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인물]정용기 대덕구청장..."구민들에게 감사하죠"

   
정용기 청장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정치로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꿈을 꾸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정치를 하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아주 내성적이었던 어린 학생이 정치로 사회를 바로 잡아보려고 뜻을 일찍이 세웠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결정적일 때에 누구를 만나느냐가 운명을 바꾸는 것 같아요.”

정용기 대덕구청장.
1962년 생이니까 우리나이로 48살이다. 이제 그에게 직업이 된 정치에 대한 꿈은 13살이 되던 해, 초등학교 졸업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선두를 달렸던 그가 보았던 작은 부조리, 즉 교육감상 수상자 선정을 둘러싼 불합리함이 정치를 꿈으로 만들었고 48년 동안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게 만들었다. 그의 인생에 교육감상은 운명을 바꾸는 분수령이 되었다.

사실 졸업식에서 수상자 선정은 실적과는 무관하게 결정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전교 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학생을 제쳐놓고 성적우수상이 그저 그런 성적을 낸 학생에게 돌아가기도 하고 반장으로 줄곧 봉사해왔던 학생에게 그 흔한 학교장상도 주지 않는 예도 있다. 말로는 육성회 기여를 내세우지만 이면에는 학부모와 교사 간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으리라는 짐작은 간다. 어린 정용기는 그 보이지 않아야 할 손을 본 것이다. 그게 정치로 이어진 셈이다.

정청장과의 인연은 6년 전으로 거슬러 가야한다.
당시 한나라당 충남도지부 사무부처장이었던 이정희의원(현, 대전시의원)이 괜찮은 후배가 있다며 소개를 해주었다. 정청장은 이의원 남동생과 친구였고 이의원은 필자에겐 언론계 선배였다. 지금은 교회가 된 신신농장 식당에서 한차례 만났다. 6년 전이니까 마흔 두 살. 패기와 용기, 그리고 정치적인 야망이 꿈틀거리는 그런 정치신인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한나라당 대덕구 국회의원 출마 후보자 자격이었다.

   
현장을 찾아 설명을 듣는 정용기 청장.

그로부터 약 한달 후 디트뉴스24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했다. 그 때 정청장은 “법과 원칙의 싱싱정치로 승부를 걸겠다”는 표현을 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회창 현 자유선진당 총재와의 인연을 길게 설명했었고 기성세대와는 차별화된 정치로 새바람을 불어넣겠다는 의지를 그 때 강조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키운 ‘정치인의 꿈’

대담을 하기위해 지난 달 20일 대덕구청장실을 찾았다. 꼭 6년만이다. 세월이 패기보다는 원숙함을 가져다주었지만 자신감과 확신은 여전했다. 그게 그렇다. 조금만 지나치면 오만과 독선으로 비쳐진다. 더구나 정청장처럼 늘 선두권에 섰던 사람은 뒤쳐진 자의 어려움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 이런 저런 생각을 가지고 정청장과 마주 앉았다.

워밍 업용 질문은 민선 4기 사업 실적이었다. 임기 막바지라서 그런 지 가능하면 실적을 정확하게 많이 알리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었을까. 긴 내용을 짧게 요약했다.

“송촌동 도서관과 체육공원, 그리고 신탄진 실내 수영장 등 해를 넘긴 숙원사업을 다 해결했습니다. 또, 신탄진 금강 변에 로하스 공원이 생겨나고 정부의 4대강 살리기 프로젝트와 무관하게 금강 변을 정비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는 특히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 건 교육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평생 학습도시사업에 역점을 두고 있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꾸준히 진행해야 하며 그것이 결국은 공동체 전체를 변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도 그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지난 해에는 전국 최우수 평생 학습도시라는 타이틀도 가져왔다.
   
대담이 있는 날, 정청장은 휴가 직후여서 책상에 업무보고용 서류가 잔뜩 쌓여있었다.

“명칭을 ‘배달 강좌제’라고 했어요. 5명 이상 주민이 모여 주문만하면 학습이 자장면처럼 배달된다는 게 주요 내용입니다. 다른 구에서도 주민들이 문의가 오고...중국집에서 항의가 왔어요. 배달된다고 하니 그 내용을 모르고 구청에서 자장면 배달까지 하면 우리는 뭘 먹고 사느냐고요. 하하하.”

