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남의 잔소리] 55

<원문> 季文子(계문자) 三思而後(삼사이후)에 行(행)하니 子(자) 聞之(문지)하시고 曰(왈), “再斯可矣(재사가의)니라.” 

<풀이> “계문자”는 세 번 생각해 본 후에야 비로소 행동에 옮겼다. 공자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두 번이면 되느니라.”하셨다.

<여설> 노나라의 대부(大夫)인 ‘계문자’라는 사람은 일을 행함에 있어서 三思而後行.(삼사이후행) 즉 3번(지나치다는 의미) 생각한 다음에 행동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러한 지나치리만큼 신중한 계문자에 대한 일화를 소개하면 계문자가 이웃나라인 ‘진’나라를 예방하게 되었는데 마침 진나라 임금이 중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계문자’는 출발에 앞서 진나라 임금이 상을 당했을 경우, 가기가 행할 예를 미리 알아보고 떠났다고 한다.

‘주자’는 이러한 ‘계문자’에 대해 생각이 지나침이라고 비판하였다.
어쨌든 ‘계문자’라는 사람은 지나치리 만큼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지나치리만큼 매사를 충분히 준비하고 지나치리 만큼 생각한 후에 행동에 옮기는 인품의 소유자였다.

공자는 이러한 계문자의 三思而後行(삼사이후행) 즉 지나치리 만큼 신중히 생각함에 대해 再斯可矣(재사가의) 즉 ‘두 번이면 된다.’
다시 말해 '생각이 너무 지나쳐도 안 된다.‘라고 하였다.
또한 노나라의 ’선공‘이 왕위를 찬탈하였을 때 ’계문자‘는 부도덕한 ’선공‘을 토벌하지 못했고 도리어 그를 위해 제나라 사신으로 가서 뇌물을 바쳤다.

이는 ’계문자‘가 사사로운 마음이나 욕심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의나 대의명분 보다는 자신의 사사로운 마음 때문에 정의를 버리고 불의와 타협한 ’계문자’였지만 그는 처음부터 왕위를 찬탈한 ’선공‘편에 서서 동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노나라의 대부로서 ’문공‘ ’선공‘ ’성공‘ ’양공‘ 4대를 섬기면서 깊은 신뢰를 쌓은 인물인 ’계문자‘가 ’선공‘이 왕위를 찬탈하여 왕이 되려할 때 분명 ’계문자‘는 대의명분에 어긋난 일이라고 반대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자꾸 생각이 깊어지다 보니 자기의 사심과 욕심이 생겨나고 그리하여 대의명분을 버리고 오히려 선공을 왕위에 오르도록 적극 도와주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사람이 어떤 일을 결정하거나 행함에 앞서 여러 번 생각하여 신중히 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생각하다보면 자칫 대의명분보다는 사심이 앞설 수가 있게 된다.
예를 들면, 어렵게 사는 친구를 보고 도와주어야겠다고 작정했는데 그 뒤에 자꾸 생각해보니 내가 저 친구를 도와주면 나중에 나에게 어떤 보답이 올까 하는 사심 이 생겨나게 되고 그로인해 도와주어야겠다는 대의명분이 흔들리게 된다.

그러므로 생각에 있어서는 모자라지도 지나치지도 않는 생각의 중정(中正)을 찾는 것이 가장 지혜롭고도 현명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매사에 있어서 생각의 중정(中正)을 찾기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결정하거나 판단함에 있어서 그 일이 대의명분에 어긋나지 않는가를 먼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만약 그 일이 대의명분에 어긋난다면 과감히 떨쳐버려야 할 것이고 대의명분에 맞는다면 결단성 있게 실천해야 한다.
예를 들면 음주운전하지 말아야하는 것은 대의명분에 맞는 일이기 때문에 앞뒤 생각할 것 없이 결단성 있게 실천해야 한다.
그런데 지나치게 생각하게 되면 오히려 대의명분 실천을 방해하는 방해의 마음, 유혹의 마음, 변명의 마음이 생긴다.

그리하여 대의명분의 마음을 잃어버리게 된다.
예를 들면 ’음주운전을 해서는 안 된다.‘는 대의명분을 실천하려 작정했는데 또다시 생각해 보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 ’딱 한잔만‘하는 변명의 마음, 유혹의 마음이 생겨 음주운전을 하게 되고 화를 초래하게 된다.

이처럼 대의명분을 흔들게 하는 사심(私心)의 마음, 즉 변명과 유혹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어떤 일이든 그 일이 大義名分(대의명분) 즉 사람으로서 응당 지켜야 할 도리나 본분에 맞는다면 더 이상 생각을 주저하지 말고 과감하게 실천하는 의지가 필요하다.

<< 한자어 마당>>

▲ 籠城(농성) : 籠(대그릇 롱) 城(성 성)은 ‘어떠한 목적을 위해 집이나 방 혹은 자기가 있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붙박이로 있는 것’을 뜻한다.

• 원래는 성문을 굳게 잠그고 전투를 하지 않는 것을 ‘농성이’라고 한다.
고대전투에서는 성문이 열리지 않으면 실질적인 전투가 어려웠다.

• ‘농성’은 한군데 모여 꼼작하지 않는 것이고 ‘시위’(示威)는 함성이나 구호로
자신들의 세를 과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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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남 교수는 서예가이며 한학자인 일당(一棠)선생과 '정향'선생으로 부터 한문과 경서를 수학하였다. 현재는 대전광역시 평생 교육문화센터와 서구문화원 등 사회교육기관에서 일반인들에게 명심보감과 사서(대학  논어  맹자  중용)강의 활동을 하고 있다. 금강일보에 칼럼 ?김충남의 古典의 향기?을 연재하고 있다. 

또 어려운 한문이나 경서의 뜻을 쉽고 논리적이고 현대적 정서에 맞게 강의 할 수 있도록 하는 강의서를 집필중이다(김충남의『명심보감』, 김충남의『대학』, 김충남의『논어』, 김충남의『맹자』, 김충남의『중용』, 김충남의『생활한자』, 김충남의『고사성어』) 손전화 010-2109-5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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