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우의 족보이야기-(76)곡산연씨(谷山延氏)

   
뿌리공원에 조성된 곡산연씨 조형물.전면/대전 중구
  작품명

번영

조각가

김지삼

작품설명
   
뿌리공원에 조성된 곡산연씨 조형물.후면/대전 중구

  <뿌리공원에 새겨진 곡산연씨 유래>

시조 휘(諱) 계령(繼笭)께서는 관직이 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이시고 시호는 충장공이시다. 아드님 한공(漢公)과 오대 손에 이르는 다섯 분은 모두 높은 벼슬을 한 현관들이시다. 7세 수창(壽菖) 복야공(僕射公)께서 고려 충렬왕 원년에 제국대장공주를 호종하고 여조(麗朝)에 오시어 은청광록대부 좌복야에 제수되시었으며 후에 황해도 곡산에서 잉거하시니 자손들은 관향을 곡산(谷山)으로 하고 있다. 이분의 손자 조(祚)는 벼슬이 영동정으로 곡산에서 함흥으로 이거한 분이시다. 증손 단서(丹瑞)는 금오위대장군으로 여진 토벌 전공으로 훈부에 책록되었으며 현손 주(柱)는 고려 말 한성부윤을 지내시다 향리 함흥으로 내려가셨는데 조선태조(朝鮮太祖)께서 여러 번 정사에 참여를 권유하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대절을 지키셨다.

 12세 사종(嗣宗)께서는 조선조 개국공신이며 좌명공신으로 관은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찬성사 곡산부원군으로 계시다 별세하시니 세종대왕께서는 의정부 영의정의 관함과 시호를 정후(靖厚)로 증시하시였으며 제문을 내리고 봉제관을 보내시어 조문케 하고 사패지를 하사하여 예장토록 하시었다.

후에 부조지전(不?之典)으로 금당서원에 봉향되시니 곡산연문에서는 이 분을 중흥조(中興祖)로 추앙하고 있으며 후손들에게 남기신 충(忠)과 의(義)를 숭상하고 효(孝)를 실천하라는 유훈은 자손들의 종훈으로 이어지고 있다.
곡산연씨가 편만(遍滿)하여 수만에 이르고 사는 고을마다 효자문, 충렬문, 효부열녀문 등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다. 특히 근세에 와서 임란의 공신 안음공 연충수, 연희, 연복, 연호겸 삼열사와 숙종조 충신 사헌부 감찰 의민공 연최적, 효와 제민을 실천한 동지중추부사 연세홍, 조선조말 우국충정의 의병장 연기우, 애국지사 연병호, 순국열사 연의진 그리고 전쟁영웅 연제근 등은 우리 문중의 자랑스러운 선열들이시다.오늘을 사는 후예들은 마땅히 조상님들의 누인적덕(累仁積德)을 불망수행(不忘修行)하여 숭조상문(崇祖尙門)에 힘을 다하기 이르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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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우작가의 해설>

연씨(延氏)

우리나라의 연씨(延氏)는 곡산연씨(인구 25,020명).연안연씨(328명).경주연씨(422명).개성연씨(460명).곡성연씨(573명).광주연씨(122명).금산(1명).나주(220명).남양(76명).대전(137명).도안(342명).옥산(289명).천안(1명).청안(1명).청주(232명).황해(184명) 등 총 16본관에 인구는 지난 2000년 조사때는 28,447명으로 조사되었다.

                                             <곡산연씨 현대인물>

 

연규횡(충북대학교설립자),연규집(1979년 청주대학장),연경모(의학박사.서울대교수),연상현(삼성코닝고문),연제원(전현대건설임원),연규석(한일의원원장),연정렬(한성대교수),연성희(전대전중부경찰서장),연기호(한국일보실장),연상(재일대한체육회장지냄),연제식(신부.서양화가),연관흠(전음성교육장),연일수(전수출공단이사장),연주흠(전국회의원),연영규(전동남증권대표이사),연하구(전대사),연각희(전경찰서장),연명흠(연암학원이사장),연세희(동양화가),연덕춘(전한국프로골프협회장),연용모(작가),연병해(서울신문전국장),연하청(한국개발연구위원지냄),

지역 인재에 앞장선 참 교육자 연병혁, 연규집(전 청주대학장), 영농 기술의 선구자 연병륜씨 등은 충청북도를 교육도시로 만든 장본인들이다. 

