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우의 족보이야기-(68) 성주도씨(星州都氏)

   
뿌리공원에 조성된 성주도씨 조형물.전면/대전 중구
작품명

광명

조각가

도 학 회

작품설명

천지인(天地人)·음양의 조화·올곧음·충효열(忠孝烈)·세상의 등불관향 성주(옛 八 )등을 조형화하였고, 전체 형상은 들불로써 광명을 뜻하고 올곧은 정신을 표현하였으며, 각 부분은 위로부터 스텐 부분은천지 음양을, 3단의 원형은 충·효·열을 의미하고 기단부의 팔각형은 옛관향 팔거를 상징하며, 원형의 도안은 성주도씨의 종중문양이다.

   
뿌리공원에 조성된 성주도씨 조형물.후면/대전 중구

<뿌리공원에 새겨진 성주도씨 유래>

도씨는 단일본으로 옛 신라시대 수창군 4현의 중심지였던 팔거현(八 縣: 현 대구 칠곡)의 지배 계층인 대표적 씨족집단이었다. 고려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할 때 명망있는 지방 호족장인 도진(都陳) 선조께서 건국공신으로 부원군에 봉하여짐으로써 관향의 시조가 되었으며 이로부터 팔거도씨(八 都氏)로 통칭하였다. 1752년 대동보를 편찬할 때 종희의 결의로써 당시 팔거현이 속한 성주목(星州牧)의 지명을 따서 성주도씨로 개칭하였다. 고려 중기 이전의 세계(世系)가 명확하지 아니하여 고려 명종조의 전리상서 도순(都順) 선조를 기세 시조(起世始祖)로 삼으며, 이후 고려 말기까지 대를 이어 문무 관직에 진출함으로써 명문(名門)으로 크게 번성하였다. 조선이 개국되는 왕조 교체기에는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켜 벼슬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오로지 학문과 적덕에 전념하였으나, 중기 이후로 각 세거지마다 문운(文運)이 크게 떨쳐 여러 등과자가 배출되어 선정을 베풀었으며, 국난에 즈음하여서는 구국위민의 선봉으로 활약하여 공신으로 기록된 분도 많다. 학덕으로써 선현으로 추앙된 분의 원사(院祠)와 효행과 열행으로 알려진 분들의 정려가 전국 여러곳에 있으며, 그 아름다운 행적들은 사서 등 많은 문헌에 수록되어 있다. 선조들의 충효열의 전통과 투철한 선비정신은 자손만대 유구히 발전적으로 계승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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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우작가의 해설>

 

                                                      <성주도씨 현대인물>

도헌권(상해임시정부경무국장),도상봉(전서울대교수),도석균,도태구(변호사),도창희(전동국대교수),도흥렬(국방대학원교수),도철웅(전육사교수),도갑수(전숭실대교수),도영주(부산대교수),도창렬(전경북도의원),도경회(종친회임원),도광찬(소아과병원원장),도성만(건축사무소장),도규만(전검사),도지훈(전종로구청장),도진희(전국회의원),도영춘(전정화교육재단이사장),도영태(중등학교교장),도재호(대구시공무원),도사금(내과의사),도종이(부산대도운수사장),도재영(자동차회사임원),도진규(산업은행근무),도영규(하버드대),도재헌(법원근무),도재관(해양경찰대장),도영심(국회의원),도종웅(신경과의사),도맹희(중앙병원장지냄),도영희(현대중공업근무),

