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당구 황제 김용석 옹,"후배들 세계 정상보고 싶다"

   
'당구 황제'로 불리우는 김용석 옹은 '일단 세리' 기술을 만들만큼 독보적인 존재였다.
‘만점’ 당구는 뭘 의미할까.
단순히 점수 10,000점을 얘기하는 것일까. 아니면 ‘만점’(滿點), 즉 ‘Perfect'를 말하는 걸까.

대전에 만점짜리 ‘당구의 신’(神)이 살고 있다. 그는 한 큐에 1만점을 치는 완벽함을 자랑하는 ‘무결점’ 당구인이다. 바둑에 10단이 없다. 9단이면 ‘입신’(入神), 즉 더 오를 곳이 없다. 당구에서도 최고 점수인 2,000점의 다섯 곱절인 ‘만점’당구는 바둑으로 치면 입신이다. 그래서 후배들은 그를 ‘황제’라고 부른다.

김용석 옹. 올해 70세다.
당구계에서 그는 살아있는 전설이다.
당구 기술 '일단 세리'를 개척한 것이며 한일 국가대표 당구대회에서 최초로 일본을 꺾은 기록, 1985년부터 5년간 프로 당구대회 연속 석권 등등... 그를 둘러싼 전설은 누구도 깨지 못하고 있다.

“당구는 정신운동입니다. 집중해서 공을 칠 때 비로소 자기 실력이 나옵니다. 그리고 거짓이 없는 운동이기도 합니다. 상대가 둥근 공이다 보니 플레이어가 치는 대로 반응을 합니다.”

대전시 서구 둔산동 은하수 아파트 옆 은하수 당구장에서 만난 김 옹은 당구 예찬으로 말을 시작했다. 은하수 당구장은 후학을 가르치면서 대화를 나누는 장소였다. 화려했던 과거를 보여주는 대통령 표창장과 신문 스크랩, 그리고 각종 트로피가 한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지금은 쓰리 쿠션 쪽으로 많이 하지만 정통 당구는 4구(球)입니다. 전국체전에 시범 종목으로 들어가 있는데다가 생활수준이 높아져서 당구 인구가 많이 늘었습니다. 제가 시작할 때만해도 장비는 물론 당구 자체에 대한 인식도 낮았죠.”

당구는 우연한 기회에 시작했다. 경희대 체육학과에서 역도선수로 있던 중 허리를 다쳤다. 쉬는 동안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큐대를 만졌다. 1960년도 일이었다. 그게 ‘황제’를 탄생케 했다.

“가벼운 운동으로 선택한 게 당구였습니다. 조금 해보니까 역도선수로서 순발력도 있어 남들보다 발전 속도가 빨랐습니다. 초대 당구 명인이었던 조동성 선생님이 저를 제자로 삼았습니다.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당구를 쳤습니다.”
   
일단 세리 기술.


그 게 1964년도 쯤 되었다.
이후 김 옹은 당구 기술 연마에 몰입했다. 통금 시간이 있던 그 즈음, 12시를 넘기면서 해제 때가지 밤을 새었다. 훗날 부쩍 늘어난 실력을 보고 깜짝 놀랄 뿐 누구도 밤새워 갈고 닦은 일을 알 수가 없었다. 마침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뤄지면서 문화가 자연스럽게 교류가 되었다. 그 속에 당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한국 당구는 두수 아래였다.

“1970년대 한일 국가 대항전은 큰 시합이었습니다. 일본이 기술적으로 앞서 있었지요. 그걸 몇 년 사이 복수를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제가 76년, 78년 우승을 하면서 처음으로 당구에서 일본을 앞서게 되었습니다.”

국가 대항전을 승리로 이끈 그의 기록은 능가할 후배가 나오지 못할 만큼 독보적인 존재였다. 이후 후배 양성과 기술 개발 쪽으로 눈을 돌렸다.

일단 세리.
당구를 치는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는 기술이다. 빨간 공을 한 쪽으로 몰라가면서 치는 기술이다. 이제는 보편화되었지만 그 기술을 '당구의 황제‘ 김용석옹이 개발했다.

“한 때 서울에서 내노라하는 고수들과 내기를 했습니다. 도박 개념보다는 정정당당한 승부를 겨룬다는 쪽에 더 무게가 실렸던 게임이었습니다. 그 때 제가 싹쓸이를 했습니다. 이후 서울에서 저를 보고 ‘대전 킴’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은하수 당구장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는 김용석 옹과 신영학 사장.


당구 인생 50년.
이제는 원로 중 원로가 되었지만 후학 양성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은하수 당구장에서 지금도 10여명을 지도하면서 자신이 갈고 닦은 기술을 고스란히 전수해주고 있다. 선배의 후배 사랑에 후배들은 ‘김영석 배’ 당구 경기를 만들어 보답을 했다. 올해 4번 째 대회를 치뤘다. 개인 이름을 건 타이틀 대회는 최초다.

“한국 당구가 이제는 세계 정상급에 올랐습니다. 대전에서 세계 챔피언이 나오는 걸 보면 여한이 없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제가 일본 당구를 꺾기위해 남몰래 노력했듯이 후배들이 저와는 또 다른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1.4 후퇴 때 정착한 대전이 제2의 고향이 되었다는 김 옹은 당구 저변 확대에 기뻐하면서 제자들이 지어준 호 ‘정도’(正道)처럼 당구를 위해 정도를 걸으면서 여생을 보내겠다고 다짐했다. 사진 촬영을 위해 기꺼이 취해주는 포즈를 보면서 그의 당구인생은 지금도 진행형이라는 걸 느꼈다. 그는 만점(滿點) 당구인이었다. (연락처)010-7494-8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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