 보였다. 다만 박빙의 승부가 예측되는 지난 대선에서 충청인의 표가 절실했기 때문에 과학벨트의 성공적 추진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선 국고지원을 해서라도 과학벨트의 차질 없는 추진을 약속했다. 그러나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는 과학벨트 사업을 축소 내지 지연하려는 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충청인과의 약속을 번복하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4월 “정부가 너무 나서지 말라”며 사실상 과학벨트 사업에 대해 제동을 걸기까지 하였다.

박근혜 대통령, 자신의 정치적 자산 훼손하지 않아야

과학벨트 사업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처리되어서는 안 된다. 과학벨트 총사업비 6조원 중에 부지매입비는 7,000억 정도이다. 그 절반 수준이면 3,500억이다. 대전시로 보면 감당하기 어려운 액수이지만 중앙정부 입장에서 보면 올해 정부예산의 0.1%에 불과한 것으로 그다지 큰 금액이 아니다. 더구나 과학벨트 사업은 박근혜 정부의 핵심정책인 ‘창조경제’를 견인할 역할을 할 수 있으며, 국가의 미래 성장동력과 직결되어 있다. 3,500억이라는 돈 때문에 이런 사업이 축소되거나 지연되는 것은 소탐대실(小貪大失)의 전형이다.

일부 언론에서 제기한 바와 같이 단순히 비용 문제로 과학벨트 사업이 지지부진 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이제 대통령이 된 이상 그런 지엽적인 문제로 인해 국가적 사업이 차질을 빚어서는 안 된다.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아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약속과 신뢰의 정치인으로서 이미지를 갖고 있다. 특히 충청인에게는 더욱 그렇다. 불과 몇 천억 때문에, 또는 개인적인 배신감으로 인해 그처럼 소중한 정치적 자산이 훼손되는 우(愚)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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