연만희(한문학자), 연방희(세무사), 연영석(전충북도정책실장),연철흠 (청주시의원), 연병덕(전 대전전화국장), 연규석(전 교육공무원), 연만흠(충북도의원), 연철웅(전 충북도의원), 연중희(청주시설관리공단이사장지냄),연해영( 전 청주시의원),연희지(충북도교육청 지방서기관), 연규황(충북대물리학과 교수), 연광석(충북대바이오시스템공학과 교수) 등이 있다.

 

아동문학가 연성흠(1945년타계)-동화작가이자 아동문학가로 아동문학 발전에 선구적 족적을 남겼음

           작품 : 童話(동화) <가슴에 핀 紅牧丹(홍목단)>, 兒童劇(아동극)

                     <盜賊과 賢人(도적과 현인)>, 美談(미담) <외다리 고수> 등 

  1948년 연병호 제헌국회 의원 당선

 1950년 연제근, 형산강 도하작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장렬하게 전사.

           형산강 도하작전의 성공은 포항 탈환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귀중한 승전임. 

           1950년에 을지무공훈장이 추서되었음.

           2003년 1월에는 전쟁기념관에 의해 이 달의 호국인물로 선정되는 등

           한국 전쟁영웅이자 호국영웅

 1952년 연병호 제2대국회 의원 당선

 1953년 연하구 행정고시 합격

           그는 곡산문중 최초의 직업외교관으로서 외무부 조약국장, 아주국장을 거쳐

           주케냐대사, 주네델란드대사, 주스페인대사, 주덴마크대사를 역임.

 1954년 연재희 고등고시 합격, 서울지방법원 판사 부임

 1958년 대동보 6중간(무술보) 발간(연종혁, 연규영 편찬)

 1960년 연일수, 육군준장으로 예편

            그는 건군이후 문중에서 배출된 최초의 장성이자

            연명수 장군과 함께 문중의 형제 장군으로 이름을 떨침

            한국수출산업공단이사장, 민주공화당 부산영도구위원장

            금성충무무공훈장, 대통령개인공로 표창

  1962년 연기우, 건국공로훈장 복장 추서

  1963년 연병호 타계, 사회장으로 엄수.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안장. 건국공로훈장 추서

 1965년 연주흠, 7대국회의원 당선. 대한아마추어권투연맹회장, 대한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

 1973년 연명수, 육군준장 진급, 병참학교장

           1983년 향년 55세로 순직. 국립묘지 장군묘역 안장

 1975년 연규횡 국민훈장 동백장

           그는 충북대학 6, 9, 10대 학장, 충북교육감, 충북대학교 대학원장

           충북대학교교육대학원장, 충북대학교 2대 총장

 1976년 연규횡(충북교육감),연하구(주 케냐, 주 네델란드 대사)

1982년 연규횡, 충북대학교 2대총장 취임,연제원, 제11.13대 국회의원

1984년 연하구, 주 덴마크 대사

 연봉학, 기성(技聖) 영예 * 기성은 기능인에게 주는 최고의 영예로 연봉학은 포항제철 1호 기성임

1988년 연형묵, 북한 정무원 총리,남북고위급 회담 대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1989년 연규진, KBS 연기대상 연기상 수상아들인 연정훈, 며느리인 한가인과 함께 연기인으로 유명

 1999년 연광석 충북대학교 농과대학 학장

           고 연규횡 총장의 자제인 그는 부자 2대에 걸쳐 충북대학장을 역임했고,

           부친으로부터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은 진기한 인연을 지녔음. 

           연나영, 대중가요 '부탁해'로 가요계 입문

           그녀는 문중 최초의 대중가요 가수로 데뷰 초기에는 제2의 '양파'란 평가 받음.

           김태정, 법무부 장관 -연정희의 남편으로 곡산연씨 문중의 사위

 2000년 곡산연씨원주화수회(회장 연명식), 회보 50호 합본호(200쪽) 발간

           연영흠 총무가 편집. 대동종친회와 춘천, 홍천 화수회의 지원 받음

           2003년 연형묵 북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타계

           대한민국 정부와 민주노동당에서 애도 전문 보냄.

