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우의 족보이야기-(25) 용인이씨(龍仁李氏)

   
                         뿌리공원에 조성된 용인이씨 조형물.전/대전 중구
작품명  비상(飛翔) 조각가  백 승 업 (한국조각가협회 회원) 작품설명  봉황이 주위공간을 감싸안으며 무한한 우주공간(宇宙空間)속으로 날아오르려는 형태를 표현한 작품임.

 

   
                   뿌리공원에 조성된 용인이씨 조형물.후면/대전 중구

 

<뿌리공원에 새겨진 용인이씨 유래>

용인이씨(龍仁李氏) 시조의 휘(諱)는 길권(吉卷)이시며 천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으셨으며 천문지리에까지 통달하셨다. 신라 말에 용인지방의 토호였던 공(公)께서는 고려 태조를 도와 개국과 삼국통일 대업의 공으로 구성백(駒城伯)과 고려통합삼한벽상공신(高麗統合三韓壁上功臣:신흥사 공신벽에 초상이 그려진 공신)에 책봉되시고 삼중대광(三重大匡:정1품 품계)과 태사(太師:정1품 벼슬)의 벼슬에 제수되셨고 그 후 안의공(安毅公)의 시호를 받으셨다.
고려 말에 불사이군의 충절을 세우기도 했으나 양도(兩朝:고려.조선)에 걸쳐 대(代)를 이어 많은 현관학자(顯官學者)를 배출하였다. 정조대왕께서도 용인이씨는 가계(家系)가 오래되고 이름난 조상의 음덕으로 대대로 높은 벼슬이 끊이지 아니하니 과연 대성(大姓)이로다 하신 성교(聖敎)로 인하여 명문세가로서의 영예가 더욱 빛나게 되었다. 자자손손 효도(孝道)와 우애(友愛) 충직(忠直)과 후덕(厚德) 청렴(淸廉)과 정직(正直)의 종훈(宗訓)으로 일문(一門)의 법도(法度)를 이루게 되니 용인이씨는 한국의 대표적 씨족이다.

용인이씨대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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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우 작가의 해설> 

                                                          <용인이씨 현대인물>

 이진삼(육사.육군참모총장.현 선진당 국회의원.부여).이진백(육군소장.정보사령관.대한중석 사장.이진삼의 동생).이훈규(대전지검장.현 한나라당 충남도당위원장).이인규(서울 중앙지검 3차장.대전고검차장.전 대검 중수부장).

 이진강(대검 중수부 제1과장.서울지방변호사협회장(85대) 현.대한변호사협회 회장.

이원영(민변부회장.17대 국회의원.신진보연대 공동대표).이주상(경기도의회 부의장).이원옥(대전시의회 전 의원).이건영(용인시 의회의원)

이한빈(경제부총리.2004년 경희대 명예교수).이춘림(현대그룹 공신.현대중공업회장때 정몽준은 현대중공업 사장.이명박대통령 신입사원 면접때 면접시험관).

이지송(현대건설 사장.현 한국토지주택공사(LH)사장)

이세규(육사 7기.공주출생.11사단장.전 중앙공무원교육원 원장.제8대국회의원)

이원목(전 청양군수.용인이씨 대종회 회장).이원량(전 청양군수)

  이원장(육사 수석졸업.육군소장 예편.6사단장.4대 국회의원.박정희때 7대 국회의원)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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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인이씨(容仁李氏)

                                  "이씨왕조에서는 벼슬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대제학(大提學:문형) 3명,문과(文科)급제자 86명

                        정승 이세백과 양관대제학.영의정 지낸 이의현 부자(父子) 정승

용인이씨(容仁李氏)가 시조로 받드는 이길권(李吉卷)은 고려시대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940년 고려에 공을 세운 공신중 신흥사를 중수할때 그곳의 공신당 동.서벽에 초상이 그려진 공신을 벽상공신이라 함)으로삼중대광(三重大匡:고려 때 정1품 품계)에 올라 태사(太師,태사는 3공(태사 태부.태보)의 정1품 벼슬로 3공중 가장 윗서열)를 지냈다.

