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 이사람] 행정학 교수들이 뽑은 민주통합당 박범계 국회의원

   
민주통합당 박범계 국회의원은 행정학과 교수들이 자신을 지역 사회를 이끌 주목할 만한 정치인으로 꼽아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면서 자신이 따랐던 故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바람’이라며 애뜻한 감정을 표시했다.
행정학 교수들이 향후 지역 발전을 이끌 주목할 만한 정치인으로 가장 많이 뽑은 민주통합당 박범계 국회의원은 사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 사람이다. 사법연수원 시절 변호사이던 노 전 대통령을 만난 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그를 지지하기 위해 법복을 벗은 그였다. 어찌보면 가장 안정적이고 사회로부터 선망의 대상인 판사를 그만두게 만든 사람이 노 전 대통령였던 셈이다.

박범계 의원, 노무현 전 대통령 만나 새로운 삶 살아

그 덕분에 박 의원은 청와대에 입성하며 비서관 생활을 했다. 하지만 이제 박 의원은 노 전 대통령을 가슴에 묻는다고 한다. 그는 "그분(노 전 대통령)의 정신과 영혼은 마음속에 간직해야 한다"라며 "이제 정치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노무현을 얘기하면 안된다"고 분연한 심정으로 얘기했다.

박 의원은 그러면서 "저에게 노무현은 바람이었다. 머무르지 않고 지나가는 바람"이라며 "한편으로 그립기도 아쉽기도 하다"고 토로했다.

박 의원은 정치적인 포부를 묻는 질문에 "공정한 룰이 지켜지는 사회. 힘없는 사람들이 큰 일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 어떤 자리에서 뭐가 되는지는 그 다음"이라면서도 "때가 오면 큰 선거에도 도전하고 싶다. 큰 선거를 목표로 착실하게 내실을 기하고 있다"고 야망을 드러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인생 롤모델이라고 밝힌 박 의원은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이 패배한 이유를 묻자 "50~60대 들에게 자녀를 위해 투표해 달라고 했지만 그 분들이 자신들의 미래를 불안해 했다"며 "그 불안을 민주당이 해소해 주는 데 실패했다. 또 우리의 대화법과 표현 방식이 거칠고 무례하기 까지 했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박 의원은 그러면서 "한국 정치사에서 박범계 만의 정치를 보여주겠다"라면서 향후 자신의 모습에 대해 자신감을 내비쳤다.

다음은 박 의원과 일문 일답.
- 행정학과 교수들이 주목할 만한 정치인으로 뽑았다. 소감이 어떤가.
“감사하다. 교수들이 평가해 줬다는 것은 시민들이 정치인으로 박범계를 평가해 주고 인정해 주는 것이어서 고맙고 유쾌하다. 진보를 표방하면서도 합리적인 대안을 갖고 지역과 나라에 대한 걱정과 설계를 하는 것의 평가라고 생각한다.”

- 살아온 이력을 말해 달라.
“1963년 충북 영동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소아마비를 앓은 장애인들이셨다. 아버지는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고민하다가 제가 어린 시절 행방불명됐다. 벌써 40년 전이다. 실종 신고했지만 오랜 기간이 흘러 지금은 사망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어머님은 2004년 제가 국회의원 경선 떨어지고 난 이후 12월 31일 돌아가셨다.”

날건달에 문제아였던 박범계가 사법시험 합격
판사로 까칠... 노무현 위해 사직 '결단'

- 어려서 아픔을 겪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해 달라.
“초등학교를 다니다 제법 공부를 잘해 서울로 가라고 해서 5학년때 전학을 갔다.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때 아버지가 행방 불명된 뒤 어머니가 홀로 어렵게 키웠다. 그때부터 주변 환경에 대한 반항심이 커졌다.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부정적이고 비판적이었다. 소위 말하는 문제아가 됐다. 날 건달이었다. 그러다 자퇴했다. 방황하다가 검정 고시로 고교를 졸업했고 연세대를 1985년에 입학했다. 제 또래는 1981학번인데 군대를 갔다 오면서 늦어졌다. 방황할 때 충청도 사람만의 혈통 주의로 할아버지께서 아버지처럼 키워 주셨다. 장손으로서 역할, 특히 5남매의 장남으로 가문을 일으켜 달라는 할아버지의 가르침이 계셨다. 그러던 중 이렇게 살면 어머니에 대한 못된 일이라는 자각이 다가오면서 정신을 차리게 됐다.”

