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 인물] 이준원 공주시장의 이소성대(以小成大)

   
이준원 공주시장
이소성대(以小成大). 문자 그대로 풀어보면 작은 것으로써 큰 것을 이룬다는 뜻이다. 언 듯 보면 그리 어렵지 않는 문구다. 하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의미는 달라진다. 원불교 창교정신 중 하나로 서두르지 말고 차곡차곡 쌓아 큰 뜻을 이루자는 의미다. 또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면 큰 것이 이뤄진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소(小)에서 대(大)로 가라는 미래지향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허영심에 끌리지 말고 차근차근 살아가라는 금욕의 정신까지 가미되어 있는 경구(警句)다.

갑자기 왠 사자성어를 들먹이나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독자들이 계실지 모르겠다. 웬만한 사람들은 집안이나 사무실에 자신이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경구 하나 정도는 걸어놓고 마음을 다스리며 살아가려고 한다. 설령 그 의미에 맞게 살아가기는 어렵더라도 삶의 지향점으로 삼아 자신을 되돌아보며 산다. 그렇다면 그 경구는 한 개인의 인생 철학을 집약해 놓은 것으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전국 최연소 지방자치단체장, 그에 걸맞게 톡톡 튀는 아이디어 행정으로 침체됐던 공주에 새바람을 불어넣고 있는 이준원(李畯遠) 공주시장. 그의 인생 철학을 한마디로 집약해놨다고 봐도 좋을 말이 바로 `이소성대`다. 이 시장이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가는 `이소성대`는 아버지가 유언으로 남겨주신 말씀이다. 그가 주저하지 않고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는 아버지가 남겨준 말씀이니 남다를 수 밖에 없다.

이 시장은 아버지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숙연해지는 모습니다. 항상 아버지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을 갖고 살아간다고 말한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의지하고픈 분이 아버지인데 하늘나라에 계시니 아쉬움이 적지 않은 모양이다. 인간 이준원에게 아버지는 어떤 분이기에 아직도 삶의 한복판에 서 계신 것일까?

아버지가 유언으로 물려주신 `以小成大`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려면 이 시장이 자란 가정 환경부터 알아보아야 할 것 같다. 이준원은 1965년 충남 공주시 유구읍 석남리에서 아버지 이충복(2003년 작고)과 어머니 정홍모(77) 사이 2남3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내리 누나 셋에 장남이자 6대 종손이라는 귀한 몸으로 세상에 나온 것이다. 할아버지는 서당의 훈장을 지낸 분으로 철저한 유교가풍의 집안이었다.
   
작고하신 조모 및 부친과 다복했던 시절의 한 때, (뒷줄-소파) 큰딸 이세준, 막내딸 이현준, 모친 정홍모 씨, (앞줄) 부친 (故)이충복 씨, 조모 (故)조 랑 씨, 이준원 시장, 부인 왕은성 씨, 아들 이홍준.

 “아버지는 제가 어려서부터 항상 두 가지를 강조하셨습니다. `너는 목은(牧隱 이색) 자손이라는 점과 가난은 죄가 아니다` 라는 점이었죠. 한마디로 양반 가문의 자부심을 갖고 청렴하게 살아가라는 말씀을 귀에 박히도록 듣고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유구면장 사곡면장 등 면장을 12년 하시는 등 공무원 생활을 하고 계셨다. 청렴하기로는 주변에 소문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아버지가 공직자로서 청렴을 강조하신 것은 할아버지의 철저한 교육 때문이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공무원으로 출퇴근을 하실 때 호주머니 검사를 하셨다고 해요. 출근할 때 얼마를 갖고 나갔는데 퇴근할 때 얼마나 남았나를 검사한 거죠. 절약교육을 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얼마를 가지고 나갔는데 한 푼도 쓰지 않고 퇴근했다면 밥이나 향응을 받은 것으로 보고 호통을 치셨다고 해요. 그만큼 공직자로서 청렴생활을 강조하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시장은 “지난 2002년 처음으로 공주시장에 출마하려고 할 때 아버지께서 `청렴에 자신이 없으면 시작(출마)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고 말한다. 그만큼 공직자 가정에서 청렴을 철칙으로 믿고 자라났다고 볼 수 있다.