시조 이길권은 신라 말 경기도 용인지방의 토호로 천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천문지리에까지 통달하였다.그가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공을 세워 훗날 현재의 용인지명인 산성군(君)에 봉해졌기에 후손들이 용인(龍仁)을 본관으로 하고있다.

용인이씨는 고려때 큰 인맥을 형성하였는데 덕종때 이효공(李孝恭).인종때 문하시랑(門下侍郞:정4품 차관)을 지낸 이현후(李鉉候).그리고 이광시(李光時)는 충숙왕때 평장사(平章事;정2품 부총리)에 이르렀으며 판도판서(版圖判書:호부상서로 바뀜.정3품 장관) 이광봉(李光逢)은 충숙왕때 문하평리(評理:참지정사가 바뀐것으로 종2품)에 이르렀고 이중인(李中仁)은 충정왕때 문하우시중(門下右侍中:종1품 정승)을 지내는 등 이들은 고려조의 대표적 인물들이다.

이광시(李光時)는 곧은 성품으로 충렬왕(忠烈王)이 몽고복장을 채택 장려하는 것을 극간(極諫)하다 유배되는 등 3차례에 걸쳐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바른 말을 서슴치 않았다.

이중인(李中仁)은 이성계일파의 정변으로 정국이 혼란해지자 벼슬을 버렸고 조선개국 후에는 머리를 풀고 산에 들어가 은둔했던 절신(節臣)이다. 그는 고려가 망하자 한 때 정 과(鄭過) 등 고려조의 8판서(八判書)와 함께 성거산(聖居山)에 들어가 분신자결을 하려다 자손들의 만류로 그만두고 은거하여 세상을 마쳤다.

 그는 자손들에게 "이씨(李氏) 왕조(王朝) 밑에서는 벼슬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유언까지 남겼다.

 절신 이중인은 서기 1315년(고려 충숙왕 2)송경 일청재에서 태어났다.그가 태어날때 기이하게도 이조은.안우기 라는 사람이 다같이 일청재에 둥근해가 걸려있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중인이 장성함에 따라 용모가 단정하고 심지가 확고하여 이백겸이라는 사람이 말하길 "그대의 흉중에는 진나라와 초나라와 같은 강함이 있다"라고 칭송하였다.그때부터 호를 '진초'라 하였다.

그는 충선왕때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고 여러벼슬을 거쳐 상서성 상서(尙書省 尙書:정3품 장관),중서문하평장사(平章事:중서문하성의 정2품 벼슬.부총리)에 이르렀다.

 충정왕때는 '동덕찬화 보리공신'과 '구성부원군'의 봉호를 받았으며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정1품)으로 문하우시중(門下右侍中:종1품 정승)에 올랐다. 시호는 충숙이다.

조선조때 태조 이성계가 다시 구성백(駒城伯)에 봉하였으나 이중인은 이를 받지 않고 불사이군(不事二君:한사람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함)으로 두문불출하다 세상을 떠났다.

 그때 세상사람들이 그를 칭송하는 시(詩)에  "쓸쓸하고 고요한 두문동에는 외로운 충성만이 해와 별과 같이 빛나고 벼슬을 마다 하고 절개를 지키니 천추에 그 방명을 드리었네" 라고 하였다.

  부인은 군부인(郡夫人:1품 벼슬의 아내에게 내리던 봉작) 천안전씨(全氏)로 대제학(大提學:정2품 으뜸벼슬.문형)을 지낸 문효공 전 신의 딸이다.

 이중인(李中仁)은 용인이씨(龍仁李氏)의 중시조(中始祖)로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龍仁市) 기흥구(器興區) 영덕리(靈德里) 속칭 잔다리에 있으며 용인(龍仁)의 3대 명당 중 하나로 꼽히며 후손들은 매년 시제(時祭)를 받든다.

