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 인물]대전경찰청 황운하 총경

`한국 경찰의 자존심` `경찰 수사권 독립군` `꺾이지 않는 원칙주의자`, 그리고 `위험한 돈키호테`... 

   
황운하 대전경찰청 생활안전과장./사진 이재양 기자
 대한민국 경찰 `황운하 총경`을 따라다니는 별명들이다. 현재 맡고 있는 직책은 대전경찰청 생활안전과장. 하지만 과장 보다는 `총경`이라는 호칭이 더 익숙하게 다가온다. 총경으로서 그가 해온 돌출 행동들이 언론에 오르내리면서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황 총경이 차세대 인물로 선정돼, 그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봤다. 어느 사이트를 막론하고 `황운하`를 쳐보니 관련 기사들이 줄줄이 나온다. 역시 스타 경찰임을 실감케 한다.

 경찰 공무원인 그가 어떤 전력(前歷)의 인물이기에 스타로 떠오른 것일까? 언론을 통해 경찰 내부 뿐 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그의 행적을 리바이벌 하지 않고는 `황운하 스토리`를 전개할 수 없다.

사이트 마다 정보 수두룩... 스타 경찰

 황운하가 경찰 안팎에 알려지게 된 때는 10여년 전인 1999년 6월. 당시 서울 성동 경찰서 형사과장이던 그는 검찰에 파견된 소속 경찰관들에게 복귀명령을 내렸다. 경찰관이 검찰에 파견돼 수사를 보조해야 할 법적인 근거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경찰 수사권 독립을 위한 그의 첫 행보였다.

 그동안 간간이 경찰 수사권 독립 얘기가 나오긴 했지만 행동으로 개시한 건 사실상 처음이었다. 일선 경찰은 환호했다. 검찰은 당황했고 경찰 수뇌부는 검경 양쪽의 눈치를 보며 관망하고 있었다. 그의 돌발행동에 큰 관심을 보인 것은 언론. 거의 모든 언론들이 이 사건을 주요 기사로 다뤘다. 황운하가 경찰 수사권 독립군으로 데뷔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황운하는 2003년 1월, 또 다시 사건(?)을 일으킨다. 경찰대 총동문회장이던 그가 경찰대 동문회 홈페이지에 경찰 수뇌부를 맹렬히 비판하는 글을 올린 것. 경찰 수뇌부가 “수사권 독립에 소극적이며 패배주의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황 총경이 이 시점을 택해 경찰 수뇌부를 비판하며 수사권 독립을 들고 나온 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을 앞두고 경찰청이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수사권 문제를 보고 하기 직전이었기 때문. 경찰의 수사권 독립은 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다. 그런데 경찰 수뇌부가 절도와 폭력, 교통사고 등 민생범죄 수사에 국한해 검찰 지휘를 받지 않겠다는 보고서를 만들었다는 얘기가 귀에 들어왔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작전을 짠 것.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위계질서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찰조직에서 일 개 총경이 수뇌부를 향해 포격을 날렸다는 사실은 언론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경찰의 수사권 독립문제가 연일 언론에 보도되고 여론이 들끓자, 수뇌부는 방침을 바꿔 전면적인 수사권 독립 추진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노무현 정권 시절, 그는 수사권 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작업을 추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2005년 2월, 당시 허준영 경찰청장이 경찰청에 수사구조개혁팀을 신설하고 황 총경을 팀장에 임명한 것. 황 총경은 신바람이 났다. 팀원들과 매일같이 연구하고 토론하며 보고서와 보도자료 등을 작성해 언론과 국회, 학계, 법조계 인사들에게 뿌리며 수사권 독립의 당위성을 설파해 나갔다.