 도현배(현대건설근무),도준호(조선일보기자),도인회(전종친회장),도창기(내과의사),도재철(영남대교수),도명기(영남대교수),도길명(경남대교수),도한호(침례신학대교수),도태기(중등학교교장),도영구(외과의사),도태성(영진공대교수),도수희(충남대교수),도병권(청주교대교수),도우현(동아대학장),도효근(전주교대교수),도동섭(고려대교수),도덕현(건국대교수),도재은(연세대교수),도문규(군산실업대학장),도영일(대구성화교교장),도진환(대구송현여고교장),도영대(대구정화여고교장),도원희(강화여고교장),도재원(김천중앙중교장),도효원(포항송림초교장),도덕진(울릉도장흥교교장),도용기(울릉학포초교장),도복환(김제초교장),도광순(한양대교수),도복품(경북대교수),도가홍(정신과의사),도형계(계명대교수),도봉현(계명대교수),도시홍(부산수산대교수지냄),도일규(육군대장 육사20기 육군참모총장(1996~1998년),수도방위사령관(1994),경기고 졸업), 도종환(시인"접시꽃 당신"으로 유명 현재 한국작가회의 부이사장) 등등

 

청송당 도응의 직계 후손으로 충남지역의 인물은 도규희(23世) 반월초 교장, 도수희(23세) 전충남대문과대학장, 도송희(23세) 제중약품 대표,도승구(24세) 전논산교육장.충남체육고교장,도중철(24세)변호사,도용희(23세)전지방행정사무관 종중회장,도광희(23세),도형희(23세)전농촌지도소장.광석노인회장,도기탁(24세)내동초 교감등이 각계에서 활약하고 있다. 

 

 

 

                                                     도 씨(都氏)

                            도미부인 아랑의 정절은 역사상 손꼽히는 여절부덕

                        왕지(王旨) 4점과 왕명 1점 논산시 연산 보호각에 소장

우리나라의 도씨(都氏)는 성주도씨.성산도씨.경주.대구.밀양.사정,상주.서제.신안.의성.전주.청주.춘천.파주.파평.팔거.평창.해주도씨 등  문헌에는 18개의 본관이 있으나 성주도씨의 세거지명이다.

지난 2000년 인구조사에서 도씨(都氏)는 총 52,349명이었다.

   

성주도씨종중문서(5매) 충남 논산시 (성주도씨종중대표 도기갑소장)

성주도씨 종중문서는 서기 1393년(조선 태조 2)부터 6년(1397)까지 도응(都膺)에게 하사한 사령왕지 4매와 녹패 등 5매의 고문서이다. 도응은 고려말 충신으로 두문동 72인 중 한 사람이다. 고려 공민왕 때 중대광(重大匡),문하시중(門下侍中),찬성사(贊成事)를 역임하였는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관직을 하사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고문서를 보면 도응위조봉대부전의소감사령교지(1393), 도응위선절장군흥위위좌령장군사령교지(1394), 도응위선절장군용우무위사좌령장군사령교지(1395), 도응위보공장군호용순위사간대장군사령교지(1397), 회사선절장군흥위위좌령장군사령녹패 등이다. 이 왕지에는 고려말 조선초의 관직이 섞여 있으며 "조선지보"라는 도장이 찍혀 있다고한다.이것은 태종 이후에 "조선왕국지보"나 '경국대전"반포 후에 사용된 "시명지보"와는 다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조선 전기 관제의 변천과정, 새보(국왕의 도장)의 사용경위, 서체의 변천 그리고 고문서 양식의 변천과정을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성주도씨 사우 (星州都氏祠宇)

충청남도 논산시(論山市) 연산면(連山面) 관동리(官洞里) 132번지에 있는 성주도씨 문중의 사당으로 고려말에 찬성사(贊成事:정2품부총리급)를 지낸 문신 도응(都膺)을 배향하고 있다.

어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조선 태조가 도응에게 내린 왕지(王旨) 4매와 녹패(祿牌) 1매가 보관되어 있다. 어필각에 보관된 성주도씨종중문서(星州都氏宗中文書)는 보물 제724호로 지정되었다. 어필각은 1982년에 고직사는 1984년에 건립되었다.

   
 
   

보물 724-2호
도응 위선절장군 흥위위 좌령장군자 홍무27년9월

선절장군(宣節將軍)은 조선 초기의 서반(西班)종4품 상(上)의 품계명으로 1466년( 세조 12년 1월)에 정략장군(定略將軍)으로 개칭되었고  종4품 하(下)는 선략장군.