용인이씨 문중에서 그를 중시조로 받드는 것은 시조로부터의 선대 산소들이 모두 실전(失傳:대대로 이어온 묘소나 사적을 알수없게 됨)된데다 그의 후손이 가장 번성한 때문이다.

 고려말 형조전서(刑曹典書;정3품 법무부 장관)를 지낸 그의 장남 이사영(李士穎)은 이성계(李成桂)일파에 몰려 목은(牧隱) 이색(李穡) 등이 유배될 때 남원(南原)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숨졌다. 그의 아들까지 이중인(李中仁)의 직계로 3대(代)가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중인(李中仁)의 둘째아들 이사위(李士渭)는 아버지의 유언과는 달리 고려조에 관찰사 등 벼슬을 하고 조선조에도 벼슬에 나가 개성유수(開城留守:2품 지방관)를 지냈다. 왕조가 바뀌는 역사의 전환기에 형제가 걷는 길은 서로 달랐다.

이사위(李士渭)가 아버지 이중인(李中仁)의 뜻인 불사이군(不事二君:한사람이 두 임금을 섬기지아니함)을 어길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용인이씨(龍仁李氏) 족보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조선개국 후 이성계는 민심수습과 정국안정을 위해 인재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신들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켜 등을 돌렸다. 때문에 유신들에 대한 회유와 탄압은 날로 심했다. 탄압에 견디지 못한 유신들은 자신들의 보신(保身)을 걱정하다가 이사위(李士渭)를 대표로 내세워 벼슬길에 나가도록 종용했다.

 

그는 선친의 뜻을 따르지 못한 것을 못내 한스럽게 여기면서도 이같은 동료들의 처지와 개성백성(開城百姓)들의 신망을 저버릴 수 없어 벼슬길에 나가 오래도록 그 자리를 맡았다…"

용인이씨(龍仁李氏)는 조선조에 상신(相臣:정승) 3명, 대제학(大提學:예문관.홍문관의 정2품 벼슬.문형) 3명, 청백리(淸白吏) 1명, 판서(判書:정2품 장관) 15명 그리고 문과급제자 85명을 배출했다.

 용인이씨는 3품 이상의 인물이 2백 50여명에 달한다. 또한 한 집안에서 부자(父子) 정승(이세백(李世白).이의현(李宜顯))과 3상 4판(三相四判)(3상 三相-이세백(李世白).이의현(李宜顯).이재협(李在協) 4판 四判-이보혁(李普赫).이경호(李景祜).이중호(李重祜).이재간(李在簡)등을 배출했고 6판서(六判書) 집(이숭호.이재학(李在學).이규현(李奎鉉).이삼현(李參鉉).이원명(李源命).이돈상(李敦相)과

 8대에 걸쳐 14명이 정경부인(貞敬夫人:1품 벼슬 부인의 봉작)이 된 집도 있다. 이들 모두가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이사경(李士慶)의 후손들이라고 한다.

 

                부사공파(府使公派)가 자손 및 벼슬한 수가 용인이씨(龍仁李氏) 절반이상

 

용인이씨(龍仁李氏) 여러 파중에서 가장 수가 많고 융성을 누리기는 16세 이백지(李伯持)의 아들 5형제 중 큰 아들인 이수강(李守綱)의 후손인 부사공파(府使公派)로 자손의 수와 벼슬한 수가 용인이씨(龍仁李氏) 절반이상이다.

이백지(李伯持)는 태종때 관찰사(觀察使:종2품 감사)를 지냈고 청백리(淸白吏) 이행검(李行儉)과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이 담(李湛).선조때의 관찰사(觀察使:종2품 외관직.감사) 이덕회(李德恢).남원판관(南原判官:종5품)을 지낸  이 일(李鎰).광해군때 무용대장(武勇大將) 이사경(李士慶)등은 조선 초기 용인이씨(龍仁李氏)의 인물들이다.