 황 팀장은 전국 경찰서에 검사가 직접 수사하는 사건의 피의자에 대한 호송지휘를 거부하라는 공문을 내려 보냈다. 하지만 검찰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쳤다. 강릉경찰서 한 간부 경찰이 이 공문에 의거 검찰의 피의자 호송지시를 거부했다가 불구속 기소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경찰청은 5일 만에 이 지시를 보류했다. 당시에도 언론은 황 총경이 주도하는 수사권 독립문제를 이슈로 삼았지만 그 것으로 다시 잠잠해졌다.

 그렇지만 황 총경의 독립투쟁은 끝이 아니었다. 2006년 대전 서부 경찰서장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대전지검과 끊임없는 줄다리기를 벌였다. 법의 잣대를 들이대며 피의자 인치(引致)를 공개적으로 거부했고, 피의자에 대한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 전 면담 요구를 거부하기도 했다.

 이런 와 중에 그는 급기야 검찰 수뇌부를 향해 총부리를 겨눈다. 당시 이용훈 대법원장이 사법개혁 방향을 두고 갈등을 겪던 검찰을 강도높게 비판하자, 이에 동조해 경찰 내부통신망을 통해 검찰 지휘부가 수사권 독립에 반대하고 있다며 비판을 가한 것. 검찰의 항의에 시달리던 경찰 수뇌부는 결국 황 총경을 한직으로 인사조치하는 것으로 물러섰다. 그는 수사와는 거리가 먼 경찰종합학교 총무과장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경찰 안팎의 논란 속에 한직으로 좌천된 몸이었지만 좌절할 황운하가 아니었다. 그는 2007년 5월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보복폭력 사건과 관련, 경찰청이 경찰에 대한 수사를 검찰에 의뢰하기로 하자 이택순 당시 경찰청장의 퇴진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경찰 내부 게시판에 “경찰청장은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조직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경찰 수뇌부는 중징계 방침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스타 황운하를 현직 경찰은 물론 전직까지 나서 비호하고 나섰다. 여론도 황운하 편이었다. 결국은 감봉 3개월이라는 경징계로 매듭지어졌다.

 경찰 황운하의 과거 행적은 이같이 순탄치가 않았다. 경찰 수사권 독립을 위해서라면 몸을 돌보지 않았다. 원칙과 법의 잣대를 들이대며 왜 안 되느냐며 따져 물었다. 검경을 따지지 않았고 상하를 묻지도 않았다.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모습은 항상 언론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경찰 수사권 독립을 위한 투쟁의 연속

 황운하라는 인물이 과연 어떤 신념을 갖고 있기에 이렇게 몸을 사리지 않고 튀는 행동도 서슴지 않고 있을까? 고집쟁이의 성장과정은 어떠했을까? 궁금증을 풀기위해선 그를 직접 만나야 한다.

 황 총경을 만난 건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던 7월의 초복날 오후! 대전지방경찰청 생활안전과장실을 찾았다. 한 여름임에도 단정한 정복차림으로 기자를 맞았다. 만나자 마자 걱정부터 했다. 며칠 전 전화로 옛날에 찍은 사진 좀 챙겨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어릴 적 사진이 없단다. 여러 개의 앨범을 내보이며 무엇이 좋겠느냐며 자문을 구했다.

 원칙을 중시하는 딱딱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만났는데, 첫인상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우선 그동안 수사권 독립을 위한 투쟁으로 인사상 불이익까지 받았는데 “후회는 없느냐”고 질문을 던졌다. 한마디로 “후회는 없다”는 결론이 돌아왔다. 부연설명은 좀 길었다. 소신이 묻어나는 설명이다.

   

 “경찰 인생을 살면서 경찰을 변화시키고 개혁시켜야 한다는 소명감이 제 머릿속에 꽉 들어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러 고비를 겪었지만 가치판단이나 기준, 지향점은 똑같습니다. 경찰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개혁을 통해 그동안 경찰이 갖고 있는 강자에 비굴하고 약자에 군림한다는 부정적 이미지를 극복하지 못하면 국민에게 신뢰를 쌓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입니다”

 황 총경은 경찰이 3대 권력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첫째는 정치권력으로 부터의 독립이다. 그는 “그동안 우리 경찰은 정치권력에 무력했고 눈치나 보는 모습을 보여왔다”면서 과거 일제시대 때의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경찰, 독재정권시절 정권유지에 앞장서온 과거 경찰에 대해 통렬히 비판했다. 또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과 현 정권에서도 경찰이 스스로 위상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고 평가했다.