                           <논산시 연산면 관동리는 성주도씨 집성촌>

성주도씨(星州都氏) 족보와 문헌에 의하면, 고려 원종 때 전리상서(尙書:정3품장관)를 지낸 도 순(都順)을 기세조(起世祖)로 받들고, 대구파, 평양파,성주파,단삼파,노포파, 연노파, 용안파, 고흥파 등  8파(派)로 갈라져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충남 논산시 연산면 관동리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청송당 도응의 세계(世系)를 보면,1세조 도 순(都順)의 2세 도충박(都忠朴)이 전리상서(尙書:정3품장관)를 역임했고,공조전서(典書:정3품장관)를 지낸 3세 도유도(都有道:대구파)와 종부판사에 추증되어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진 3세 도유덕(都有德)이 성주도씨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다.

 

도유덕의 장남 도효신(4세)은 <성주파조>가 되고,차남 도효안(4세), 3남 도효정(4세) 3형제를 두었다. 차남 도효안의 아들 도홍정(都洪正: 5세)은 고려 말에 도씨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인물로 동양창 판관(判官:5품벼슬)을 거쳐 공민왕때 벽상공신에 책록되고 삼중대광(三重大匡:정1품품계)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종1품 정승)에 이르러 칠곡부원군에 봉해졌다.

 

그의 차남 도길부(都吉敷:6세)는 우왕 때 이성계(李成桂)의 부장으로 충청과 전라도에 침입한 왜구를 황산과 운봉에서 격퇴시켜 대광보국숭록대부(大光報國崇碌大夫:정1품품계)로 문하첨의찬성사(贊成事;정2품부총리)에 오르고 성산부원군에 봉해졌으나 1388년(우왕14) 1월에 일어난 이인임의 축출사건에 연루되어 화(禍)를 당했다.

 

도길부의 아들 도 응(都應:7세)은 두문동(杜門洞:개풍 광덕산 마을이름) 72현의 중심인물로 문하첨의찬성사를 지냈으나 기사화변(己巳禍變)으로 아버지가 화를 당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홍주의 노은동(충남 홍성)에 은거했다.

이후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개국하고 왕위에 오른 후 어릴 적 친구인 그에게 대장군(大將軍:종3품장군)을 두 번 임명하고, 다섯 차례나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충신은 불사이군(不事二君:한사람이 두임금을 섬기지아니함)이라며 거절했다.

 

이성계는 그의 절의에 감복해 청송당(靑松堂)이라는 호를 내려 치하 하고 운천서원과 경양사에서 제향케 했다.

 관조 도 순(都順)의 7세 청송당 도응(都應)은 이태조의 명을 거절한 후 후손의 장래를  걱정한 끝에 장남 도사면(都思勉:8세)은 논산시 연산 으로,차남 도사심(都思諶:8세)은 충북 괴산으로, 3남 도사민(都思敏:8세)은 함양으로 4남 도운봉(都雲峯:8세)은 경북 군의로 흩어져 세계(世系)를 잇게 했다.

 

연산면 관동리에 세거 하게된 도사면(都思勉)은 도경손, 도순손, 도의손,도진손 4형제를 두었다.


장남 도경손(9세)은 도영하(10세)를,도영하는 도응서(11세)를, 도응서는 도수인(12세),도수의(12세), 도수예(12세),도수지(12세),도수신(12세)등  5형제를 두었다.

 

장남 도수인은 연산종가를 차남 도수의는 상월 한천에서,셋째 도수예는 전북 정읍에서,넷째 도수지는 상월한천에서, 다섯째 도수신의 후손은 전북 익산 등지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성주도씨(星州都氏)

성주도씨(星州都氏)의 시조에 대해서 "경술보(庚戌譜)"수성시조(受姓始祖) 편에 보면 시조가 도 계(都稽)라고 한다. 