그중 이행검(李行儉)은 1453년(단종 원년)에 일어난 이징옥(李澄玉)의 난(亂) 당시 함경도 진무(鎭撫)로 있으면서 그를 계략으로 종성(鐘城)에 머물게 한 뒤 진압한 공으로 1등 공신에 책록되기도 했다.

이 담(李湛)은 의학.천문.산수에 능했던 성리학자로 12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라나 소학(小學)을 배울 때 "과부의 아들에게 특이한 행실이 없거든 사귀지 말라"는 구절에 크게 충격을 받아 그때부터 밤낮없이 면학에 힘썼다고 전한다.

그는 1547년(명종3년) 정미사화(丁未士禍)에 화를 입어 양산(梁山)으로 귀양갔다 풀려나기도 했는데 귀양가면서도 어찌나 태연한지 금부도사(禁府都事)조차 감탄했으며 유배(流配)에서 풀려나 많은 하객들이 찾아와 축하하는데도 조금도 기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아 도리어 하객이 문안했을 만큼 성품이 신중 침착했다 한다.선조때 성리학자 이담(李湛)이 이름을 날렸고,

이 일(李鎰)은 임진왜란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각 지방의 병마를 지휘하던 종2품의 무관)로서 명나라의 원군과 함께 평양수복에 공을 세운 명장이다.그는 순변사(巡邊使:왕명으로 군무를 띠고 변경을 순찰하던 특사)로서 많은 공을 세웠다. 

 이충무공(李忠武公)이 함경도 조산만호(造山萬戶:종4품 벼슬)로 있을 때 누명을 쓰고 벌을 받게 된 것을 나서서 벌을 면하게 한 인연도 있다. 훗날 이충무공이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무관의 정3품 벼슬)가 되어 나라를 구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역할이 있었던 셈이다.

광해군때 대사간(大司諫:왕에게 간하던 일을 맡아하던 사간원의 3품 으뜸벼슬)이었던 이사경(李士慶)은 당시 세력을 장악했던 대북파(大北派)에 아부하지 않고 직간(直諫)을 계속하다 대북(大北)의 탄핵으로 사임하기도 했던 강직한 인물이다.

 그는 당시 대북파(大北派)의 영수 이이첨(李爾瞻)에게 굴하는 일이 없이 정도(正道)와 청렴으로 일관, 조신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은 명신으로 난세의 완인(完人)이란 칭송을 받았다.

 

 
                                      이세백. 이의현(李宜顯)은 부자 정승(政丞)
 

용인이씨가 자랑하는 또 한사람의 인물은 이세백(李世白)이다.

용인이씨(龍仁李氏)는 이세백(李世白)이 숙종 때 좌의정(左議政:의정부의 정1품벼슬. 정승)에 올라 조선중기 이후 특히 영.정조대에 가장 성세를 보인 가문이다.

숙종 때 예조판서(禮曹判書:정2품 벼슬.장관),영조 때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홍문관 대제학,예문관 대제학을 일컫는 말.정2품 벼슬.문형)을 거쳐 큰 명성을 얻고 이어 우의정(右議政:의정부 정1품 벼슬.정승)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정1품벼슬. 정승)에 오른 이의현(李宜顯)은 이세백의 아들이기에 부자 정승(政丞)으로 유명하였다.

   

<이세백 비명>

유명 조선국 좌의정 증 시호는 충정.이공 세백지묘.

정경부인 영일정씨(연일정씨) 부우

이세백(李世白)의 증손 이보혁(李普赫)은 영조때 성주목사(星州牧使:정3품 외관직)로 있으면서 1728년(영조 4)이인좌의 난(李麟佐 亂)을 토평해 공을 세워 분무공신(奮武功臣)3등과 인평군(仁平君)에 봉군되었다가 영조 24년에 부총관(副摠官:종2품 벼슬), 영조 29년 한성판윤(漢城判尹:정2품 벼슬. 서울특별시장)에 이어 공조판서(工曹判書:정2품 벼슬.장관)를 지냈다.

