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대전 충남 체육계 원로 박찬규 회장

태풍 따라 소낙비 몇 차례 퍼붓더니
산길은 금새 도랑이 났네
급물살 지난 자리
앙상한 돌만 남아 버렸고
거칠고 모난 자갈밭 돼 버린
오르막길 한 걸음 한 걸음 옮겨 가는데
어느덧 사정에 다다르고
저 멀리 마을이 청명하게도
눈 안에 들어오네
백로가 오늘인데
아직도 구국대는 비둘기 소리
귓전을 두들긴다

   
石村 박찬규 회장은 80세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정한 모습으로 대전 충남 체육계를 지키고 있다.

대전 충남 쳬육계의 산증인이자 원로인 석촌(石村) 박찬규(78) 대전 원로인체육회 회장이 지난 8일 새벽 뒷산에 오르며 지은 습작 시이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소낙비로 산길이 패이고 산돌만 앙상하게 남았는데 가을의 문턱인 백로를 맞아 비둘기들이 구국대는 모습을 그렸다. 그가 살아온 삶의 역정을 되돌아 보며 이제는 자연을 벗삼아 살아가는 달관한 경지에 이르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대전시 동구 자양동에서 큰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박 회장은 새벽 5시이면 일어나 하루도 빼놓지 않고 뒷산인 성동산에 오른다. 산에 오르면서 가끔이면 느끼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시를 쓰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시작해 지금도 하고 있는 서예와 수석은 이제 취미생활을 넘어 상당한 수준에 올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체육인의 길은 놓지 않고 있다. 80세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요즘도 후배 체육인들과 만나 지난 경험을 바탕으로 대전 충남 체육계의 발전을 걱정하며 조언을 아끼지 않는 영원한 체육인이다.

“시도 쓰고 서예와 수석활동으로 욕심없는 여생을 보낸다”

대전시 서구 탄방동의 한 빌라에 차려진 그의 개인 사무실은 욕심없는 원로 체육인의 마음을 담아놓은 듯 아담하게 꾸며져 있다. 간판은 대전 원로 체육인 협회. 그는 이곳에서 난(蘭)도 치고 달마도(達磨圖)도 그리는 등 서예활동을 하며 시를 짓기도 한다. 또한 체육인들과 수석인, 서예인들이 부담없이 들러 담소도 하며 옛날을 이야기 하는 곳이도 하다.

   
박 회장은 요즘 자신의 개인 사무실에서 난도 치고 달마도를 그리면서 이웃들에게 보시를 해주고 있다.
“우리가 체육계에서 활동할 때는 순수한 아마추어 정신으로 헌신하고 봉사하는 자세로 임했는데 지금은 너무 황금만능주의로 흐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우리 때만 해도 체육관 차려놓고 기량이 좋은 선수라고 생각하면 집으로 데려와 합숙을 하면서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렇다 보니 집안에는 새해들어 2월이면 쌀이 떨어지기 일쑤였지요.”

박찬규 회장은 1932년 대전시 동구 자양동에서 태어나 동광초등학교와 대전공업고등학교(토목과)를 거쳐 지금은 고려대로 병합된 국학대학 경상과를 졸업했다. 이 후 60년에 동구 인동에 복싱 전문 체육관인 한밭체육관을 창립하고 관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인 체육인의 생활에 들어간다. 그 전까지만 해도 복싱은 권투구락부로 운영되었으나 체계적이지 못했고 한밭체육관이 충청권 복싱의 산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한밭체육관이 배출한 복싱 선수들의 면면을 보면 이를 증명한다. 우선 로마 올림픽에 출전한 이광주 선수와 송순천 선수(동경 올림픽 은메달)를 비롯해 세계주니어 선수권대회 우승자 김수원 선수 등 국가 대표급들이 수두룩하다. 프로 복싱 선수 중에는 아직도 중년층들 사이에서 '라이트 훅' 한 방으로 기억이 생생한 염동균 WBC챔피언도 박 회장이 길러낸 챔프다.

“제 체육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웠던 일은 53회 인천 전국체전에서 단일 한밭체육관 소속 선수들이 전국 종합 1위를 차지한 겁니다. 지금은 일반부와 대학부, 고등부 등으로 나뉘어졌지만 당시는 이런 구분이 없었고 총망라한 가운데 단일 체육관에서 1위를 차지한 것입니다. 아마도 대한민국 복싱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 될 것입니다. 아직도 보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1960년 한밭체육관 창립, 염동균 챔피언 등 수많은 선수 길러내

이같이 복싱체육관 관장으로 시작한 그의 체육인생은 화려하다. 70년 충남 아마추어 복싱 연맹 회장과 82년부터 시작된 충남도 체육회 사무처장(8년)과 대전광역시로 분리되면서 대전시 체육회 사무처장(8년) 등 총 16년에 걸쳐 우리 지역의 체육회 사무처장으로 대전 충남 체육을 이끌어 왔다. 이런 가운데 전국 시도체육회 사무처장 협의회 회장을 3선에 걸쳐 맡아왔고 대한체육회 이사로, 전국체전위원회 위원장으로 전국 체육계에서도 알아주는 거물로 활약해왔다.