그는 기원전 110년 한무제때 중국 남월(南越)의 재상인 여가(呂嘉)가 왕건덕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을 때 복파장군(伏波將軍)으로 여가를 사로잡고 반란을 토평한 공으로 임채후(臨蔡侯)에 봉해지고 도씨(都氏)로 수성(受姓)함으로써 도씨(都氏)가 비롯되었다고 한다.


시조 도 계의 후손으로 도 조(都祖)가 한나라 성제때 사람인데 고구려로 건너와 유리왕을 도와 공을 세우고 정착하면서 우리나라 도 씨(都氏)의 가계가 시작되었다.

우리나라 도씨의 시조 도조의 후손으로 백제 개루왕 때의 재상 도 미(都彌),그리고 통일신라 때의 도 유(都儒)는 신라에서 김유신을 도와 백제군을 격파하는 등 여러 공을 세워 상천후(尙川侯)에 봉해졌다고 한다.

후손 도 진(都陳)은 고려 태조를 도와 고려개국에 공을 세우고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에 봉해짐으로써 성주(星州)가 도씨의 관향이 되었다.


그러나 중시조 도 순(都順) 이전 선대의 세대(世代)는 문헌의 유실로 정확하게 밝힐 수 없어 고려중기에 전리상서(典理尙書:정3품 장관)를 지낸 도 순(都順)을 1세조로 받들며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도씨(都氏)는 성산도씨(星山都氏).성주도씨(星州都氏).팔거도씨(현재의 칠곡 漆谷) 등 몇 본이 있지만 모두 같은 뿌리이다. 성산(星山)은 성주(星州)의 옛이름이고,팔거는 옛날 성주(星州)의 속현(屬縣)이다.

도씨는 1752년 대동보를 편찬할 때 종회의 결의로써 당시 팔거현이 속한 성주목(星州牧)의 지명을 따서 성주도씨로 개칭하였다

삼국사기 동사열전(東史列傳),동국통감(東國通鑑),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등의 문헌에는 도순(都順) 이전 인물로  도도(都刀).도두(都頭).도공(都功).도비(都非).도눌최(都訥催).도유(都儒),도조(都祖).도미(都彌).도진(都陳) 등의 도씨성(都氏姓)이 등장한다.


한편  도조(都祖)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의 큰아들 유리(琉璃)가 이복 동생 비류(比流).온조(溫祚)와 왕권 쟁탈전을 벌일 때 유리(琉璃)를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한 공신이라고 한다.


백제 개루왕(蓋婁王) 때 사람인 도 미(都彌)는 부인이 아름답고 정숙하기로 소문이 났기에 개루왕이 그 소문을 듣고 그의 아내를 유혹하려다가 실패하자 도미(都彌)의 두 눈을 뺀 다음 배에 태워 한강에 띄워버렸다.

그러나 도 미(都彌)의 아내는 잠자리를 강요하는 왕을 속인 뒤 남편을 뒤쫓아 하류의 천성도(泉城島)에서 해후하고 고구려 땅에서 나물과 풀뿌리를 캐먹으며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삼국사기.삼국유사.조선씨족통보.전고대방(典故大方)등에 전함>

   
도 미(都彌) 부인 '아랑'의 정절은 역사상 손꼽히는 여절부덕(女節婦德)의 상징
   
                                 서울시 강동구 천호1동 천일어린이공원내

도 미(都彌)의 무덤은 경남 웅천(熊川)에 있는데 이 지방에서는 누구든 8월 초하룻날에 제일 먼저 벌초를 하면 득남한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도 미(都彌) 부인 아랑의 정절은 우리 역사상 손꼽히는 여절부덕(女節婦德)의 상징으로 1984년 5월 창작 무용극 [도미 부인]으로 꾸며져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문화 행사 무대에 올려졌고 그 후 여러나라에서 1백 수십여회의 공연을 가졌다.