   
100일때 모습과 어릴적 친구들과의 사진.

 청렴을 강조하는 집안에서 자랐으니 경제적으로 넉넉할리 없었다. 이준원은 어렸을 당시, 조부모와 부모 시집안간 고모와 5명의 형제자매 등 열 명에 달하는 대가족이 함께 살았다. 대가족이 공무원인 아버지의 쥐꼬리 만 한 월급에 매달려 살아야 했으니 생활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청백리 부인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법. 어머니는 돼지와 닭도 키우고 텃밭도 가꾸고 가족들의 먹거리를 챙기느라 고생이 많았다. 장독이 텅텅비고 학자금이 떨어지면 이웃집에 돈을 꾸러다니기 일쑤였다.

청렴 강조하는 공직자 집안의 장손

이런 어려운 가정 상황이었음에도 이 시장의 공식 약력은 순탄하기 그지 없다. 유구 초 중학교와 공주사대부속고, 고려대학교 행정학과,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정책학 전공) 석사와 행정학 박사, 그리고 교수와 공주시장에 이르기까지... 순탄하다 못해 화려하기까지 하다. 혹시 목은 자손가의 6대 종손이었기에 특별히 애지중지 커온 것은 아닐까?

   
유구중학교 시절의 이준원 공주시장.

 “초 중등학교와 고등학교 때 까지는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어려움 없이 자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학에 들어가면서 부터 고생 많이 했습니다. 실패와 좌절도 겪었고요”

이준원이 대학에 입학할 당시, 아버지는 면장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전두환 정권 시절 별정직 면장들을 강제적으로 퇴직시키는 조치를 단행한 것이다. 가장이 실직상황에서 둘째누이가 혼인을 앞두고 있었고, 셋째 누이는 대학에, 동생은 고입 준비 등 겹겹이 집안대소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집안에 손을 벌릴 계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5공 시절 과외금지조치까지 내려졌으니 설상가상이었다.

“지금 얘기하면 자랑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참으로 앞길이 막막했습니다. 그렇지만 아플수록 성숙해진다는 말이 적절한 것 같습니다. 불법으로 몰래 가정교사와 과외도 해가며 돈을 벌어 생활비를 마련해야 했습니다. 생활은 독서실, 친척집 등을 전전해야 했고요. 아마도 대학 4년동안 10차례 이상 이사했을 겁니다.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았는데, 이는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대학을 졸업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죠. 덕분에 대학성적은 좋아 차석으로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어려운 대학생활을 꾸려나가면서도 장남으로서 집안 살림을 챙겨야 한다는 부담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빨리 졸업하고 취직을 해서 경제적으로 보탬을 줘야 한다는 조급함이 앞섰다. 그래서 재학시절부터 행정고시를 준비했다. 그렇지만 앞서 설명한대로 독서실, 친척집을 전전하는 고달픈 대학생활 속에 시험공부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3번에 걸친 낙방... 인생에서 처음으로 쓰라린 실패를 맛보게 된 것이다.

   
공주사대부고와 대학과 서울대 대학원 시절 친구들과...

이준원은 차선책으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대기업에 응시를 했다. 당시는 취직이 어려운 시절은 아니었고 명문대 출신으로 쉽게 합격할 수 있었다. 아버지께 합격사실을 말씀드리고 직장생활을 시작하려고 할 무렵, 아버지는 아쉬움을 보이셨다. 어려운 가정상황으로 인한 부담으로 아들이 제 뜻을 펼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하신 아버지가 공부를 더 하는 것이 어떠냐며 대학원 진학을 권유하신 것.

결국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서울대 행정대학원에 진학해 석사(정책학)학위를 취득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아버지에게 부담을 드린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입사한 곳이 증권회사다. 사실상 첫 직장이다.

