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탐구]예술의 전당에서 강의하는 서예가 전병택

   
지방 서예가로서는 처음으로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서예 강의를 하는 일강 전병택 선생.
일강 전병택 선생.
예술의 계량화는 그 쪽 입장에서 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그가 취재 대상이 된 건 ‘예술의 전당 서예 강사’라는 타이틀이 주효했다. 물론 국전 초대 작가, 서예대전 심사위원, 수원 서예박물관 출강 등등의 이력도 중요하나 그게 최근의 일이라  더 가치가 있었다. 지방에서 활동하는 서예가 중 그곳에서 강의를 한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희소성과 저명성이 뉴스 밸류를 높여 주었다고나 할까.

예술의 전당 얘기는 조금 더 해야 할 것 같다. 금년 3월부터 월 4회씩 서예 강좌를 열고 있다. 강사로 되는 길은 그야말로 ‘좁은 문’이다. 공개 모집하는 것도 아니고 서예계 알음알음으로 활동 상황을 살펴보고 최종적으로 강사를 의뢰한다. 물론 복수로 추천하지만 추천 자체도 영광이라 여길만큼 비중이 크다. 최종 선발은 더 없는 영광이다. 일단 거기에 서면 위상이 객관화된다.

“저 같은 경우에는 ‘안하면 어때’하는 생각도 있었습니다만 일단 출강을 하니 인정을 쉽게 해줍디다. 그래서 ‘아~ 이런 것도 있구나’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뭐, 꼭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그런 걸 느꼈다는 겁니다. 이번 일로...”

28일 대전시 중구 대흥동 문화빌딩 5층 일강 서실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출강’ 얘기를 한참동안 나눴다. ‘염량세태’(炎凉世態)라고 해야 할까.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라며 마주보며 한참동안 웃었다. 타이틀, 거기에 올인할 이유는 없지만 굳이 외면할 필요도 없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제자들을 지도하는 모습.

“대학원 정도의 강의를 합니다. 중국은 서법(書法), 일본은 서도(書道), 그리고 한국은 서예(書藝)라고 하는 데 사실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생활에 기본적으로 예를 갖추도록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 서예라는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이지요. 말하자면 중국은 글씨 쓰는 방법을 중시하고 일본은 정신, 우리는 예를 우선한다는 뜻입니다.”

일강선생이 가르치는 방법은 항상 일정하다. 처음에는 기능(서법) 위주로 나가다가 어느 정도 완성이 되면 서예가로서 소양과 서예에 얽힌 역사를 공부시킨다. 그러다보면 공부에 깊이가 더해지면서 옛 성현들의 가르침을 은연중에 체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 대목에서 대 서예가 왕희지의 ‘비인부전’(非人不傳)이란 말을 인용했다. ‘사람답지 않는 사람에게는 전해주지 말라’이다. 인간 됨됨이를 중시하는 게 서예라는 말이다.

그게 서예의 길이지만 현실은 참으로 가혹했다. 정도를 지키려는 서예가들에게 수강생 확보는 비타민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많은 서예가들이 그 길을 외면하고 현실에 안주, 갈등을 겪게 하고 있다.

일강이 서예에 눈을 뜬 건 초등학교 5학년때 였다. 그 때 심정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어린 시절 글씨만 보면 가슴이 뛰었습니다. 당숙께서 한학을 하셨는데 ‘입춘대길’을 동네 분들에게 써주시는데 얼마나 멋있었는지 몰라요. 그 때부터 글씨가 좋아 혼자 신문지 놓고 연습을 했습니다.”

충남 금산군 남일면 출신인 그는 이때까지만 해도 글씨에 재주가 있는 아이 정도로 알려졌다. 학교 환경 정리는 도맡아서 했고 프랑카드 제작은 일강의 몫이었다. 고등학교는 서예를 하기 위해 공부를 안 해도 되는 곳을 선택했다. 5년제 대전실전이었다. 거기서 그는 붓글씨 도반(道伴)을 만났다. 대전시 고등학교 서예연합회인 ‘청묵회’에 가입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고교 때 서예반을 만들고 활동을 하면서 상도 많이 탔습니다. 사실 써클 활동만하고 공부는 거의 못했습니다. 저의 뜻이 서예에 있었기 때문에 학교 공부는 큰 의미가 없었지요. 중간에 학교도 그만두려고 했어요. 집안 어른께 혼나고 나서 졸업은 했지만...”

군 헌병으로 제대 후 서실을 운영했다. 그게 1983년도 일이었다. 서실은 27년째 문을 열고 있다. 초창기에는 그야말로 때 꺼리가 없어 전전긍긍하기도 했다. 그 어려움이 글씨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일강은 국악에도 관심을 보여 한때 단소, 거문고 등을 전문가에게 배웠다. 그는 국악 모임에 해설을 할 정도로 이론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다.

 “예술은 치열함 속에서 나옵니다. 배부르면 약해집니다. 좋은 작품을 내던 친구가 대학교수가 되고나서 몇 년 지나면 작품에 힘이 없어지는 걸 자주 보아왔습니다. 저는 힘든 시절을 많이 겪으면서 단련이 되었습니다.”