 1세조 도순(都順)의 아들 도충박(都忠朴)은 고려 원종 때 전리상서(典理尙書:정3품 장관)를 지냈으며 3세 도유도(都有道).도유덕(都有德)등 형제도 공조전서(工曹典書:정3품 벼슬.장관)와 명경진사(明經進士)에 각각 올라 명성을 떨쳤다.

 4세손 도효원(都孝源)이 전객령(典客令),도효신(都孝臣)이 판서(判書:정2품벼슬 장관),도효안(都孝安)이 동양창 판관(東陽倉判官:종5품 벼슬) 등을 지냈고,도효정(都孝貞)의 손자 도천우(都千遇)는 경성수복공신(京城收復功臣)이 되었다.


전국의 도씨(都氏)들은 모두 이들의 후손으로 대구 달성.경북 울진.군위.성주.청도(淸道).경주(慶州).예천(醴泉),경남 고성(固城).산청(山淸).거창(居昌).청주(淸州).청산(靑山),충남 천안,논산시 연산(連山)등이 집성촌이다.


고려 때의 도씨(都氏)인물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사람은 도효안(都孝安)의 아들 도홍정(都洪正)이다. 그는 공민왕 때 시중(侍中:고려때 국정을 총괄하던 대신으로 종1품 정승)에 오르면서 정계의 중심 인물로 활약했다.


그의 아들 도길부(都吉敷)는 우왕 때 찬성사(贊成事:문하부의 정2품)를 역임한 무신으로 당시 세도가 이인임(李仁任)의 인척이었다.

도길부(都吉敷)는 1380년 왜구가 대거 침입 해 충청.전라도지방이 큰 화를 입게 되자 이성계등과 함께 충청도에서 전투를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왜구를 완전히 격퇴했다.

  

이것이 황산대첩(荒山大捷)이다. 그러나 이인임(李仁任)이 실각하는 정변에서 그 일파로 몰린 그는 죽음을 당하고 일족은 풍비박산 곳곳으로 흩어지게 됐다. 도(都)씨들은 이 참변을 <기사화변(己巳禍變)>이라 부르고 있다.


도길부(都吉敷)의 아들 청송당(靑松堂) 도 응(都膺)은 고려말을 대표하는 도(都)씨의 인물로 찬성사(贊成事:문하부의 정2품 벼슬)를 지낸 그는 이성계와 가까운 사이였다.

기사화변(己巳禍變)때 장인 우인열(禹仁烈)의 덕으로 화를 면하였고 고려가 망한 후에는 홍주 노은동(魯隱洞)에 은거하였는데 태조 이성계가 상장군(上將軍;정3품최고지휘관)에 임명하고 두 번이나 예물을 보내 출사를 권했으나 뿌리쳤다.

그 뒤에도 이성계가 다섯 차례나 불렀지만 끝내 응하지 않고 불사이군(不事二君:한 사람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함)의 지조를 지켰다. 이에 감복한 이성계는 청송당(靑松堂)이라는 호와 송절시(頌節詩)를 내려 그의 절의를 기렸다고 한다.

  

이때의 왕지(王旨) 4점과 왕명 1점이 보물 724호로 지정돼 충남 연산의 보호각에 소장되어 있다. 도 응은 고려말에 절의를 지킨 두문동(杜門洞)72현의 한사람이다.


도 흥(都興)은 공민왕때의 무신으로 명성을 날렸으나 상원수(上元帥)로 전라도도순문사(全羅道都巡門使)가 되어 재직중에 왜구의 침입을 잘 막지 못해 한때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왜구 방어에 공을 세웠다. 1392년 정몽주가 이방원 등에 의해 살해된 뒤 그의 일파로 몰려 유배를 당했다.


도 연(都衍)은 고려말에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으며 공민왕 때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정5품 벼슬)을 지냈다.