 “제가 때론 경찰 상층부와 충돌까지 하면서 비판을 가하는 것은 경찰을 위해 제가 하는 일이 옳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상층부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잘못을 알면서 남이 나서주겠지 하고 미루면 개선이 안 된다는 것이죠. 비록 돈키호테라고 비판도 받지만, 저의 행동이 결국은 (경찰)조직의 발전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황 총경이 주장하는 두 번째 독립은 그가 그동안 수많은 사건을 저지르며(?) 행동으로 보여왔던 검찰로 부터의 수사권 독립이다. 황 총경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경찰과 검찰이 나눠가지는 이른바 분권을 강조했다.

 “분권이 아닌 권력의 독점은 부패로 이어지고, 결국은 권력 남용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검찰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현실을 한 번 봅시다. 검찰이 마음만 먹으면 전 국민 누구나 계좌를 들여다 볼 수 있고 통화 내역도 알 수 있습니다. 경찰 이기주의 차원에서 수사권 독립을 주장하는 게 아니고 이것은 국민 인권의 문제입니다”

 황 총경은 요즘도 전국의 많은 시민들이 “검찰에게 당했다며 전화가 온다"고 전했다. "이들의 하소연을 100%믿지는 못해도 억울한 국민이 많다는 증거가 아니냐”고 반문한다.

 “일부에선 경찰이 아직 준비가 미흡해서 안 된다고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영원히 안 되는 겁니다. 충분히 기다렸다가 한다는 건 사실상 반대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황 총경의 수사권 독립의 필요성에 대한 설명은 끝이 없을 것 같았다. 화제를 세 번째 독립으로 돌렸다. 언론으로 부터의 독립. 그동안 수사권 독립을 외치면서 언론의 도움(?)을 많이 받아온 입장에서 다소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고 경찰 조직, 좀 더 세분하면 경찰 상층부가 언론에 비굴하게 대처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언론이 경찰을 함부로 공격한다고 봅니다. 언제는 매맞는 경찰을 보도했다가 공권력을 깎아내리는 기사가 나가고... 저는 경찰이 언론에 두드려 맞더라도 좀 더 당당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정치, 검찰, 언론 등 3대 권력으로부터 독립

 `두드려 맞더라도 당당해져라` 시종일관 당당한 경찰로 독립을 강조하는 고집쟁이 황운하! 그의 성장 배경이 궁금했다.

   
색이 바랜 앨범에서 초등학교 6학년 황운하를 볼 수 있다.
황운하는 대전 출신이다. 1962년 아버지 황명주(2004년 작고)와 어머니 심원희(2008년 작고) 사이의 3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대덕구 오정동. 당시 아버지가 큰 아버지의 과수원 일을 돕고 있을 때였다. 그곳에서 초등학교(현암초)에 들어갔으나 아버지가 독립을 하면서 산성동으로 이사를 하는 과정에서 문화초등학교를 잠시 거쳐 산성초.중을 졸업한다.

 아버지는 황해도 출신으로 6.25때 월남해 대전에 내려왔다. 보성전문대로 유학까지 한 당시로서는 지식인으로 분류되던 아버지는 그러나 월남해 적당한 직업을 갖지 못했다. 큰 형님 과수원 일을 돕기도 했고 지역 신문사 등 직장을 갖기도 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막노동도 했고 어머니와 장사도 해봤으나 시원치 않았던 것으로 황 총경은 기억한다.