           그는 대한민국 정부에서 공식적인 애도를 받은 최초의 북한 인사

           연규성, 페이퍼 2집 앨범으로 가요계 데뷰.

           그는 폭발적인 가창력을 지닌 것으로 알려졌음.

            연규석 강원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장

 2005년 연만희 유한양행 이사장 취임

           유한양행은 1926년 유일한(柳一韓)이 설립한 의약품·식품·생활용품 제조 및

           판매업체로 기업 이윤을 사회에 환원한 모범적인 기업

           연보흠, MBC 뉴스데스크 주말 앵커 진행

           그는 1996년 MBC에 입사하여 사회부, 검찰, 경찰, 국회, 국제부, 정치부,

           청와대 등의 출입기자로 활동

  2007년 연영흠 네이버파워유저(지식인 분야) 선정 

           포탈사이트 네이버에서 9개 분야에 걸쳐 전문가 심사와 회원 투표로 진행

           지식인 분야 1위로 '2006네이버 파워유저'로 선정

           1월 18일 임페리얼 펠리스 호텔에서 시상

           연규석 강원대학교 교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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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산연씨(谷山延氏)

 곡산연씨(谷山延氏)는 문헌과 곡산연씨 대동보(谷山延氏 大同譜)에 의하면 연씨(延氏)의 본관은 곡산(谷山) 단본이다. 그러나 문헌에는 곡산 외에도 개성.광주(廣州).남양.청주연씨 등 30여 본이 전하고 지난 2000년의 조사에서는 16본관으로 나타났으나 모두가 곡산연씨의 세거지 내지 분포 지역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연씨(延氏)는 곡산연씨(谷山延氏)단일본 이다.
우리나라 연씨(延氏)는 중국의 남양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라고 한다.

 고려때 홍농(弘農) 출신인 연계령(延繼笭)의 7세손 연수창(延壽菖)은 중국 하남성사람으로 당시 태자이던 충렬왕이 원나라에서 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하고 3년뒤에 귀국할때 제국대장공주(帝國大丈公主:고려 충렬왕비)를 수행하고 고려에 들어와 곡산(谷山)에 정착하여 벼슬은 은청광록대부로 좌복야(左僕射:상서도성의 정2품 벼슬)에 이르렀다.

후손들은 연계령(延繼笭)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본관을 곡산(谷山)으로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며 우리나라에 귀화하여 곡산(谷山)에 정착한 연수창(延壽菖,1256년(병진)~1319년 10월9일(충숙왕6))은 관조(貫祖)로 우리나라 연씨(延氏)의 시초를 이루게 되었다.

   
충북 증평군 도안면 화성리의 7세 연수창부터 11세연주의 5위단비

 본관소재지 곡산은 황해도 동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초에 곡주(谷州)로 개정하였다.
조선 태조 때 곡산으로 고쳐서 부(府)로 승격하였다가 태종 때 군(郡)으로 격하되었으며 1669년(현종 10년)에 다시 부(府)로 승격되었고 1895년(고종 32년)에 다시 곡산군이 되어 개성부에 속하였다가 1914년에 황해도에 속한 군(郡)이 되었다.

곡산연씨(谷山延氏)는 시조인 충장공 연계령 2세인 평장사공(平章事公)연한공,3세인 상서공(尙書公)연 성 4세상주국(上柱國)연 경,5세 연 회(동정공),6세 연세린(장렬공),검교상서를 지내고 좌복야에 오른 7세 연수창,8세인 태사공(太師公) 연 경,9세 대장군공(大將軍公)연 조,10세곡성군(谷城君)연단서,11세 연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연수창(延壽菖)의 아들  연 경(延鏡)은 고려 충숙왕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정1품품계)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종1품정승)과 태사(太師: 임금의 고문 또는 국가 최고의 명예직으로 정1품)를 역임한 명신(名臣) 이였으며 당대의 문장가로 암곡시(巖谷詩)를 남겼는데  '바람결에 거문고 소리 솔잎이 불어내고, 비 내리는 강 언덕에 해당화가 피었구나'로 시작되는 시(詩)이다.

