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야할 이야기]계룡건설 이인구...한밭운동장

   
부도난 회사 현장을 부도 위험을 무릎쓰고 참여한 계룡건설에서 한밭공설운동장 공사를 잘 마무리하면서 갑년 체전을 대전에서 치룰 수 있었다.
창업 당시 50개 회사 가운데 50위의 서열로 시작한 계룡건설은 5년 만에 5위의 상위 중견 건설회사로 부상했다. 그리고 충남건설협회는 나를 지부장으로 선임했고 대한 건설협회는 나를 이사로 선임해주었다.

1979년은 대전에서 개최하는 전국체전 준비에 바빴다. 1977년 정석모 충남지사는 종합경기장 공사를 지명입찰에 부쳤다. 도내 업계에서는 도내 업자를 지명에 포함시켜 줄 것을 촉구했으나 도 당국은 전국 업체 7개사를 지명하고 별로 알려져 있지 않던 동서 건설이라는 회사가 수주를 하였다.

1978년 가을에 이 회사는 부도를 냈고 종합경기장 건설 현장은 기초공사가 다 되지 않은 상태에서 중단됐다. 이대로는 국가 행사를 타 도로 옮기는 방법 밖에 없었다. 새로 부임한 손수익 지사가 건설협회 지부장인 나를 초청하여 대전의 5대 건설사가 합동으로 이 공사를 마무리 해 달라고 권유했다. 나는 5개 회사 사장들을 모아 숙의했다.

“언제는 우리의 요구인 지명을 거절하고 이제야 살려달라고 하는가. 또 기일 내 준공은 공기 상 불가능하다. 지부장은 왜 그런 주문을 맡아 왔는가.”
“만일 여러분이 거절하면 계룡 건설 단독으로 이를 맡아도 좋은가.”
“죽으려면 무슨 짓을 못하겠소. 하려면 해보시오.”

나는 즉시 손지사를 찾았다. 계룡단독으로 마무리를 짓겠다고 했다.
   
현장을 둘러보는 김보성 당시 대전시장.


“5개 회사가 합동으로 시공하면 될 것도 안 됩니다. 24시간 주야 돌관공사를 해야 하는데 그런 령이 서지 않습니다. 도지사의 책임과 이인구의 명예를 걸고 해내겠습니다. 애로사항은 지사님이 직접 해결해 주시오.”

도지사는 결심을 하고 내무국장, 건설국장을 불렀다.
“그동안 현대건설에 구원을 청했는데 현장 사정을 검토한 결과 못하겠다고 거절했다. 충남 연고인 삼부토건과 삼환기업에 구원을 요청했는데 ‘다 먹은 김칫독에 왜 우리가 빠지는 가’라며 거절했다. 계룡건설이 해낸다고 한다. 어떠한가.”

그러자 국장들이 한 마디씩 했다.
“조그마한 계룡 건설이 해낼 수 있다고 믿어지지 않습니다.”
만류의 이야기였다.
“국장님, 세계 최강의 미국 군대가 월남에서 죽을 쑤고 있는데 한국군 2개 사단이 가서 해결사 노릇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손수익 지사는 마지막 결단을 내렸다.
“이 일로 대통령 각하에게 우리 도는 능력이 없으니 타 도로 대회장을 옮겨주시라는 보고를 나는 할 수 없다. 충남도민한테도 씻을 수 없는 모욕과 실망을 안겨줄 것이다. 이사장이 요구하는 문제를 풀어주고 내일 수의계약으로 처리하시오.”

나는 회사에 돌아갔다. 전무와 상무가 사표를 내밀었다. ‘회사가 망하는 꼴을 보지 않기 위하여’라고 했다. 도청 건설국장이 회사 간부한테 전화로 설득한 것이다. 나는 사표를 받아들였다.

“오늘부터 이 현장의 모든 책임은 사장인 내가 지겠소. 사장이 현장 소장을 겸하고 진두지휘하겠소. 회사의 흥망을 내 어깨에 걸고 앞으로 반년 간 짊어지고 가겠소. 겁이 나는 사원은 따라오지 않아도 좋소.”

두 임원은 얼굴색을 고치며 정색했다.
“사장님의 결심이 그 정도라면 우리도 동참하겠습니다.”
사표는 그 자리에서 찢겨졌다.
나는 그 이튿날 공설운동장 한복판에 4층 높이의 원두막형 가설물을 설치했다. 그곳에 현장 지휘용 고성능 마이크와 망원경을 배치하고 설계도와 공정표를 비치했다.
   