 그래서 가난했다. 그러나 굶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아버지가 자식들만은 굶기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억척스럽게 살았다는 설명이 정확할 것 같다. 황 총경은 “아버지는 엄청나게 열심히 사신 분이다. 하지만 고지식했다. 일을 하다 마음에 안 들면 충돌하곤 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고지식하고 자존심 강한 성격을 내가 물려받은 것 같다”고 말한다.

 소년 황운하는 아버지의 성격을 닮아서인지 늘 당당했다. 머리 숙이기 싫어하는 자존심 강한 학생이었다. 황 총경이 소개하는 일화.

 “문화초등학교를 다닐 때 일 거예요. 당시 오전 오후반으로 나눠 수업을 받았는데 학교를 가려면 걸어서 한참을 가야 했죠. 그런데 등교길에 선배들이 길을 막고 시비를 걸면서 자신들의 가랑이 사이로 기어가라고 해요. 다른 애들은 무서워서 기어가는데, 나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요. 실컷 두드려 맞았죠. 맞는 한이 있어도 가랑이 사이로 기어가지는 못하겠더라고...또 맞아도 울지도 않았어요”
 
 가난했던 학생 황운하는 당시 기성회비를 제때 내는 경우도 많지 않았다. 그래서 선생님에게 불려가는 일이 잦았다. 그러나 그는 기성회비를 늦게 냈다고 부끄럽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고 기억한다.

 가난했지만 공부는 잘하는 우등생이었다. 초등(3개반) 때는 전교 1-2등, 중학교(8개반) 때는 전교 10등 안팎의 우수생이었다. 하지만 고교 시험에서 낙방, 쓰라린 좌절감을 맞보게 된다.

 당시 동산중에서 40-50명 정도가 대전고에 들어갈 때인데 10등 안팎하던 황운하가 떨어진 것이다. 충격이었다. 집밖에 나가기도 싫었다. 재수할까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다음해부터 연합고사로 바뀌어 속된말로 뺑뺑이로 학교를 배정하기로 되어 있었다. 할 수 없이 후기인 서대전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서대전고에 들어간 황운하는 공부만 했다. 그는 “오히려 더 열심히 하게 된 계기가 된 것 같다”고 말한다. 결과는 1학년 때 이미 드러났다. 충남지역 전 학생이 치른 학력평가고사에서 20등 안에 들어갈 정도였다. 서대전고로서는 개교 이래 최고의 성적이었다. 학교재단 이사장이 집으로 불러 격려와 함께 장학금도 주었다. 고교 내내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가난했지만 자존심 강한 우등생

   
1997년 5월, 일본연수 중 다도 실습 모습.
 경찰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황 총경의 경찰 입문 동기는 무엇일까? 의외로 단순하다. 아버지에게 학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선생님들은 서울대 법대 진학을 권했어요. 하지만 고 3당시 진로를 결정하려는데,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7.30조치로 과외금지를 발표하더라고요. 서울대에 들어가 과외로 학비를 조달하려 했는데... 그래서 서울대를 포기하고 신설된 경찰대에 가기로 했어요. 몇 개 사립대에서 4년 장학금에 매월 생활비까지 준다는 제의도 있었지만, 막연하게나마 경찰로서 직접 국민을 위해, 정의를 위해 일하는 것도 보람이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경찰대 1기로 입학한 황운하는 그러나 초반 회의감에 빠지기도 했다.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도 했다. 1-2학년 때 시험을 백지로 제출한 적도 있었다. 졸업을 못할 위기도 많았다. 하지만 경찰대 출범 초기, 교수들이 너그러운 분위기였다. 그래서 살아났다. 3학년에 올라오면서 부터 열심히 공부했다. 3학년 때 형사소송법을 배우면서 수사권 문제에 눈을 떴다. 수사권 독립군으로 이론적 기반을 닦는 시간이었다. 공부할 당위성을 느껴서인지 성적은 올랐다. 졸업성적은 10등 안팎. 첫 발령지가 서울인 것이 이를 입증해준다.