 이경호(李景祜)는 영조때 호조.예조.병조의 판서와 정조때 이조판서를 지낸 이중호(李重祜)등 형제는 그의 아들이고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재협(李在協)은 이보혁(李普赫)의 손자이며 이중호(李重祜)의 아들이다.

영조때 예조판서(禮曹判書:정2품벼슬.장관)와 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벼슬.문형)에 오른 이의철(李宜哲)이 명성을 떨쳤다.

 또한 정조때 형조판서(刑曹判書:정2품 벼슬.법무부장관)와 병조판서(兵曹判書:정2품 벼슬.국방부 장관)를 지낸 이재학(李在學)과 이조판서(吏曹判書:정2품 벼슬)를 지낸 이재간(李在簡) 이 가통을 이었다.

 또한 예조판서를 지낸 이참현(李參鉉)과 고종때의 이조판서 이원명(李源命),  대제학(大提學)과 형조판서를 역임한 이돈상(李敦相)등이 용인이씨가 배출한 인물들이다.

화가(畵家) 이재관(李在寬)은 구름.초목(草木).비조(飛鳥)의 그림과 인물화에 뛰어났으며 작품으로 송하인물도(松下人物圖).약산초상(若山肖像). 전가독서도(田家讀書圖). 월하선인도(月下仙人圖). 취적도(吹笛圖)등을 남겼는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일부가 소장되어 있다.

일제강점기때의 인물로는 독립운동가였던 이원선(李源善).이월로(李月老) 등이 있는데 특히 이월로(李月老)는 한말부터 독립운동에 투신, 1927년 정의부(正義府) 지역책임자로 활동하며 군자금 모금 등에 종사했으며 1930년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겪는 등 활약이 컸다.

 용인인씨는 조선시대에 상신(相臣:우의정.좌의정.영의정 등  정1품 벼슬.정승) 3명,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벼슬.문형) 3명,청백리 1명,문과(文科;대과)에 86명,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33명,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196명,역과(譯科:중국어.몽고어.일본어.여진어에 능통한 사람을 역관으로 뽑기 위해 보던 과거)에 2명 등 모두 317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였다.

 문헌에 따르면 경기도 용인시 수지의 풍덕천리는

고려말엽부터 6백여년간 용인이씨(龍仁李氏) 가문이 살아온 동족부락이다.
처음 이곳에 들어온 사람은 고려말의 절신 이사영(李士潁)이라고 한다.

 그는 고려가 망하자 아버지 아들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조선조에 항거했다고 한다.이사영은 이곳에 터를 잡고 마을주변에 수양버들을 심어 숲을 만들었으며

그 숲속에 정자를 세우고 글을 읽었다고 한다.그래서 생긴 이름이 정자뜰(亭坪)이다.

이후 후손들도 용인의 토반으로 조용히 살아왔다.
마을 전체 50여 가구 250여명이 모두 이사영의 후손들이다.(자료참고)

 본관소재지인 용인은 현재의 경기도 용인시이며 1413년(태종13) 용구.처인의 두 현을 합하여 용인으로 고치고 1896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경기도 용인군이 되었다가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양지군 일원과 죽산군(竹山郡)의 일부를 편입하여 내사면(內四面).외사면(外四面).원삼면(遠三面)의 3개면을 증설하였다.

1938년 관할 수여면이 용인면으로 개칭되었고 1963년 고삼면(古三面)을 안성군에 편입시켰다.1979년 용인면이 읍으로 승격했고 1996년 용인군이 용인시로 승격되면서 용인읍은 4개의 행정동으로 분할되어 폐지되었다. 

인구조사에 의하면 용인이씨는 1985년에는 총 6,572가구에 27,389명이었으며
2000년에는 9,796가구에 인구는 32,050명으로 조사되었다.   