정청장은 계속해서 주민 위주의 행정이라든가 공무원 마인드 변화를 위한 각종 시도, 참여 자치 메카 정책, 내부 혁신에 필요한 경영 마인드 도입 등을 부연했다. 그의 말은 “내 사업이고 내 일이면 공직자들이 지금처럼 하지 않는다”는 게 요지였다. 결국 공직자들이 주인의식이 없고 서비스 정신이 부족해 지속적이 학습을 통해 주민도 변해야 하고 공직자들도 먼저 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3년간 업적, 구정에 관심이 있으면 좋은 점수 줄 것”

그래서 물어 보았다. 스스로 사업을 어떻게 평가하느냐고...대답이 조금은 그랬다.

“법적으로 도저히 안 되는 부분은 빼고 거의 다 해결했다고 봅니다. 오히려 당초 구민들에게 약속하지 않았던 사업까지 국토관리청장과 국토해양위 소속 이재선 의원이 도와줘 마무리 짓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평가에 대해 주민들이 10%로도 달성하지 못했다고 댓글을 달 수도 있다는 농담에 그는 “대덕구민들 중 구정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그런 얘기를 할 분은 없다”고 단언했다. 그만큼 구정과 업적에 자신이 있다는 말로 들렸다.

정청장 인터뷰에서 빠질 수 없는 게 있다. 바로 박성효 대전시장과 치열한 논리 공방을 벌인 ‘대덕구 소외론’이었다. 이는 지방행정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광역시장과 구청장의 관계 재정립이었다. 상하관계에서 기능과 역할을 나누는 그러한 의미를 만든 항의(?)였다. 이에 대한 정청장의 입장은 분명했다.

“제가 오기 전 5년간 대덕구에 쏟아 부은 대전시의 지방재정은 1.9%였습니다. 유성구의 17분의 1이었죠. 그 부분에 문제를 제기했죠. 시장님하고 불편한 관계보다 객관적인 데이터를 통해 얘기를 하니까 시장님께서도 인정을 했습니다. 민선 4기 때는 어느 시장님보다 대덕구에 많은 투자를 해서 지금은 약 6%로 늘어났습니다. 고맙게 생각합니다.”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와 함께 행사를 참석하고 있다.



정청장은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와는 각별한 인연이 있다. 이총재가 신임을 했었고 부인 한인옥 여사는 대선 때 전담해서 모시기도 했다. 2003년 인터뷰 때도 그 인연을 강조했었다. 보좌관 생활과 이 총재의 정치 철학인 ‘법과 원칙’,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등의 단어를 사용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만약 이총재 측에서 자유선진당으로 오라고 하면 어떡하겠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 시스템이 운용되기 위해서는 법치, 의회주의와 책임정치가 필요합니다. 한 당이 일정기간 유권자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책임을 지고 운영을 하고 잘못하면 물러나는 게 책임정치라고 봅니다. 그런데 정치인들이 당을 자주 바꾸면 책임정치는 실종되는 거죠. 정당정치가 뿌리를 내려야 자유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을 할 수 있죠. 정당정치의 근본을 흔드는 당적 이적은 반드시 퇴출되어야 합니다. 대전에는 너무 일상화되어 있는 게 문제죠.”

“당적 이적은 책임정치 퇴보시키는 일, 반드시 퇴출해야”