 이렇게 해서 황운하는 민중의 지팡이 역할을 시작한다. 주로 수사계통에서 근무를 많이 했다. 원칙적인 성격으로 수사통으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수사권 독립으로 가득찬 그는 경찰이 검찰보다 수사실무에서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실제 보여주고 싶었던 욕심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일에 대한 욕심이 많다보니 거의 매일 야근에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학비 부담 서울대 포기 경찰대 입학

 바빠서 결혼이 늦은 것일까? 그는 37세 노총각에 결혼했다. 그러나 바빠서 늦은 것만은 아니었다. 고집스런 원칙론은 결혼관이라고 예외일 순 없다.

 “결혼할 나이는 찾지만 대충하고 싶지는 안했습니다. 이상형을 찾자고 생각했죠. 경정 때니까 일부 중매쟁이들이 정략적으로 중매를 해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주변에선 처가 쪽 도움을 받아야 출세한다느니 하는 말도 많았지만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경찰대 후배가 몇 차례 소개도 해주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퇴짜를 놓기도 했죠.”

 선배의 마음을 잘 읽고 있던 경찰대 후배는 98년 겨울, 이상형의 여자를 소개한다. 대전 출신의 김미경(68년생)양! 황운하는 첫 눈에 반해버렸다. 그리던 이상형을 만났으니 속전속결. 만난 지 100일 만에 결혼에 골인했다. 택일도 자신의 수사권 독립 의지를 확인하기 위해 삼일절 날...

 결혼까지도 수사권 독립과 연관지을 정도로 황 총경의 생활은 온통 `독립`이다. 그렇지만 아내에 대한 사랑만은 끔직한 것 같다. 이상형을 만났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동안 독립을 외치다 좌천과 징계까지 당했는데도 묵묵히 이해해 주는 아내에게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2007년 겨울, 강원도 철원에서 가족과 함께..
  대전시 중구 목동 목양마을 아파트에 살고 있는 황 총경은 요즘 외동딸 예은(6)양과 놀아주고 싶지만 여전히 좋은 아빠는 못된다. 아내야 남편의 마음을 알고 있기에 이해를 해줄 것으로 믿고 있지만, 딸에겐 더 미안하다. 업무상 일찍 귀가하는 날은 거의 없다. 술자리도 많다. 서울에서건 대전에서건 바쁜 건 마찬가지.
 

이상형을 찾자...37세 노총각에 결혼

 황 총경은 고향인 대전에서 경찰서장을 두 번이나 했다. 서부경찰서장과 중부경찰서장. 그 중 서부서장 시절은 `독립`이 강조된 시기였다. 사사건건 검찰과 대립했고, 검찰 수뇌부에게 직접 수사권 독립을 주장하다 경찰종합학교 총무과장으로 좌천되는 사건을 겪었다.

 2008년 중부서장으로 부임해선 독립보단 `원칙`이 발휘된 시기였다. 이른바 `방석집`으로 불리는 성매매업소가 즐비했던 유천동 일대에 손을 댄 것. 30년 역사의 집창촌을 뿌리 뽑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변에서 냉소적이고 회의적인 반응이 많았다. 그러나 그의 고집을 과소평가한 예측이었다. 소신파 황 총경이 주도하는 경찰이 나섰고 유관기관이 함께 도왔다. 그가 진두지휘한 유천동 성매매와의 전쟁은 두 달 만에 승리로 끝났다. 밤새 꺼지지 않던 홍등가는 암흑가로 변했다.