갑년 체전은 대전발전의 한 획이 되었다.
모든 종사원은 4가지 색깔로 된 안전모와 일련번호를 새겨서 쓰게 했다. 공정별로 색이 달랐으므로 멀리서 망원경으로 보면 가차 없이 마이크로 지시가 내려간다. 운동장 내외에는 수백 개의 외등을 설치하고 주야 작업을 독려했다. 내 이름으로 발행하는 야간 통행증을 제시하면 경찰은 단속하지 않았다. 며칠 만에 공사 현장은 생기를 찾기 시작했고 도청 고위 관계자와 김보성 시장을 비롯한 시청 감독들로 무엇인가 가능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얼마 후 청와대에서 현장 확인을 왔다.

“운동장 주변의 스탠드에 흙을 쌓고 그 위에 계단을 설치하는 것은 먼 미래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또, 스탠드는 지붕이 없는데 지붕을 세워야 합니다.”

이런 주문과 함께 6억의 지원금을 더 지원하겠다는 언질을 주었다. 도청과 시청 관계자는 망설였다. 체전 기일 내에 완공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손수익 지사는 나를 초치하고 대응을 물었다.

“청와대의 엄명이고 추가 예산을 준다는데 ‘우리가 힘이 없으니 반납하겠습니다’라는 보고는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가능하다는 말이오.”
“세상에 불가능이 어디 있습니까. 비상수단을 강구해야지요.”

나는 하나하나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내가 발행하는 야간 통행증과 통행 차량을 공식으로 기관장 회의에서 승인해주시오.
둘째 지금 쌓아 올려놓은 토성토는 수천 트럭분인데 앞으로 3일 이내에 이것을 헐어서 버려야 하는데 가까운 사토장을 마련해주시오.
셋째 설계 변경만 하는데 두 달은 걸리는데 당장 내일부터 설계팀을 현장에 배치하고 합의된 대로 시공에 적용할 수 있도록 특단의 조치를 해주시오.
넷째 거푸집 자재와 인건비는 5회 사용키로 설계되어 있는데 공기 관리상 2회 사용으로 품셈을 바꿔주시오.
다섯째 관 감독이 인정하는 야간작업 인부의 노임은 품셈 상 1.5배로 인정해주시오. 메인스탠드 지붕은 철골 캔트리바로 설계합시다. 공정에 관계없습니다.
   
손지사는 모든 건의를 쾌히 받아주었다. 그리고 청와대에 전화보고를 했다. 시공 중 전광탑이 붕괴되는 등 여러 난관이 있었으나 모드 극복하고 10월 4일 준공이 되었다. 그날 저녁 운동장 잔디밭에서 간단한 위로 잔치를 해주었다. 그런데 나는 중심을 잃고 잔디밭에 허물어져 쓰러졌다. 주위에 있는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극도의 피로 축적으로 간이 심하게 손상되었다는 진단이 나오고 나는 중환자 신세가 되었다.

이튿날 나는 병원을 도망쳐 나와 다시 현장에 갔다. 대회 준비가 바빴다. 미리 배정된 수십 개의 사무실에 집기, 전화기 설치 등 체육회와 시청 관계자가 법석을 부린다. 나는 결심했다.
“모든 사무실 출입문 열쇠를 가져와. 그리고 이 딱지를 붙여.”

그 딱지는 준공 후 인수인계가 안 된 건물이므로 출입금지라는 딱지였다. 이 튿날 체육회와 시청 관계자가 난리를 피웠다.
“대회기간 동안 많은 하자가 발생할 것입니다. 준공 검사요원만 50명이 넘습니다. 대회가 끝나면 당신들은 몇 달 걸려도 도장을 찍지 않을 겁니다. 나는 빚더미에 얹혀 있소. 공사대금을 못 받으면 회사는 부도를 냅니다. 부탁합니다.”

김보성 시장은 준공검사관 전원을 소집하였다.
“이 자리에서 도장을 찍어라. 총무국장은 오늘 내로 준공금을 지불해라. 앞으로 발생할 하자는 시장과 계룡 건설 사장이 해결한다.”

나는 열쇠 뭉치를 넘겨주었다. 대회는 원만하고 성대히 마칠 수 있었다. 청와대는 나에게 대통령 표창을 통보해왔다. 1979년 10월 26일 삽교 방조제 공사 준공식이 있었는데 그 날 마지막 순서에 박대통령은 나에게 표창장과 휘장을 달아주셨다. 그 날 저녁 대통령은 불행하게 서거하셨다. 박대통령 생전에 마지막으로 직접 서훈을 받은 나는 그날의 비표를 아직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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