연씨는 11세인 연주가 아들인 연사걸(중랑장공),연사종(정후공),연사준(판서공),연사화(승지공)의 4형제를 둬 우리나라 곡산연씨(谷山延氏)문중이 크게 중흥되었다.

  곡산연씨 선조들중에 역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인물은 정후공 연사종(延嗣宗)이다.

   
충북 증평군 도안면 화성리에 자리한  곡산부원군  연사종과 아들 연비.연음 묘

연사종(延嗣宗)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개국에 참여하여 3공신(회군공신,개국원종공신,좌명공신)의 녹권을 받았고 신하로서 최고의 영예인 부원군(府院君,곡산부원군)에 피봉되었으며 사후에 영의정(領議政:정1품 정승)에 추증되었는데 그의 자취가"조선왕조실록"에 전해지고 있다.한편 시조 충장공부터 6세조 장렬공까지는 중국에 거주했다고 한다.

7세조 복야공(僕射公:복야는 고려 상서도성의 정2품 벼슬로 좌.우복야가 있음)연수창(延壽菖)은 서기1274년(원종12)에 고려 충렬왕과 결혼한 제국대장공주를 배행(陪行:윗사람을 모시고 따라감)하여 고려에 입국했다고 전해진다.후손들은 그를 우리나라에 곡산연씨(谷山延氏)가 뿌리를 내리게된 입향조로 받들고 있다.

  

8세조인 태사공 연 경은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연수창의 아들로 충숙왕 1년에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한뒤 관직이 3중대광(三重大匡:정1품품계)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종1품 으뜸 벼슬로 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리한 정승)에 이르렀다. 

 

  9세조 동정공,10세조 대장군공(大將軍公),11세조 곡성군에 대해서는 우리 나라 명문거족의 하나로 포은 정몽주등 많은 인재를 배출한 연일정씨(영일정씨)족보에도 그들의 발자취가 실려있다.

 그러나 곡산연씨(谷山延氏)는 조선시대에 수난을 받게 된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던 이약빙(李若氷,1489∼1547)은 이조판서(吏曹判書;정2품 벼슬.장관) 홍귀달(洪貴達)의 사위로서 연정렬(延井冽:연안공)과 동서지간이었다.

이약빙은 서기 1547년(명종 3년) 정미사화(丁未士禍: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사사(賜死)되었다. 이에 원한을 품게 된 이약빙의 아들 이홍윤이 충주에서 역모를 도모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 때 연 원(延援)은 부대장으로서 거사의 주도적 역할을 했고 그의 숙부(叔父)인 연백재(延百載)는 대장(隊長)으로 추대되었다는 혐의로 이홍윤(李洪胤)과 함께 처형되었다.

이로 인해 충청도에 기반을 두고 정착하였던 연정렬(延井冽)의 후예들이 다수 연좌(連坐:남의 범죄에 휘말려 처벌을 받음)되었고 문중 전체가 수난을 겪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 사건은 실제의 역모사건이라기 보다 당시의 권신이었던 소윤(少尹)의 거두 윤원형(명종의 생모 문정왕후의 친동생)이 주동이되어 야기 한 을사사화(乙巳士禍:1545년 대윤(大尹)의 윤임등 사림파의 숙청)의 여파라고 하며 이사건이 곡산연씨(谷山延氏)로서는 불의의 화를 당한 연좌의 비극적 사례이자 수난의 시발이었다고 한다.

연사종의 아버지 연 주(延柱)는 고려 말에 한성부윤(府尹:종2품 벼슬 외관직)으로 있었으나 정몽주가 순절(殉節:순사한 애국지사,나라위해 목숨을 버림)하자 벼슬을 떠나 함흥에 은거하였다.