조선 초기에 도(都)씨 들은 고려말의 시련 때문에 출사(出仕)를 꺼려하였으며 세조 때에 도하(都夏)가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정언(正言:왕에게 간하던 일을 맡은 사간원의 정6품 벼슬).교리(校理:홍문관.승문원의 정5품벼슬)를 거치고 부사(府使:정3품 외관직)를 지냈다.

조선 중.후기에 이르러는 15명의 문과(文科;대과) 급제자와 무과 급제자를 배출했다.

특히 도성유(都聖兪).도여유(都汝兪).도응유(都應兪).도경유(都慶兪).도신수(都愼修).도신징(都愼徵).도형(都衡).도균(都勻) 등 이름난 학자가 많다.


도성유(都聖兪)는 성리학자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군량을 모았고 오경체용합일도(五經體用合一圖)와 체용각분도(體用各分圖)를 만들었으며 성리지학(性理之學) 등을 저술했다.

도여유(都汝兪).도신수(都愼修)와 더불어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서재(鋤齋) 용호서원(龍湖書院)에 배향됐다.


도여유(都汝兪)는 이괄의 난 때 의병을 모집하여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이 컸고 병자호란 후에는 은거하여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도응유(都應兪)는  '이괄의 난'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고 정묘호란 때는 창의상장(倡義上將)으로 공을 세웠으며 조정에 축성선장(築城選將)의 소(疏)를 올리는 등 국방 책략에 조예가 깊었다.

또 예문에도 밝아 오현예설(五賢禮設)을 편찬하였으며 동생 도경유(都慶兪)와 함께 대구 병암서원(屛巖書院)에 배향됐다.


도경유(都慶兪)는 인조때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합격하고,1627년 정묘(丁卯)호란 때 세자를 남원으로 호종(扈從:왕가를 모시고 따르는것)하였고,병자호란때는 조령(鳥嶺) 전투에서 대승했으나 쌍령(雙嶺) 전투에서 화약고가 폭발하는 바람에 패배해 그 죄로 유배되던 도중에 죽었다.

 그러나 후에 화약고 폭발이 군율을 어겨 그에게 처형당한 비장의 아들이 분풀이로 한 것임이 밝혀져 승지(承旨:정3품)로 추증됐다.

   
<용호서원>- 대구시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

 이 서원은 숙종 34년(1708)에 건립하였으며, 도성유, 도여유, 도신수 3현을 병향하고 있다. 도성유의 본관은 성주이고 자는 정언, 호는 양직당이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인 서사원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군량을 모았고, 오경체용 합일도와 체용각분도를 만들었다. 도여유는 도성유의 종제인데 자는 해중, 호는 서재로 일찌기 한강 정구와 낙제 서사원에게서 수학하였으며 덕업으로 세인으로부터 경앙을 받았다.

인조 2년(1623)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향병을 모집하여 모당 손처눌과 함께 난을 평정하는 공을 세웠다.도신수는 도여유의 장남으로 호는 지암이다. 인조4년(1626)때 문과에 급제하여 영해부사를 역임하면서 많은 업적을 올려 왕으로부터 내구마를 하사받았다. 저서로 지암문집이 있다. 이 건물은 정면 5간, 측면 1간반의 팔작지붕이다.

서재(鋤齋) 도여유(都汝兪)의 아들 도신수(都愼修).도신여(都愼與).도신행(都愼行).도신징(都愼徵) 형제는 아버지와 함께 5부자가 당대의 성리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맏아들 도신수(都愼修)는 인조 때 문과에 급제,여러 관직을 거쳐 함흥부사로 선정을 베풀었고 말년에는 고향에서 학문 연구에 전념했다. 함흥부사로 부임했을 때 억울하게 투옥된 백성을 모두 방면하자 밝은 하늘에서 갑자기 비를 내렸고 세인들은 이를 <설원우(雪寃雨)>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둘째 도신여(都愼與)는 효종 때 문과를 거쳐 예조정랑(禮曹正郞:정5품 벼슬),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정4품 벼슬)를 지냈으나 재임중에 사망하자 조정에서는 한 사람의 동량을 잃었다고 아쉬워하며 영이(요즘의 영구 차)까지 내렸다고 한다.