“3개월 정도 근무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여기가 나의 평생직장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내 적성은 돈 버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는 회의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내친김에 박사학위까지 취득해 교수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증권회사를 때려치우고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89년에 시작해 96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니 7년에 걸친 공부기간이었다. 물론 중간에 군복무(18개월 보충역)기간이 포함됐으니 실질적으론 5년여의 기간이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는데 건양대에서 교수로 채용하겠다는 제의가 왔다. 96년 3월에 교수가 됐고 8월에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1년여의 건양대 생활을 거쳐 고향인 공주대 행정학과 교수로 재직하게 된다.

어려운 대학생활...행정고시 낙방 좌절도

   
2006년 국민중심당 후보로 공주시장에 출마한 이준원 시장.

교수 이준원은 나름대로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쳤다. 그러나 현실에 안주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론적으로 학생을 가르치고는 있지만 현실문제 해결이 안되는 것을 보고 답답함을 느끼곤 했다. 고향 공주를 위해 무엇인가 나서야 한다는 소명감 같은 것도생겼다.

“저는 정치적인 야심 같은 것은 없습니다. 32세에 교수가 됐고 편안한 삶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명예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현실이 답답했습니다. 이론공부 10년에 교수 생활 10년을 해왔지만 현실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공허함을 느끼게 됐습니다. 이제 고향 공주 시민들이 사람을 보고 평가할 때가 됐다고 판단해 자발적으로 나서게 됐습니다.”

이준원은 2002년 처음으로 공주시장에 도전했다. 경선을 통해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한 것이다. 결과는 낙선... 그렇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37세의 젊은 나이였던 만큼 좋은 경험으로 생각했다. 더 노력하라는 아버지의 계시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4년 후, 국민중심당 후보로 공주시장에 출마해 당선됐다. 재수 끝에 당선의 기쁨을 맛본 것이다. 그동안 익히고 가르치던 이론을 바탕으로 지역을 위해 뭔가를 실현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찼다. 일할 수 있는 자유를 찾은 것 같았다.

“교수님들이 들으면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르지만, 교수 하면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고 경제적으로도 별로 부족함이 없습니다. 교수할 때는 온갖 자유를 다 누렸는데 뭔가 실현할 수 있는 자유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시장이 되고나니 바쁘고 주민들 눈치를 봐야 하고 온갖 자유를 박탈당했는데, 현실을 구체화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느낌이었습니다.”

편한 교수직 마다하고 바쁜 시장 선택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공주시장 이준원은 취임직후부터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고향 공주를 살리기 위한 일이다. 전국 최연소 자치단체장의 톡톡 튀는 아이디어와 교수출신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 각종 시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 시장이 추진하는 사업들은 그동안 다른 지자체에선 생각조차 못했던 것들이 대부분이다. `사이버 공주시민제`와 `5도2촌 주말도시 사업` 등 침체된 공주를 살리기 위한 사업과, `농번기 들판민원 배달서비스`와 `농기계수리 119출동 서비스` 등 친 주민적인 시책들로 나눠볼 수 있다. 고향 공주에 활기를 불어넣고 주민들이 실질적으로 편의를 느낄 수 있는 아이디어 상품들이다.

   
공주특산품 알밤 홍보에 나선 이준원 공주시장.

그 중에서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업이 5도 2촌 프로젝트와 연계한 사이버 공주시민제도다. 5도 2촌 프로젝트는 말 그대로 5일은 도시에서 2일은 공주에서 머물 수 있도록 하는 사업이다. 공주시 28개 마을별로 산수박 축제, 물고기 잡기, 뗏목 체험 등 농촌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이 사업이 인기를 끌자 아예 공주시민으로 만들자는 취지로 나온 게 사이버 공주시민제도이다.

공주시는 한 때 인구 20만명을 웃도는 중부권 대표적 교육 문화도시였다. 그러나 농촌도시 대부분이 그렇듯 청장년층이 도시로 빠져나가면서 수년째 13만명을 밑돌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역경제도 활기를 잃고 있는 것은 뻔한 일. 이를 타개하기 위해 이 시장이 들고 나온 카드가 주말에 도시민을 끌어들여 각종 혜택을 주고 공주에도 활기를 불어넣기 위한 사이버 시민제도다.