   
                                                   <이중인 묘역>
 2007년 8월7일 용인시 향토유적  제60호 경기 용인시 기흥구 영덕동 산8  
시 대  조선시대 용인의 3대지 8명당 중 하나로 알려진 이중인(1315~1392년 이후)의 묘는 기흥구 영덕동 산8번지 (속칭 잔다리 마을)에 있다.

                                                                   <이중인 묘역>
 봉분은 기단부에 호석을 돌려서 방형으로 조성된 단분 묘(532㎡)이며 묘 앞에 혼유석.상석.향로석과 우측에 묘표가 장대석 위에 있고 그 아래 가운데 장명등을 중심으로 좌우에 망주석.양석.복두공복형 문인석 및 동자석이 있다.

 묘표 음기에 의하면 17051년(숙종 31) 선생의 13세손 이세재가 경기관찰사로 있을 때 "그동안 훼손되어 있었던 묘소를 찾아 식수와 봉분을 정비하고 묘답을 찾아내 제사를 받들게 하며 묘비를 세웠다"고 하였으며, 그에 앞서 11대손 후산이 관동절도사로 봉심한 바 있고  13대손 이세백이 우의정으로 봉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구성부원군 이중인은 고려 말 절신으로 호는 진초, 본관은 용인, 시호는 충숙이다. 이중인은 용인이씨 중시조로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개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할 때 용인지역 토호로 큰 공을 세운 용인이씨의 시조 태사 고려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숭록대부 이길권의 14세손이다.

<계 파>
*부사공파(府使公派)
*부사공계종파(府使公繼宗派)
*부정공파(副正公派)
*사용공파(司勇公派)
*사직공파(司直公派)
*소경공파(少卿公派)
*순위공파(巡衛公派)
*승랑장공파(勝郞將公派)
*주부공파(主簿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
*초산파(楚山派)
*판관공파(判官公派)
*현감공파(縣監公派)

   

이재관의 파초하선인도(芭蕉下仙人圖)

이 그림은 6폭으로 이루어진 선인도 중의 한 폭으로 네 폭에는 여선(女仙)이 등장하고 있으며 두 폭에는 고사(高士)가 나타나 있다.  굵은 붓으로 그린 이 그림은 우단 중앙에 조희룡(趙熙龍)의 발문이 있다. 우단 중앙에  파초엽상게제시소당(芭蕉葉上揭題詩 小塘) 의 제(題)와 관서에 이어 일소석실(一蕭石室)이란 백문방인과 '소당' 이란 주문방인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재관(李在寬,1783~1837)

이재관은 본관이 용인(龍仁)이며 자는 원강(元綱). 호는 소당(小塘). 벼슬은 등산첨사(登山僉使)에 이르렀다. 새.구름.초목.초상화에 능해 1836년(헌종2)에 태조의 어진(御眞)을 그려 영흥부 선원전(永興府璿源殿)에 있던것이 훼손되어  다시 복원하여 경희궁(慶熙宮)에 모셨다.

전통적인 수법을 계승하면서 독자적인 남종화의 세계를 수립한 화가이다. 작품으로 파초하선인도.송하인물도(松下人物圖).약산초상(若山肖像).선인도(仙人圖).전가독서도(田家讀書圖) 등이 있다.

산수화나 인물화에 뛰어났고 그의 그림은 일본인들에게 인기가 있어 해마다 동래관을 통하여 그의 그림을 사갔다고 한다. 참고-<한국인의 역사.용인이씨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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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우

김진우(金鎭宇)-금석문(金石文)에 관심많아 각종 비문(碑文:지석.신도비.묘갈명 등) 연구 *전국의 문화유적 탐방 지방사 연구 *족보전문가 *민족문제연구소회원 *단재 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회원 *한국성씨연구소 대표(현) <지은책>- 한국인의 역사(286개 성씨를 교과서에 없는 역사책으로  수록한 한국인 교양서.도서출판 춘추필법 펴냄).공주고.고려대 경영학.한국과학기술원 수료

이메일 sewoora@naver.com 블로그.카페 blog.naver.com/sewoora.cafe.naver.com/sallija<한국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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