넷째 도신징(都愼徵)은 현종.숙종 때 활약한 학자로 유림에서 명망이 높았으며 특히 예제(禮制)에 밝았다.

그는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효종 비)가 죽어 자의대비(慈懿大妃:인조의 계비)의 복상(服喪) 문제가 일어났을 때 대공설(大功說)로 예론(禮論)이 기울어지자 상소를 통해 이를 반대하고 기년설(朞年說:만1년)을 주장 결국 이를 관철했다.

그 뒤 강릉참봉(參奉:종9품 벼슬),주부(主簿:종6품 벼슬)를 거쳐 용궁현감(縣監:종6품 외관직)으로 나가 치적을 쌓고 통훈대부(通訓大夫:정3품 당하관)가 되었다.


도 형(都衡)과 도 균(都勻)형제는 성주(星州)에서 후진양성에 힘써 성향선정(星鄕先正)으로 추앙받은 인물이다.

형 도형(都衡)은 중종 때 현량과에 천거되어 정언(正言:왕에게 간하던 관청인 사간원의 정6품 벼슬) 등을 지내다 공조좌랑(工曹佐郞:정6품 벼슬) 재임 중 조광조(趙光祖:기묘명현으로 지치주의를 실천하려다 사사됨) 일파로 몰려 파직됐다. 낙향 후 아우 도 균(都 勻)과 함께 후진 양성에 전념하며 성리회찬(性理會纂),효경집해(孝經集解) 등의 저서를 남겼다.


이밖에 도인엽(都寅燁),도석훈(都錫壎),도진삼(都鎭三) 등의 학자들이 있다.


국난을 맞아 활약한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백목원(白木員) 싸움의 도현종(都現宗).도흥종(都興宗) 형제가 유명했으며 기계.안강 전투에 큰 공을 세운 도맹교(都孟郊).도맹호(都孟浩) 형제, 화왕산성에서 전공을 세운 도 우(都遇)와 행주산성에서 큰 공을 세운 판관(判官:종5품 벼슬) 도맹삼(都孟三) 등이 성주도씨의 가통을 이었다.


일제시대 때는 지하활동을 하다 8ㆍ15 직전에 체포되자 왜관(倭館) 낙동강 철교에서 투신하여 순국한 도병철(都炳喆)이 유명했고 이상재(李商在) 등과 연계하여 조선교육협회를 조직했던 도진기(都鎭基), 성주에서 3.1운동을 주도한 도무환(都武煥) 등이 독립운동으로 가문을 빛냈다.(도씨 문헌 참고)

성주도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무과(武科:무관을 뽑던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6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21명 등 모두 30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관향인 성주는 1896년 경상북도 성주군으로 개편되었으며 1914년 군.면 폐합 때 관할면이 성주.벽진면 등 9개면으로 폐합되었고 1979년에 성주읍으로 승격하였다.

성주도씨는 지난 2000년의 인구조사에서 총 14,350가구에 인구는 46,186명으로 조사되었다.

 
 
              김진우
김진우(金鎭宇)-금석문(金石文)에 관심많아 각종 비문(碑文:지석.신도비.묘갈명 등) 연구 *족보전문가 *.민족문제연구소회원 *단재 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연구위원*지방자치실무연구소회원 *한국성씨연구소 대표(현) ,<지은책>- "한국인의 역사"(286개 성씨를 교과서에 없는 역사책으로  수록한 한국인 교양서.도서출판 춘추필법(春秋筆法,펴냄).(한국성씨연구소는 삼성의료원과 함께 2009년 "대한민국 성공기업 선정" ).2010년 MBC드라마넷 추석특집 "가문의 내력을찾아서" 출연

(2009년 올해를 빛낸 '장한한국인상' (문화)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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