이같이 체육계의 중요 직책을 맡으면서 어려움도 적지 않았지만 보람도 많았다. 어려웠던 점으로는 충남도에서 대전광역시로 분리되면서 대전시 체육을 새롭게 일으켜 세우는 일이었다. 당시 대전시가 포함된 충남의 경우 육상과 수영은 전국 1위 자리를 내놓지 않았을 때였는데 대전으로 분리되면서 최하위로 떨어졌다. 그렇지만 박 회장은 과도한 공명심은 금물이라고 판단했다. 선수 하나를 육성하는데 적어도 10년 이상 걸리는데 돈 주고 스카웃해서 한 개 대회에 써먹고 버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성과위주 보다는 질적인 향상에 중점을 둔 것도 이 때문이다.

   
박 회장은 체육계의 원로로서 지금도 체육행사에 빠짐없이 나가 후배들을 격려하고 있다.

박 회장은 체육행정을 하면서 가장 큰 보람으로는 지난 95년 대전서 열린 전국체전의 성공적인 개최를 꼽는다. 당시 김운용 대한체육회 회장이 완벽한 체전 준비와 운영에 감탄할 정도였다고 전한다. 박 회장은 그 때 IOC부회장이기도 했던 김운용 회장에게 대전에서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개최하도록 해 줄 것을 건의했는데 일부에서 선거를 겨냥해 정치 쟁점화 시키는 바람에 무산돼 안타깝다고 회고했다.

“시도 체육회도 이제는 운영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봅니다. 지방선거로 인해 지방자치단체장이 바뀔 때 마다 정치바람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체육단체는 근원적으로 국가예산으로 지원하고 현재 시도지사가 당연직 시도 체육회 회장으로 되어 있는 정관을 바꿔서 회장을 자율적으로 선출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16년간 대전 충남 체육회 사무처장 지내..."95년 대전 체전 성공개최 보람"

그는 대전에서 유니버시아드 대회가 추진되다가 정치바람에 무산된 것이 아직도 몹시 아쉬운 모양이다. 그래서 체육계의 탈정치화를 주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박 회장은 “우리나라에서 체육만큼 세계적으로 발돋움한 것이 없다”면서 “체육인으로 자랑스럽다”는 말을 여러 번 강조했다. 1920년 대한체육회가 창립됐는데 취지문 서두에 “보다 높은 창공에 높이 솟은 푸른 솔아... 들과 산을 누비고 다니는 약동하는 짐승들을 모습을 보아라...”는 내용을 인용하면서 "우리나라 체육의 역사는 독립정신에서 부터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이를 바탕으로 발전한 지금의 우리 체육은 경제적 파급효과는 물론 국민의 자부심을 높여 발전해 국가가 발전해 나가는 모멘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석촌은 요즘도 한달에 한두번씩 수석활동을 위해 야외에 나간다. 오른 쪽은 박 회장이 제 8회 전국수석대전에 출품한 경석 '山'

그는 이제 우리나라도 건국 62년이 된 만큼 이데올로기에 의해 양분돼 대립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진보도 자유경제체제 하에서 진보여야지 종북세력으로 진보는 곤란하다고 말한다. 그는 그러면서 지난 2008년 청와대에 제출한 청원서 한 장을 기자에게 보여주었다. 자신이 지난 50년 6.25 당시 9월 수복작전 중 고등학교 3학년 신분으로 이웃 동료들과 함께 인민군을 습격해 인민군 장교를 사살했으며 국가 유공자로 인정해줄 것을 청원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정규 부대 소속이 아니라는 이유로 국가가 인정을 해주지 않고 있다며 아쉬워했다.

박 회장은 앞으로의 역할에 대해 후배들을 위해 조용히 뒷바라지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말한다. 나이 먹은 사람이 옛날 어려웠을 때만 내세워 잔소리하고 참견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후배들을 격려하는 행사를 제외하고는 주로 서예와 수석으로 소일하면서 인생을 차분하게 정리하고 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한 두 차례 남한강 변으로 수석채집에 나서고, 달마도와 난 등을 그려 좋은 이웃이 있으면 ‘조건 없이’ 보시하고 있다.

“인생은 꿈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습니다. 한마디로 인생은 잠깐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자존심을 꺾자, 화내지 말자, 욕심을 버리자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박찬규 회장 연락처:010-8722-9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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