   
중부경찰서장으로 재임하던 2008년, 유천동 성매매 집결지 해체 현장 지휘 모습
 “1년이 지난 지금, 68개 업소 중 2-3개만 영업한다는 소문이 있어요.풍선효과니 뭐니 하는 과소평가하는 말들도 나오고 있지만 성과에 대해서 인정할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 지역 현안을 이슈화, 각 기관이 힘을 합쳐 해결한 사례는 전국적으로도 흔치 않다는 점에서 지역사회에서 만큼이라도 칭찬에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황 총경은 지금 대전경찰청 생활안전과장이다. 주요 업무는 성매매 단속과 불법 오락실 근절. 성매매와의 전쟁은 이제 중부서 관내가 아니라 대전시 전체로 확대된 셈이다. 그는 이미 `클린 대전`을 목표로 내걸었다.

 “이번에 우리 고향 대전을 위해 진짜로 기여해 보고 싶습니다. 대전 하면 둔산은 얼굴이고, 유성은 국가를 먹여 살릴 연구단지가 있는 곳 아닙니까? 이런 곳에 민망한 성매매업소가 난립돼 있다면 도시 건강성과 품격을 떨어뜨리는 일이죠.”

 `클린 대전`을 기치로 살기 좋은 명품 도시를 만드는 데 역점을 두겠다는 포부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도 간간히 전화가 걸려온다. 주로 불법 오락실 등 불법 행위를 단속해 달라는 시민들의 제보란다. 원칙을 중시하는 소신파 경찰로 알려져 있어 이런 제보가 많단다.

 대전 사람 황 총경에게 고향에서 근무하면서 좋은 점과 어려운 점은 무엇일까?

 “총경으로서 금의환향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지만, 어찌됐든 기분이 좋습니다. 고향을 위해 일한다는 생각에 보람도 큽니다. 하지만 한 다리 건너면 선배, 친구, 친인척이 있다는 점에서 처신에 어려움은 있지요. 직원들을 생각해 사적으로 어울리기도 힘들고요.”


`클린 대전` 목표 고향위해 일하는데 보람

 마지막으로, 경찰의 독립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입법권을 갖고 있는 정치 쪽으로 방향을 틀면 어떠냐고 마음을 떠봤다. 설명이 길어졌다.

 “솔직히 후배 등 주변에서 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 국회에는 검찰 출신은 많은 데 경찰 출신은 전무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아쉬운 마음에 그런 말들이 나오는 것 같은데...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것인 만큼 절대 (정치를) 안 한다고 단언하긴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그동안의 행동이) 정치에 뜻이 있는 것으로 비춰져, 순수성보다 (정치를 위한)사전포석이나 정지작업으로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2008년 신임 190기 교육생 신미경(좌), 정민지와 함께 집무실에서..
 경찰개혁을 위한 그의 행동이 정치지향적인 것으로 곡해돼서 평가 받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훌륭한 경찰관으로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라고 강조하고 “경찰의 자존심을 지키고 개혁과 변화를 통해 경찰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으로 보아달라”고 부탁했다.

 경찰을 위한 일이라면 소신을 굽히지 않고 튀는 독립군, 황운하 총경!

 그는 또 언제 튈지 모른다. 그러나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은 아니다. 경찰 독립이라는 한 가지 목표를 향해 튄다. 그 끝은 어딜지 궁금해진다.

   

 <황운하 총경 손전화=010-6392-7112>

   
오창익 사무국장
[내가 본 황운하 총경]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확실히 다른 사람, 황운하 

 검사와 국세청 직원, 그리고 경찰관이 함께 식사를 한다면 음식값은 누가 낼까? 답은 음식점 주인이란다. 설마 그럴까 싶지만, 뿌리깊은 부패와 잘못된 관행은 여전하단다.

 경찰서장이 직원들과 회식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부하직원들이 알아서 계산을 한다. 이런 면에서 황운하는 확실히 다른 사람이다. 그와 몇 번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식당에서 나갈 때, 황운하는 오히려 옆자리의 직원들 것까지 계산을 했다. 함께 먹지도 않았는데, 그저 같은 식당에 들렀을 뿐인데도 그런다. 서장월급이 직원들보다 좀 많고, 애도 아직 어려서 크게 돈 들어갈 곳이 없다지만, 얼핏 봐도 오로지 직원들 밥값으로만 들어가는 돈이 적지 않아 보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를 까닭이 없는데도 황운하의 씀씀이는 남다르다. 돈의 힘을 잘 알지만, 그럴수록 잘 쓰면서 돈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생각인 것 같다. 척박하기만 한국적 기부문화를 생각하면, 그가 이곳저곳의 사회단체 등의 꾸준한 후원자라는 것은 오히려 어색할 지경이다.