갈 수도 없고, 가도 안 되고, 갈 마음도 없다는 얘기다. 다만 이 총재에 대해서는 2006년 지방 선거 당시 대전에 내려와서 선거 사무실도 들러 각별한 정을 주어 지금도 감사히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청장은 디트뉴스24에서 차세대 인물로 선정한 것과 관련, “감사드린다”는 말과 함께 “정의가 지배하는 몫을 좀 넓히고 싶은 생각 때문에 정치를 하려고 결심했다”며 “마음을 비우고 제가 생각하는 옳은 것을 구현하는데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인터뷰가 약 30분을 넘어갔다. 그는 줄 담배였다. 연신 가느다란 ‘에세’에 불을 댕기고서는 길게 빨아들였다. “담배 좀 끊을 수 없느냐”는 말에 “그게 잘 안 되네요”로 대꾸했다. 그렇지만 애연가 수준을 넘어선 듯했다. 인터뷰 전 일주일동안 휴가를 다녀온 탓에 책상에는 ‘청장님 부재 시 업무보고’가 두툼하게 쌓여있었다. 더난 출판사에서 발간한 ‘변경’과 위즈덤 하우스의 ‘배려’가 최근에 읽은 듯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그는 옥천 청성면 도장리, 즉 마장동네 출신이다. 두 살 때 철도공무원인 부친을 따라 대전으로 나왔으니 고향만 거기일 뿐 실제로는 대전 사람이다. 지금이야 국가 재정이 튼튼해져 공무원이 최고의 인기직업이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박봉’과 ‘가난’, ‘청렴’, ‘사명감’ 등이 상징이었다.

   
세족식. 발을 닦아주는 마음으로 구민들을 대하면 안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어릴 적 기억은 ‘어머니의 한숨’이었다. 월급날 5남매를 둔 어머니로서는 절규에 가까운 한숨이었다. 그게 운명이라 생각했고 모두가 겪는 가난이어서 참고 넘어갈 수 있었다. 방학 때가 되면 입 하나라도 줄이려고 시골 할머니 집으로 가서 담배 농사도 거들고 고구마 캐는 일을 도와드리면서 가난을 피해왔다. 그게 당시 보통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했다.

1969년도 대전 신흥초등학교에 들어갔다. 공부는 잘했지만 내성적이고 약하디 약한 학생이었다. 운동장 두 바퀴를 돌면 화장실에 가서 토할 정도로 몸이 약했다. 지금처럼 당당한 체격에 정치인으로 성장할 줄은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불의에 대해서는 아주 강했던 모양이다. 정치의 꿈을 가꾼 것도 그랬고 수상자 선정의 잘못을 당당하게 따진 걸 보면 정치인의 기질을 타고난 듯 하다.

공부는 잘했지만 내성적이고 여린 학생

치맛 바람이 성적을 조작하고 수상자를 뒤바꾸는 세상은 과거도 그랬고 현재도 옳지 못하다. 그 즈음 아버지가 어려운 집안 형편에도 불구하고 세계위인전집 60권을 사주었다. 가난에도 자식 교육이 우선했던 모양이다. 그걸 밤새도록 읽고 그는 고민을 했다.

“내가 무엇을 해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충남 중에 수석으로 합격을 했다. 하지만 위인전이 또 문제였다. 거기에 위대한 정치인은 한결같이 웅변가였고 달변가였다. 지금처럼 내성적인 성격을 개조하지 않으면 정치의 꿈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다. 논다는 애들과 놀아야 말을 잘 할 것 같았다. 매점에서 들치기 담배로 그들에게 같은 패밀리라는 걸 보여주었다. 윗 단추 두 개를 풀어 헤치며 불량스런 행동도 자연스럽게 했다.

   
경찰대 퇴교 조치 이후 입대한 군대는 정말 암울한 시기였다.



댓가는 혹독했다. 전교 1등이 500명중 150등으로 밀려났다. 그 때 한해 10명 정도 대전고에 들어갈 수 있었다. 대전고 입학이 인생의 종점은 아니지만 수석입학생에게는 당연히 가야하는 곳이었다. 그 실력으로는 아예 근처도 가지 못했다. 기업이나 인생이나 늘 계산대로 움직이는 건 아니다. 항상 예기치 않는 곳에서 변수가 생긴다. 그게 긍정적이면 더 없이 좋다.