- 판사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

“조부께서 판사에 대한 바람이 강하셨다.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판사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법학을 전공하게 됐다. 하지만 대학에 입학했을 때가 우리 나라가 가장 시끄러울 때였다. 민주화 항쟁도 했었다. 1987년 대선에서 패배하면서 학생 운동만으로 세상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자기 일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 법관에 대한 욕심을 키웠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1989년 졸업한 뒤 1990년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연수원 23기다.”

   
박 의원이 자신의 살아온 이력을 말하고 있다.
- 어디에서 판사를 지냈는가.

“1994년 서울 남부지법에서 법복을 입으면서 판사로 임용됐다. 300여명 동기 중 상위권이었다. 연수원에 있을 때 연수원에서 발행되는 사법연수지의 편집장을 지냈다. 이 때 부산에서 변호사 생활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났다. 판사로 시작한 뒤 진보적인 모임인 우리법 연구회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서울지법과 전주지법을 거쳐 조부모님과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대전 향판을 지원했다. 그래서 2001년 대전지법으로 발령됐다.

- 법복을 벗은 이유가 뭔가.
“2002년 10월 18일 김민석 전 국회의원이 당시 정몽준 대선 후보 지지를 선언 했다. 당시 저는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고 있었는데 김 전 의원의 정몽준 후보 지지 선언에 분개하면서 사표를 썼다. 노무현 후보 지지를 선언하면서 법복을 벗었다.”

- 판사에 대한 미련은 없는가.
“없다. 예전에 비해 법원이 민주화됐다. 참여정부 시절 사법 파동을 거치면서 평판사나 단독 판사 회의를 통해 법원도 많이 개혁이 이뤄져 지금은 다시 돌아가고픈 생각이 없다.”

“노무현이면 제 바람대로 세상 바꿔줄거라 생각”

- 정치는 언제부터 시작했다고 봐야 하나.
“2002년 노무현을 지지하면서 시작됐다. 제가 공직을 사퇴하고 노무현 후보를 처음 만났는데 첫 마디가 담배를 권했다. 피라고 해서 피웠는데 제대로 못 피우고 뻐꿈하고 담배를 피우니 자신도 뻐꿈이라고 했던 것이 기억난다.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 법률특보를 맡아 당선시켰다.”

- 정치에 발을 들인 이유가 뭔가.
“판사 출신으로 원칙과 소신이 있었는데 소신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노무현 후보가 얘기했다. 소신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데 노무현 후보가 지도자를 하겠다며 출마해 당선됐다. 노무현 후보의 삶과 함께하면 제 바람의 일정 부분이 달성되겠다고 생각해 시작했다.”

- 단체장에는 관심이 없는가.
“전혀는 아니지만 저를 뽑아준 주민들은 저에게 전국적인 지명도를 갖고 있는 국민의 국회의원이 되달라는 바람이 있다. 이번 대선에서도 유권자들이 저를 믿고 문재인 후보를 찍어줘 서구을 지역구에서 만큼은 2.4% 이겼다. 아직까지는 단체장보다는 일 잘하는 국회의원이 되고 싶다.”

- 국회의원으로서 포부는 무엇인가.
“경쟁의 룰이 공정해야 하고 공정함이 지켜지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 사회적 약자도 강자에게 치이지 않고 공존해서 살 수 있는 룰. 그것이 지켜지도록 노력하고 싶다. 사회적으로 힘없는 사람들이 큰일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있다.”

- 정치적인 포부나 꿈을 알고 싶은데.
“정치를 바라보고 몸을 담은 지 10년 됐다. 자기를 혁신하지 않으면 안된다. 뭐가 되는지는 그 다음이다. 때가 오면 큰 선거에도 도전하고 싶다. 큰 선거를 목표로 착실하게 내실을 기하고 있다.”