 권력에 대한 황운하의 생각도 확실히 남다르다. 바람직한 수사구조개혁을 위해 자신을 내던지기도 한다. 가끔은 무모해보일 정도다. 상대가 검찰인데도 그런다. 직전 대통령마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으면 안될 만큼, 검찰의 공격은 매섭고, 그 힘은 막강하다. 그런데도 황운하는 꾸준히 문제제기를 하며 싸움을 멈추지 않고 있다. 출세하려면 그렇게 해선 안된다. 경찰관 신분으로 검찰과 싸운다고 해서 경찰 내부에서의 출세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황운하로 인한 부담을 함께 짊어질 상층부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돈이든 권력이든 힘에 대한 황운하의 생각은 일반적이지 않다. 때로 싸우고 때로 보이콧의 방식으로 그 힘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한다. 깐깐한 전사의 모습이다.

 황운하가 여기까지라면 그는 훌륭한 전사일지는 모르지만, 인간적으로는 별 매력이 없는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황운하의 진가는 힘없는 사람을 대하는 그의 일관된 태도에서 드러난다.

 법률적 지식이 부족한 청소년들이 법무법인에게 저작권 위반 혐의로 집단 피소를 당했을 때, 경찰서장 황운하는 즉심에 넘기는 묘안을 만들어 대응했다. 50만원, 100만원씩 되는 부담을 짊어져야 하는 합의 방식을 피해, 단 돈 몇만원에 해결하고, 또 전과에도 남지 않는 묘수였다. 성매매 업소 단속도 성매매종사여성의 재취업 등 살펴야 할 것들을 꼼꼼히 따져본다. 그저 정의감만 앞세워 칼부터 휘두르는 일반적인 칼잡이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황운하가 누군지는 그의 부하직원들에게 물어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업무는 엄정하게 처리하지만, 한없이 따뜻하게 대한다. 전의경에게도 다만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고 애쓴다. 민원을 갖고 찾아오는 지역주민들도 마찬가지다. 부당한 청탁이라면 눈과 귀를 닫아버리지만, 억울한 딱한 사정이 있으면 도울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내려고 애쓴다.

 공무원들에게 영혼이 없다는 비난이 끊이지 않고 있다. 대체로 사실이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국가경영의 기본적인 입장이 돌변하는 경우도 많고, 윗사람에게는 굽실대지만, 아랫사람에게는 군림하는 공직자는 너무 많다. 황운하는 일반적인 공직자와는 너무 다른 사람이다. 해서 그런 사람이 우리 주변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안도할 수 있고, 또 희망을 걸 수 있게 되었다.

 황운하는 지금 고향에서 시민을 위한 봉사에 진력하고 있다. 서울사람 입장에서는 솔직히 황운하 같은 사람이 당장이라도 서울에 올라와 더 중요한 자리,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에서 일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하지만 황운하는 자신을 길러준 고향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를 다하고 있다. 지역출신으로 지역에 봉사할 기회를 내팽개치고, 오로지 자신의 영달만을 위해 거꾸로 지역을 이용만 하는 여느 공직자들과는 확실히 다른 태도다.

 자존감을 갖고 일하는 정직한 공무원, 따뜻한 성품으로 일반 시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만을 쫓는 경찰관 황운하는 확실히 다른 사람이다. 밤낮으로 경찰과 다투는 게 일상이 되어버린 인권운동가의 입장에서도 그는 확실히 고마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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