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구 석남리에서 몰매를 맞아가며
<기고> 송명석 (영문학 박사, 무일교육연구소장)
 
2012년 01월 21일 (토) 09:26:23 송명석 sms8213@hanmail.net
 
   
 

“새벽 2시쯤이었다. 갑자기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고함소리가 잠결에 들려왔다. 나는 옆에 자고 있는 동료 선생님을 흔들어 깨웠다.

문밖에는 이상한 기운이 맴돌았다. 이 야심한 시간에 마을의 몇몇의 청년들이 문을 박차고 우리들 숙소인 마을 회관으로 난입했다.

이들은 다짜고짜 우리들을 때리고, 협박하고, 행패를 부리는 것이었다. 자기네 여동생들을 가르친다는 미명하에 엉뚱하고 불순한 의도로 여기에서 야학을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날 새벽 우리는 난생 처음으로 무자비한 폭력과 욕설로 만신창이가 되어 눈물을 흘려가며 뚠 눈으로 밤을 새워야 했다. 그리고 아침에 다시 공주로 향했다. 강의를 들어야하기 때문이었다. 공주사범대학시절 어쩌면 다른 친구들 보다 24시간을 두 배로 사는 셈이었다.”

시계는 바야흐로 1982년도 약 6월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마 대학 2학년 때 인걸로 기억한다.

모내기를 하고 논두렁에서 개구리 울음소리가 심야에 많이 들렸으니까 여름쯤일 것으로 생각된다.. 새벽 1시가 다 되어야 비로소 음침하고, 썰렁한 창고 같은 마을회관 속으로 우리는 돌아올 수 있었다.

수업을 끝내고 학생들을 먼 길까지 바래다주었다. 논두렁 밭두렁을 지나 작은 손전등으로 길을 비춘 채 그들을 안전하게 귀가시키던 그 당시는 어려움을 모르고 그저 막연히 좋은 뭔가를 하고 있다는 그 기쁨에 나름으로 열심히 했던 것 같다.

그 당시 공주 유구에는 방직 공장이 크게 성행하던 시절이다. 그 곳에서 일하던 아가씨들은 가난의 대물림으로 중·고등학교 과정을 공부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 당시 공주사대 학생들이 자기 전공과 관심분야에 맞춰 자생적 야학을 운영하며 예비 교사의 길을 경험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던 영어, 역사, 한문을 가르쳤다.

한창나이에 동기들은 MT, 취미활동, 여행, 아니면 데이트를 즐기며 낭만을 만끽하던 것에 비하여 야학에서 봉사활동을 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무엇이 우리를 그곳으로 발길을 돌리게 하였는지…. 나는 그 누구도 시키지 않은 야학의 길에 들어섰는지 모르겠다.

암튼, 내가 야학을 했던 이유는 가장 단순하게 말한다면 '좋아하니깐' 대학에 입학하여 가입한 유일한 동아리가 '야학'동아리였고, 군 제대 후에도 찾았던 것이 '야학'이었고, 지금도 학교에 있으면서 관심을 갖고 가끔씩 눈물의 현장, 공주 유구면 석남리 언덕 위 하얀 집(마을회관)의 흔적을 가끔씩 방문하곤 한다.

남들은 서예다, 칸타빌레(기타연주), 테니스와 같은 자기 특기 살리기 중심으로 동아리를 들어 활동하는데 비해, 나는 봉사와 야학을 주로 하는 RCY(Red Cross Youth)-청소년 적십자 동아리에 가입하여 대학 생활을 시작하였다.

지금 학생들을 가르치는 소명을 구현하는 교사로서 무슨 상관관계가 있기에 내 뇌리를 강하게 치는 걸가?

원초적인 자문이지만, 많은 길 중에서 사도의 길을 걸어가라는 나름의 신의 게시는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불현듯 적당히 꾀 나는 요즘, 약 25년의 성상을 멋도 모르고 앞만 보고 달려온 교사의 길을 지금 그리고 이 방학을 통해 반추해본다.

지금도 턱없이 부족한 교사지만, 그나마 버틸 수 있는 것은 30년 전 라면봉지에다 쌀 담고, 김치 한 그릇을 준비하여 비포장 도로 유구 길을 오가던 그 순수함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누가 시켜서 하면 아마 못했으리라. 대학 방학은 거의 3개월 정도 되는데, 3분의 2정도는 아마 유구에 있는 그 야학, 마을회관에서 보낸 듯하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이 한창 바쁜 시기에 그 분들을 뒤로 한 채 “야학 봉사활동을 간다며” 청양의 화성 산골짜기를 빠져나올 때 뒤통수가 엄청 땡 기던 그 기억들이….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부모님에게 너무 죄송하고 또 죄송하다. 그렇게 나의 유구 야학생활은 시작되었다. 아마도 그때부터 조금이나마 내겐 이런 교사의 피가 흘렀는가 싶다.

그렇게 동고동락을 같이하던 동료들과 학생들이 무척이나 그립다. 그리고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자못 궁금하다.

물론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소신껏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배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그때, 그 시절의 제자들과 자기를 버리고 공익과 가르침의 순수성을 위하여 그 아까운 청춘을 할애한 야학의 예비교사들은 분명히 역사와 자신의 존재감을 위하여 소신껏 자기 역량을 발휘하리라 여겨진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수업을 통하여 항상 학생들에게 배운다. ‘가르치는 것은 배우는 것이요, 배우는 것, 또한 가르치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우리는 끊임없는 배움의 연속선상에서 소외 받는 것들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의 예의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야학이 주는 중요한 의미이다.

그 당시 그 즐거움 때문에 '야학'의 기쁨에 중독되어 김매는 부모님의 고단한 모습을 뒤로 하고, 정신없이 버스에 몸을 실었던 것 같다.

비록 정식 교원은 아니었으나, 난 나 스스로가 나름 '교사'라고 생각하며 그들과 생활하는 것을 참 자랑스러워했다. 그래서 지금 내 교직 인생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모든 사람의 못 배운 한(恨)을 풀지는 못하였으나, 적어도 몇몇은 그 한을 풀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리고 소외된 사람들이 적어져, 결국에는 야학이 필요 없는 그날까지 나는 계속 '수업'을 했고, 중견교사인 지금도 그런 마음으로 수업에 임하고 있다. 내 이 모습이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는 늘 되 뇌 인다. “언젠가는 정말 뭔가 다른 교사가 되고 싶다”고. 그 유구의 비명과 절규가 헛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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