아들인 연사종은 아버지 연 주(延柱)의 절의를 높게 평가 한 이성계의 총애를 받았으며 조선 개국후에 개국원종공신과 회군공신에 책록되고 상장군(上將軍:정3품의 중앙군 최고군직).호조전서(戶曹典書:정2품 벼슬로 후에 호조판서로 바뀜).한성부판사(判事:고려때 3품 이상의 벼슬 한성부의 우두머리)등을 역임하였으며,

 태종 때는 동북면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정3품 벼슬로 부윤(府尹)이 겸임함),세종 때는 의정부 참찬(參贊:정2품 벼슬로 좌.우 참찬을 일컬음),중군도총제(中軍 都摠制:중군은 전군의 중앙에 있는 군대)등을 지냈고 후에 효자 정문(旌門:충신.효자 등을 표창하기위해 그의 집 앞이나 마을 앞에 세우던 붉은 문,홍문(紅門))이 세워졌다.

 연최적은 중추부 첨지사(中樞府僉知事:정3품 당상관)를 지낸 연택로(延宅老)의 아들로 숙종 때 사헌부 감찰(監察: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정6품 벼슬)이 되었으나 사직하고 학문에 전력하였는데 숙종비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장희빈(張禧嬪)의 무고(誣告:없는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 남을 고발함)로 폐서인(廢庶人)이 되자 이에 항소하였다가 옥사하였다.

 그는 인현왕후의 복위뒤 충신정문이 세워졌고 이조판서(吏曹判書:정2품 장관) 겸 양관대제학(兩官大提學:홍문관과 예문관의 정2품  문형)에 추증되었다.

   
 

             문장가로 유명했던  연최적의 충효를 기리기위해 세운 청주시 흥덕구 모충동

                                         충효양전문

 숙종때문장가  연최적(1663-1693,자는 무경 호는 치당.시호는 의민)은 첨지중추부사(정3품) 연택로의 아들로 송시열의 문인이다. 숙종8년(1682년) 중광문과(나라에 경사가 있을때보던 대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에 보직되었다가 사헌부감찰에 올랐으나 시사의 급변으로

사직하고 권상하를따라 학문을 닦았다. 그 뒤 다시기용되었다가 1689년 기사환국으로 파직되었으며,1693년(숙종19)숙종의 구언에 따라 인현황후 폐위의 부당성과 당시 화를입은 자들의 용서를 상소하여 심한 국문을 당한 끝에 옥사했다.

이듬해 인현황후가 복위되자 도승지에 추종되고 충신문이 세워졌으며 그뒤 이조판서겸 양관 대제학이 더 해졌다.

 연구령(延九齡)은 연사종의 증손으로 중종 2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중종3년 보은현감(縣監:종6품 벼슬),지평(持平: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정5품 벼슬),교리(校理:정5품벼슬),장령(掌令:사헌부의 정4품벼슬)을 거치는 과정이 조선왕조실록에 15회에 걸쳐 실렸다고 한다.

연구령(延九齡)은 중종 2년에 당대의 문장가로 정암 조광조와 함께 기묘사화(己卯士禍:1519년(중종 14) 남곤 등 훈구파가 조광조.김정 등의 신진 도학자들을 죽이거나 귀양보낸 사화)때 화를 입은 충암 김정(金淨:1507년(중종 2년)에 문과에 장원급제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정3품),도승지(都承旨:승정원의 정3품 으뜸 벼슬),대사성(大司成:성균관의 정3품 으뜸 벼슬),기묘명현 중 1인 경주김씨)과 함께 문과(文科)에 급제했으며 두사람 사이에 나눈 10여편의 시(詩)가 충암집(김정의 문집)에 전한다.


또한 <임꺽정>과 겨룬 연천령(延千齡)장군이 유명하다.

 그는 연 비(상주공)의 증손으로 명종 26년에 임꺽정 토벌에 동원되었던 선전관(宣傳官:시위의 전명,형명에 관한 일을 맡던 관청의 무관직) 정수익의 장계(狀啓:왕명으로 지방에 파견된 벼슬아치가 글로써서 올리던 보고)에 처음으로 등장한 뒤 3회에 걸쳐 실록에 거명되었다.