사이버 공주시민이 되는 방법은 간단하다. 주민등록상의 주소 이전 없이 온라인 회원 가입만으로 손쉽게 공주시민이 될 수 있다. 사이버 시민에게는 공산성-무령왕릉 등 문화재관람료를 면제하고 지역 농특산물 구매와 음식 숙박시설 이용시 최대 30%까지 면제해 주는 등 다양한 혜택을 주고 있다. 사이버 공주 시민증도 발급해 주고 e메일과 휴대폰 문자서비스를 통해 공주시의 축제와 문화행사 등 정보도 실시간으로 제공하는 등 소속감도 높였다.

   
영농현장의 주민들의 고층을 듣는 이준원 공주시장.

 이 때문에 시행한지 1년도 안돼 20만명에 육박하는 사이버 공주시민이 생겼다. 현재 실제 인구 13만 명 보다 많은 시민이 생겨난 것이다. 이에 따른 효과도 적지 않다. 지난 1년간 사이버 시민들의 농촌마을체험과 농산물 구입 등으로 70억원의 경제효과를 보았다. 경제적인 면 이외에도 사이버 시민들이 외지에서 하고 있는 유무형의 홍보활동 등은 돈으로 환산하기 힘들다.

이런 성과로 인해 사이버 시민제도는 올해 전국 기초자치단체장 매니페스토 우수사례 경진대회에서 창의적 행정분야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도시민들에게도 전원생활의 갈증을 풀어주고 공주에는 관광과 체험산업을 통한 경제 활성화를 꾀하는 이른바 윈윈(win-win) 사업의 모델로 꼽힌 것이다.

“공주시의 현재 인구는 13만명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공주출신이나 연고가 있는 사람이 60만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주민등록을 옮기는 번거로움을 없애고 사이버 상으로 시민이라는 끈을 만들어줘 서로 소통할 수 있게 함으로써 서로 이익을 보자는 사업입니다”

이 시장은 대규모 숙박촌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또 마을마다 회관을 콘도식으로 만들어 평일에는 노인들의 휴식처로 이용하고 주말에는 콘도로 운영해 소득을 높일 계획이다. 특히 요즘 도시민들이 선호하고 있는 황토방식의 임대 별장도 만들어 사이버 시민들에게 임대해주는 등 다양한 주민 소득사업을 추진해나가고 있다.

   

이밖에도 이 시장이 추진하는 지역현안 사업들은 다양하다. 15년간 방치해놨던 버스터미널을 정상화시켜놨고 추모공원도 조성하고 있다. 또 금강의 물 부족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하상보호공사업도 마무리했다. 교수하면서 느꼈던 공허함에서 벗어나 각종 지역현안들을 해결해가면서 일하는 성취감을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일로써 평가를 받기를 원하는 시장을 둔 공주시 공무원들은 바짝 긴장하는 분위기다. 이른바 복지부동은 용납되지 않는다. 이 시장의 취임 일성은 “일을 잘하려다 징계받는 공무원은 징계를 훈장으로 여기겠다”였다. `물동이를 많이 이는 며느리가 물동이도 많이 깨친다`며 주민들을 위해 일을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화합도 중요시한다. 그동안 공주가 선거와 관련한 각종 비리로 인해 불협화음을 일으킨 사실을 직시하며 공무원간, 시민들간 화합을 꾀하고 있다. 지난 선거 이후 인사나 사업 등에서 정치적 논공행상을 철저히 배제했다. 전통있는 교육 문화도시 공주의 자존심을 찾기 위한 노력이다.

사이버 시민제 매니페스토 전국 최우수상 수상

이 시장은 요즘 일하는 기쁨에 푹 빠져있다. 이같이 마음놓고 일할 수 있게 만든 든든한 후원자가 바로 아내 왕은성씨(43)다. 이 시장이 공부하든, 후학을 가르치든, 선거에 나서든, 믿어주고 묵묵히 뒷바라지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준원이 아내를 만난 건 군 복무 중이었다. 고향에서 보충역으로 복무하는데 후배가 제약회사를 다니던 약사 왕양을 소개시켜주었다.