“3학년 때 허정 선생님이 담임이셨는데 어느 날 저를 부르더니 ‘너는 수석으로 들어왔고 IQ도 제일 좋은데 대전고에 안 들어갈래?’라고 물으셨다. ‘들어가고 싶습니다’라고 답하니 ‘그럼 우리 집에 와서 합숙하라’고 하셨다. 성적이 좋은 5명과 함께 합숙을 하는 데 저에게는 돈을 받지 않았습니다. 너무 고마웠죠”

인생을 살다보면 중요한 시기에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정청장은 지금도 허정 선생님을 만난 걸 ‘운명을 바꾸는 계기’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동료들을 놀래게 만들면서 대전고에 거뜬히 합격했다. 거기서 다시 방황은 돌림병이 되었다. 공부보다는 남독(濫讀)에 가까울만큼 책을 즐겼고 고교생에 걸맞지 않게 통일문제가 그에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육군사관학교, 그리고 정치인 도식을 그려보기도 했지만 군부 독재를 감수성이 예민한 눈으로 지켜본 그에게는 바람직한 진로가 아니었다. 마침 그 때 경찰대가 설립됐다. 30대에 경찰서장?..., 그게 돈 없고 꿈 많은 소년에겐 달콤했다. 경찰대 1기로 들어갔다.

   
경찰대학 재학 시절.



졸업 1년 앞두고 경찰대 퇴교, 그리고 입대

거기서도 항상 선두권을 유지했다. 3학년 말이었던가. 토론 써클을 이끌던 정청장에게 이번에는 부정적인 돌발변수가 발생했다. 학내 민주화를 외치며 그 써클 멤버들이 주동이 되어 데모를 했다. 가까스로 진정은 됐지만 2명이 퇴교를 당했다. 다행히 정청장은 살아남았다. 하지만 요주의 인물이었다. 실제로 배후는 정청장이라는 게 당국의 입장이었던 모양이다. 겨울 방학 때 동학사에서 MT 중 경찰이 덮쳐 불온서적(?)을 증거물로 압수해갔다. 그 때 젊은 이들이 흔히 읽을 수 있는 책이었지만 정해진 틀 속에 가두려는 당국에게 많았던 우파 쪽 서적은 보이지 않았다. 결과는 퇴교조치였다. 졸업 1년을 앞 둔 시점이었다.

“바로 입영 영장이 날아옵디다. 온양 역에서 아버지께 입대 인사를 큰 절로 드리니까 외면해버리시더라고요. 나중에 어머니한테 들으니까 ‘어쩌다가 우리 집안에 빨갱이 새끼가 나왔냐’고 하더군요. 마음 고생이 심했죠. 철책선에 근무하면서 3년 내내 면회, 외출, 외박 없이 군대생활을 했습니다.”

25살에 예비역이 되었다. 진로에 고민이 많았다. 안요한 목사의 ‘낮은대로 임하소서’를 읽고 신부가 되려고도 했다. 아무리 집안이 어렵더라도 ‘궁즉통’(窮則通)이라 하지 않았던가. 대학을 가자. 한남대 도서관에서 1년간 열심히 공부를 했다. 26살에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합격을 했다. 그리고 대학 졸업과 함께 민자당 공채 1기 수석으로 정치에 입문을 했다. 1991년도 말즈음 일이다. 거기서 그는 충정회를 만든었다. 충청도 출신 정치인 모임이다.

“영남 정권이라 그 쪽 선배들과 많이 어울렸는데 저를 잘 봤던 가 봐요. 수석합격하고 대전에서 썩고(?) 있는 걸 보고 ‘용기를 서울로 올리자’하고 결정을 하더군요. 그 때는 그게 법이었으니까 바로 서울로 갔죠. 정치권에서는 경상도 말이 표준말일 정도로 그 쪽 사람들 일색이었죠. 그래서 충청도도 뭉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이회창 총재와의 인연도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한인옥 여사를 모신 일, 이 총재와의 독대, 그리고 전 대전일보 정덕훈기자와 중도일보 박상배 기자와의 일화, 대덕구청장 출마 등에 관한 얘기를 약 20여분 간 나눴다. 이제 결혼 얘기와 대덕구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 등을 듣고 인터뷰를 마무리해야 했다.

올해 43살인 아내 장은희는 부산 학상여중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민, 그곳에서 마샬고교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했다. 이 후 다시 이화여대 교육심리학과에 학사 편입을 하면서 정청장과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35살인 1996년에 결혼했다. 그 이전까지는 후배와 연인 사이로 착각, 아예 관심을 둘 상황도 아니었다. 오히려 선배에게 ‘선남선녀’라는 용어를 써가며 잘 어울렸다는 얘기를 전할 정도였다. 