노무현 따라 법복 벗고 4번째 도전만에 당선 기쁨
판사로서 용맹(?)했던 그..정치인으로 새로운 인생

   
박 의원.
- 정치에 본격적으로 발을 디딘게 언제인가.
“2004년 서울 영등포 을에 전략 공천을 거절하고 대전으로 내려와 서구 을에서 도전했다. 당시 故 구논회 전 의원과 경선을 벌여 패배했다. 정치를 한다면 대전에서 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고향 영동이 아닌 대전에서 정치를 시작했던 것이다. 대전의 정치가 바뀌면 한국이 바뀐다고 생각했다. 2007년 구논회 의원의 사망으로 보궐선거가 있었는데 심대평 전 선진당 대표가 출마하자 심 전 대표의 손을 들어주고 출마를 포기했다. 2008년 총선에서는 대통합민주신당 공천을 받고 출마했으나 14%의 득표율로 2등해 낙선했다.”

- 법조인과 정치인, 어떤 것이 적성에 맞다고 보는가.
“정치가 맞다. 저는 판사 시절에도 피가 끓었다. 법관은 냉철해야 하기에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 시끄러운 판사였지만 정치는 시원 시원하다고 생각한다.”

- 어떤 정치를 하고 싶은가.
“한국 정치사에서 박범계만의 정치를 보여주고 싶다.”

- 그럼 어떤 정치인이 되고 싶은가.
“분명한 색깔을 내는 정치인이고 싶다. 보수와 진보, 이념 구도 바람직하지 않다. 저는 굳이 선택하면 진보지만 그 보다는 공정한 것을 좋아한다. 어느 쪽이 공정한가, 보다 진보적인 사회가 공정한 것 같다.”

'18대 대선 패배' 반드시 반성 필요한 민주당
"열정 갖고 큰 선거위해 지금부터 준비 중"

- 판사 박범계는 어떤 사람이었나.
“용맹했다. 당시 법원 분위기는 사법 관료화였다. 답답하고 갑갑했다. 하고 싶은 얘기들을 법원 내부 게시판에 글을 써서 올렸다가 발칵 뒤집혔다. 제가 법복을 벗을 때 당시 법원장이던 최병학 법원장이 당선 가능성도 없는 사람을 위해 사직한다고 기가 막힌 일이라고 했다.”

- 기억에 남는 판결이 있다면 무엇인가.
“1996년 연세대에서 인문관이 소각될 정도로 한총련 사건이 발생했는데 학교에 들어가다 검거된 학생들을 대상으로 집시법으로 첫 영장이 들어왔는데 기각했다. 언론에서 좌경 용공세력이라고 비판했었다.”

- 박범계에게 노무현이란 어떤 존재인가.
“바람이다. 이 시대의 바람이었다. 바람은 머무르지 않고 지나가는 것이다. 한편으론 그립기도 아쉽기도 하다. 집에 가면 봉하마을에서 찍은 밀짚 모자를 쓴 노무현 대통령 액자가 있는데 집사람에게 오늘(12월 20일)부터 내리라고 했다. 이제는 노무현을 떠나 보낼 때가 됐다. 이제는 잊어야 한다. 진짜 떠나 보내야 한다. 정신과 영혼을 마음속에 간직해도 이제는 정치하는 사람들이 노무현을 얘기하면 안된다.”

- 18대 대선 결과에 대해 말해 달라.
“패배했다. 깊은 반성을 해야 한다. 그리고 새롭게 변해야 한다. 50~60대들께 자녀를 위해 투표해달라고 했는데 그 분들은 자신들의 미래에 불안해 했다. 그걸 민주당이 해소해주는 데 실패한거다. 여기에 여러 측면에서 특히 우리의 대화법과 표현 방식이 거칠고 무례하기 까지 했다. 경제적인 전쟁이 아니라 정서적인 것이어서 더욱 아쉽다.”

- 인생 롤모델은 누군가.
“이순신 장군을 좋아한다. 어려운 시대적 환경 속에서도 대의 명분을 중시하셨고 배포와 기술, 조예를 갖춘 인물이셨다.”

- 고시 동기 중 대표적인 사람은 누군가.
“다들 현역이지만 국회의원을 지낸 강용석씨가 있다. 그렇게 살면 안된다고 말하고 싶다.”

- 본인의 장점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열정의 소유자다.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한다.”

- 본인의 단점은 무엇인가.
“융통성이 떨어진다. 타협을 싫어한다.”

- 공직을 떠나 정치에 입문할 때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나.
“부인이 3일 동안 밥도 안 먹겠다고 했다. 하지만 끝내 달랬다.”

- 주량은 얼마나.
“일주일에 3~4번 정도. 소주 한병쯤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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