   
이준원 시장이 마음놓고 일할 수 있게 만든 든든한 후원자가 바로 아내 왕은성씨(43)이다.

“아내를 소개받고 성이 왕씨라는 사실에 중국 성씨인줄 알고 틀렸다고 봤죠. 한산 이씨 종손으로 중국 성씨는 어렵다고 본 거죠. 그런데 개성 왕씨라는 거예요. 다행이다 생각하고 사귀게 됐는데 잘나가는 약사가 군인신분인 종손을 이해해줄까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프러포즈를 했죠. 우리 선조인 목은 할아버지는 고려(왕씨)를 위해 절개를 지켰으니 이제 왕씨가 이씨에게 봉사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요...已往之事를 李王之事로 바꿔 프러포즈한 셈이죠.”(웃음)

이 시장은 현재 어머니를 모시고 아내와 1남2녀를 두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나가고 있다. 할머니까지 모시고 4대가 함께 살았지만 할머니는 재작년 100세를 일기로 작고하셨다. 시장에 당선되고 나서 아내는 운영하던 약국을 중단하고 다른 사람이 운영하는 약국에서 파트타임으로 근무하고 있다. 시장 부인이 약국을 직접 운영하면 주변에 이런저런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준원 시장에게 가족은 가장 소중한 후원자들이다.

그는 시장으로서 평가는 시민들이 알아줄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가정에서 남편, 아버지로서의 평가는 낙제점이라고 자인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휴일도 없이 일에 파묻혀 생활해야 하고 경제적으로도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려나가면서 월급타서 집에 가져가본 적이 없단다. 아내에게 통장을 주려고 해도 적자투성이 통장을 받으려하지도 않는단다. 그러면서도 시어머니를 모시고(2년 전까지 시조모님까지 모시고) 아이들을 밝게 키워주는 아내가 고맙기만 하다.

“아이들은 선거판에 내보내지 말자고 하면서도 자신은 남편을 대신해 선거판에서 뛰어주고... 게다가 한 여자의 남편이면서 시민의 연인이 돼야하는 현실을 이해해 주는 집사람에게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저는 다시 태어나도 집사람과 결혼하겠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데, 아마도 집사람은 그렇지 않을 겁니다.”(웃음)

“다시 태어나도 집사람과 결혼하겠다”

그는 요즘 가정보다는 고향 공주의 발전을 위해 뭔가 현실로 보여주는 재미에 심취해 있다. 자신의 아이디어로 추진한 사업에 대해 시민들이 호응해주고 전국적인 평가를 받을 때 성취감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다.

이 시장에게 앞으로 국회 쪽으로 진출해 본격적인 정치를 해볼 용의가 없느냐고 의중을 떠봤다. 답변은 “아직은...”이다. 그러면서 “시장은 한 번 더 해보고 싶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라고 털어놨다. 지난 3년간 펼쳐놓은 일들을 마무리하고 싶단다. 그 이후에 더 큰 쓰임새가 있다고 평가를 해준다면 그 때가서 생각해도 늦지 않다는 설명이다.

거창한 것 보다는 작은 것부터 차근차근 실현해 나가겠다는 말이다. 이소성대의 자세다. 아버지가 유언으로 남겨주신 말씀을 마음깊이 간직하며 살아가려는 모습이 엿보인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아버님!
저도 아버님처럼 아이들에게 떳떳하고 존경받는 아빠로 남고 싶습니다. 아버님께서 제게 보여주신 대로 저도 대학교수로 편안한 삶에 안주하지 않겠습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지역발전을 위해 앞장서고 행동으로 보여주겠습니다.“

이준원이 지난 2006년 3월 11일 아버지 제삿날을 맞아 아버지에게 올린 편지내용의 일부이다. 공주시장에 출마하기에 앞서 아버지에게 이를 고하고 앞으로의 각오를 다지는 내용이다.