연천령 장군은 홍명희의 소설<임꺽정>에서 관군중 유일하게 임꺽정과 "단기로 겨룬 용장"으로 소개되었으며 군사조직인 오위도총부의 "충좌전위(忠左前衛)에 매인 연천령은 무예가 높아 용감무쌍했다"로 소설 임꺽정에도 등장한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왕명을 출납을 맡아 보던 중추부의 종2품 벼슬)를 지낸 연세홍의 증손인 연동헌(延東憲)은

1774년에 생원.진사시에 급제하고 1775년에는 대과(大科)인 문과에 급제해 이름을 날렸고 연동헌은 1780년에 곡산연씨 대동보(谷山延氏大同譜) 제2중간(重刊)인 경자보를 발간했다.

이 외에도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전공을 세워 예빈시 참봉(禮賓寺 參奉:예빈시는 고려.조선때 빈객의 연향과 재신의 음식 공궤를 관장하던 관아 종9품 벼슬)을 제수받고 안음현감(縣監:종6품 벼슬)을 지낸 연충수(延忠秀)와  한말의 의병대장 연기우(延基羽),독립운동가 연병호(延秉昊)등이 가문을 빛냈다.

  지리산 공비토벌에서 전사한 연제근, 한국전쟁때 강원도에서 조경능선을 사수하다 전사한 연규현 등의 인물을 보면 구국정신이 문중의 내력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명 연병호의 생가-충북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

연병호(1894-1963)는 충북 출신으로  호는 도명. 일명 병학.동학으로 불리었다.

1919년 3.1운동의 영향을 받고 그리스도교인을 중심으로  청년외교단을 조직

독립운동자금 모집과 임시정부에 정보제공 등을 목표로 활약하였다.

그 후 안재홍을 영입, 조직을 재정비하고 외교원직책을 띠고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3년동안 옥고를 치루었다. 출옥후 상하이로 망명 조소앙.김구.안창호 등과 세계한인동맹.

한국국민당. 신한독립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친일파 이갑녕 저격사건에 연루되어

체포, 1914년까지 8년간 복역하였다.  8.15광복 후 임시정부환국준비위원회 영접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곡산연씨는 1930년의  국세조사에서는 2,385가구였으며 그 중 약 30%가 충북 괴산군에 집중해 있었고 지금도 그 일대에 동족부락이 많다.

1985년도 조사에서는 가구수 6,451가구에 인구는 27.852명으로 당시의 전국 성씨 274성 중 76위였으며 지난 2000년의 인구조사에서는 전국에 걸쳐 25,020명으로 조사되었다.

곡산연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문관을 뽑아쓰던 과거로 시험은 3년마다 실시되었으며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로 나뉘었음.대과)에 3명,무과(武科:무관을 뽑아쓰던 과거로 시험은 3년마다 실시되었으며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였음)에 6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16명,의과에 1명 등 모두 26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본관소재지 곡산(谷山)은 황해북도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고구려 때에는 십곡성(十谷城)이라 불렸고서기 748년(신라 경덕왕 7) 십곡성현(十谷城縣)으로 편성되었다가 여러 변천을 거쳐 940년(고려 태조 23)에 곡주(谷州)로 개편되고 995년(성종 14)에는 방어사(防禦使:조선때 경기 이북의 각 도에 두어,병권을 장악하고 지키게 했던 종2품의 무관 벼슬)를 두었다.

서기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곡산군이 되어,개성부(開城府)에 속하였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황해도로 편입되었다. 별칭으로는 덕돈홀(德頓忽).고곡(古谷).곡성(谷城).진서(鎭瑞).상산(象山) 등으로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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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우
김진우(金鎭宇)-금석문(金石文)에 관심많아 각종 비문(碑文:지석.신도비.묘갈명 등) 연구 *족보전문가 *.민족문제연구소회원 *단재 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연구위원*지방자치실무연구소회원 *한국성씨연구소 대표(현) ,<지은책>- "한국인의 역사"(286개 성씨를 교과서에 없는 역사책으로  수록한 한국인 교양서.도서출판 춘추필법(春秋筆法)펴냄).공주고.고려대경영학과졸업.한국과학기술원 수료.(한국성씨연구소는 삼성의료원과 함께 2009년 "대한민국 성공기업" 선정 ).2010년 MBC드라마넷 한가위특집 "가문의 내력" 출연,kbs국제방송 2010년 10월~11월 방송.

(2009년 올해를 빛낸 '장한한국인상' (문화)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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