아무튼 ‘청묵회’ 가입은 정통 서예를 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훌륭한 선배들의 조언과 동료들 간에 정보 교환, 이런 것들이 그의 서예를 한층 더 성장시키는 단초가 되었다. 청묵회와 함께 서예인생에 변화를 가져다 준 건 스승 취묵헌(取墨軒) 인영선 선생과의 만남이었다. 1984년부터 제자가 된 그는 서예 대가 밑에서 글씨 공부에만 매달렸다. 청묵회 시절에는 당나라 구양순체를 주로 썼고 스승을 만나서 행, 초서를 공부했다. 너무 열심히 공부한 탓일까. 서체가 스승과 구별이 안될 만큼 너무 닮아 버렸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 했던가. 크게 성장하기위해서는 ‘나만의 서법’이 필요했다. 선생님과 상의한 결과 ‘나이에 걸 맞는 씩씩하고 강한 글씨’를 선택했다.

“제대 후 그러니까 29살 때 국전에서 입선을 했습니다. 대단한 일이었지요. 그런데 이후 4년간 내리 떨어졌어요. 서실도 하고 있었는데 선생님 체면이 말이 아니었지요. 운이 좋아서 한번 된 것으로 비쳐지게 된 거죠. 착찹 했죠. 그걸 달래기 위해 국악을 배우러 갔습니다.”

서로 통하는 게 예술이다. 국악의 리듬은 서예에 당연히 도움이 되었다. 처음에 단소를 약 1년간 배웠다. 거문고도 공부했고 심지어 전각까지 배웠다. 마음을 비우고 산 셈이다. 33살이 되던 해 대한민국 서예대전에 초서를 냈다. 입상보다는 국전이 열리니 그냥 넘어가자니 어쩐 지 서운해서 출품했다. 그게 ‘특선’을 해버렸다. 아이러니컬했다. 첫 입선 후 그렇게 애를 써도 되지 않던 일이 마음을 비우고 던지니 채워졌다. 특선을 그에게 유명세와 함께 경제적인 여유를 가져다 주었다.

“10년간 떨어져도 괜찮다고 했는데 덜컹 큰 상을 받게 돼 얼떨떨했어요. 출강 요청이 들어오고 바빠지게 되었죠. 그 와중에도 국악은 더 열심히 했습니다. 국악과 서예의 조화가 저의 경쟁력이라고 봤지요. 검찰청에 출강한 것도 이때부터 시작되었고 자신감도 생겼어요.”
   


지나친 자신감은 이듬해 입선으로 되돌아 왔다. 특선 작가에 입선은 너무 작았다. 또 실망이었다. 35살 되던 해 스님이 오셔서 “올해는 대운이 들었네”라고 했다. 반드시 그걸 믿는 건 아니지만 한달 만에 작품을 완성해서 출품한 국전에서 이번에도 ‘특선’을 거머쥐었다. 그 때부터 최고의 영예인 ‘초대작가’가 되었다. 35세, 어린 나이였다.

「...일강의 글씨는 거침이 없다. 유연하다가도 장엄하고 장엄하면서도 한 곳도 소홀함이 없는 글씨다. 글자의 대소는 전혀 개의치 않고 써내려 간듯하지만 절묘하다. 필획은 끝까지 힘이 가해져서 획들이 들뜨지 않아 보는 이로 하여금 편안함과 강인함을 함께 느끼게 만든다...」

경기대 교수인 임종현 평론가가 일강의 글씨를 평한 글이다. 스스로 작품 세계를 일강은 “내 나름대로 세계가 있으면서 옛 법을 잃지 않는 것”으로 표현했다. 요컨대 본(本)을 유지하면서 응용을 한다는 말이다. 옛 사람들의 글씨를 흉내만 내는 게 서예가 아니며 창조가 첨가되어야 한다는 얘기로 들렸다. 일강에게 글씨는 목표가 아니라 인생의 한 과정이었다. 그걸 하다보면 인간 본연의 무언가가 나오게 된다.

“‘誠於中(성어중)이면 形於外(형어외)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 속에 진실함이 있으면 밖으로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글씨는 ‘심상’(心象), 즉 ‘마음의 형상’입니다. 내공을 강해야 좋은 글씨를 쓸 수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봐야합니다.”

두 차례에 걸쳐 일강 선생과는 약 네댓 시간 인터뷰를 했다. 대전지역 서예계 얘기부터 국악계의 뒷 모습까지...그와 만나면 항상 힘이 있고 느껴보지 못한 지식을 접하게 된다. 필자에게는 가지 못했던 길을 간접 경험을 하게 된다. 참으로 유익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물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대담을 마쳤다.

‘좋은 제자를 만나 가르치고 좀더 성숙하고 격조 있는 글씨의 세계를 이루는 것’, 그게 그의 인생 숙제였다. (연락처)010-5406-7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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