그는 지금 아버지에게 다짐했던 대로 고향 공주를 위해 열심히 뛰고 있다. 열심히 뛰고 있는 만큼 상당부분 성과도 인정을 받고 있다. 앞으로 무슨 아이디어 행정상품을 가지고 시민들에게 어필할지 관심거리다. 이론과 현실과의 적절한 조화 속에 고향 공주를 위한 열정에 불타고 있는 그가 차세대 리더로 어떤 청사진을 펼쳐나갈지 기대된다.

이준원 공주시장 손전화: 010-5457-8681

내가 본 이준원 市長 (농협중앙회 공주시지부장 김영만)

 

   
농협중앙회 공주시지부장 김영만.

이준원 시장. 그에게선 사람냄새가 난다. 사람냄새 중에서도 아주 때묻지 않은 들꽃냄새가 난다. 또한 작은 체구에서 어쩌면 그리 깡다구 근성이 있는지 자주 놀란다. 오랜시간 대학교수를 하였다고는 하지만 참 아는게 많다. 역사와 문화는 말 할 것도 없고 풍수에까지 도통한 사람 같다. 수맥의 흐름과 바람의 흐름을 정확하게 맞춘다.

그는 효자다. 100세 된 조모를 모셨었고 지금도 어머니를 모신다. 금강둔치에서 어머니를 자전거에 태우고 다니기도 한다. 아마 시장선거 하면서 어머니 마음을 새까맣게 태웠던 미안함을 알기는 아는가 보다.

가끔 행사장에 나오셔서 시장아들을 보며 박수 치시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 아마 이시장의 배포와 깡다구는 이 어머니의 기도에서 나오나 보다. 본인은 염치없이 시장 관사에서 몇번 밥을 먹은적이 있다. 느닷없이 들렸는데 진수성찬을 이 어머니께서 차려 주셨다. 오랜 종가집이라서 접빈객을 당연시하는 가풍임을 느꼈다.

이시장보고 쌀집 아저씨 같다고 하는데, 쌀집 주인보다는 쌀 배달하는 심부름꾼이 더 적당한 표현이다. 언젠가 어려운 가정에 연탄을 배달하며 웃는 모습이 신문에 나왔는데 딱 어울린다. 그는 그만큼 서민냄새가 난다.

그는 참 가난하게 살았다. 그러나 마음은 따뜻하다. 대학 다닐때 열번이상을 이사 다니면서 학비와 용돈을 조달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신세지거나 어려운 사람에게는 호주머니를 몽땅 털어서 주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부자라는 생각을 한다.

초등학생과 어울리면 초등학생 같고 대학생과 어울리면 대학 동아리 친구같이 살갑다. 또한 마을 노인회관에 노인들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면 그 눈높이에 딱 맞추는 대화를 한다. 그런 재치와 해학이 참 대단하고 부럽기도 하다. 저 깊은 내공이 어디서 나오는지 물어 볼 수도 없고 여튼 놀랄뿐이다.

요즘 우리 공주시의 품격이 많이 높아진 것 같다. 용이 휘어 감고있는 공산성의 야경과 정안생태하천 그리고 둔치의 데크길......모두 이시장의 아이디어다. 5도 2촌과 20만 사이버시민 정말 공주가 많이 발전하고 있다. 5도 2촌 시범마을에 가면 농촌주민이 생기가 돈다. 이런 특수시책을 펼치고 있는 이 시장에게 그의 농촌사랑에 박수를 보낸다.

언젠가 대화 중에 시장은 '가마 타는 즐거움만 알고 가마메는 사람의 아픈어깨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는 이야기를 하던데 그는 정말 가마메는 서민의 아픔을 아는 목민관이라 생각한다.

늦은시간 오늘도 시장관사에서 줄담배를 태우면서 공주시의 품격을 높이는 생각에 잠 못자고 있을게 분명하다. 내일은 그가 즐겨가는 칼국수 집에 가자고 전화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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