아내에게 항상 미안, 미국에서 컸지만 더 한국적 

그런데 아내가 먼저 연락을 해오면서 ‘후배와는 그저 지인 사이’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더구나 파트너로 축제 참석 요청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아내는 미국에서 자랐지만 오히려 더 한국적이다. 



“집사람은 항상 바른 생활을 합니다. 그런 면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큰 애들보다 더 한국적입니다. 미안하죠. 뭐 경제적으로도 그랬고... 안양에서 밥 집할 때 아내가 궂은 일은 다했죠.”

대학 4학년 때 마침 장모되실 분이 정청장을 보고 아주 흡족해한데다가 건강이 좋지 않아 이대 4학년 때 전격적으로 결혼을 하게 됐다.

이순신을 존경하면서 조직 내에서 인정받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배려를 하는 문화가 필요하다는 정청장은 내년 지자체장 출마 여부와 관련, “구민들 삶이 정말 어려운데 벌써부터 현직에 있는 사람이 나온다, 안 나온다고 말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며 “다만 그동안 벌여놓았던 숙원사업 중 몇몇 부분은 아직 완성되지 않아 원래 계획했던 방향으로 추진해야 되는 게 아니냐는 책임감을 갖고 있다”고 덧 붙혔다.

그는 마지막으로 대덕구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랑스럽고 존경스럽습니다. 대덕구 학풍 캠페인에 십시일반으로 동참해준 분에게 감사드리고 후세들을 위한 운동에 동참해주어서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대덕구민은 훌륭하고 희망도 보인다고...대덕구가 변하고 있고 그런 희망을 같이 키워주신 구민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연락처) 042-608-6002~5


   
[내가 본 정용기]이정희 한나라당 대전시의원 

 정용기 구청장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신언서판’(身言書判)이란 단어다. 

그의 수려한 용모에 설득력 있는 말솜씨, 그의 뛰어난 판단과 기획력 등 정치인으로 손색없는 요건을 다 갖춘 인물이라고 그를 만나본 사람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정구청장은 이러한 외적인 카리스마보다는 그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정의감과 책임감, 그리고 정직함이다. 남을 속일 줄 모르고 항상 남을 위해 배려하고 이끄는 내재된 진실 된 마음이 21세기 페러다임인 섬김의 정치에 부합되는 차세대 정치인이다. 

내가 그를 알게 된 것은 한나라당 전신인 민자당시절 사무처 당직자로서였다. 중앙당 민자1기 사무처요원 공채시험에 합격했을 때부터 막내 동생의 고등학교 동기로 경찰대를 박차고 나온 의기의 사나이로 애정과 기대가 컸었다. 

당 재직시절, 그는 뛰어난 조직력과 기획력을 인정받아 이회창 총재 최측근에 발탁되어 대통령후보 보좌역으로 신임을 받던 촉망받던 사무처 당직자였다. 그리고 그는 당내에서 타 지역에 밀려 소외되었던 대전·충남 사무처 당직자의 세를 규합 『충정회』를 조직하여 충청인의 자부심과 당내 입지강화와 권익을 위해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지금도 애향심으로 선후배사랑과 리더쉽으로 그들을 챙기고 이끌어주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다. 

나는 정치인의 최대의 덕목은 정직과 신뢰감이라 생각한다. 모든 인간관계가 그러하지만 사람에게 믿음이 깨어지면 모든 것은 사라진다. 특히 정치인의 생명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정청장은 임기 4년 중 현재까지 낙후되고 소외된 『대덕구의 소외론』을 통해 주민의 적극적인 의사표현의 대변자로서 예산, 교육, 복지, 환경 분야등에서 정책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그의 폭넓은 인맥을 통해 앞으로 정치역량을 더욱 발휘 할 것으로 본다. 

언제나 자기 신념을 버리지 않는 추진력 있는 그이기에 미래를 내다보는 큰 가슴과 안목으로 눈과 귀와 마음을 항상 열어놓고 우리 지역을 위해 든든하게 뿌리를 박고 충청을 넘어 국가를 위해 큰 역할을 하고 정치인이 되기를 기대하며, 또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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